아까 커그에 에반게리온 글 쓰고 나서 작성해본 글입니다. 블로그에 올린 것을 복붙합니다,,

 

    좀 늦었지만 왠지 모르게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TV시리즈를 먼저 보고, (엔딩 뭔데??), 코믹스판을 보고, 신극장판 시리즈 세 편을 다 봤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포함)

 

  애니메이션 판은 연출이 정말 잘 짜였다는 점과 각각 캐릭터들의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난다는 점, 코믹스판은 스토리의 세부적인 부분(인물들의 성격 포함)에서 개연성이 있고 마무리가 잘 됐다는 점이 좋았다. 신지는 코믹스판의 신지가 훨씬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레이와 아스카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메이션판은(극장판 포함해서) 신지에게 무슨 원한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애를 너무 굴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극장판 Q에서... 대체 창 그거 왜 뽑는데? 옆에서 짱똑똑한 애가 뽑지 말라고 하는데 왜 뽑냐구,, 이런 부분은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납득되지가 않는다. 그냥 감독이 신지 인성을 개박살내는데서 쾌감을 느낀다고밖에는...

 

  아무튼 그랬다. 진짜 오래된 건데 TV판 볼 때부터 너무 잘 만들어놨길래 깜짝깜짝 놀라면서 봤다. 전형적인 성장물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난 뭐든지 너무 성장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는 거 아닐까...'라고 약간의 자아비판을 했지만 TV판 엔딩에서 "모든 칠드런에게"하면서 박수치면서 끝나는 거 보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엔딩을 박수로 의결합니다...라는 느낌인데 정말...

 

  신지의 우유부단함이 악명 높은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그런 상황에 내던져진 걸 감안하면 극악일 정도로 심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특히 코믹스판을 보면 그렇다. 인성 붕괴라고 할 정도로 심한 몇몇 장면은 애니판 감독의 악취미로 인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결국 에바에 타느냐 마느냐, 그것이 신지의 딜레마다. 에바에 타는 것은 괴롭지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더욱 괴롭다. 도망치지 말자고 생각하고 에바에 타고자 하지만, 결국 더 큰 괴로움(에바에 타지 않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양새가 된다. 요점은 주체적인 결단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신지의 소망은 미사토의 말에 응답하는 것,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를 실천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질문의 늪에 빠지고 만다.

 

  이는 자연스럽게 "진짜 나"라는 개념과도 연관된다. 신지는 두 명의 자신으로 분리되는데, 에바 초호기의 파일럿으로서의 신지, 그리고 파일럿이 아닌 신지이다. 그것은 간단하게 상징계적 나와 상상계적 나의 분열로 말해질 수 있다. 에바를 타는 것은 모두가 필요로 하는 일이다. 에바의 파일럿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기능으로부터 정의되는 자신이다. 그 기능을 자신에 대해 외부적인 것으로 보게 되면 "이 기능을 제외했을 때 나는 뭐가 남을까?"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했을 때의 나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를 상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호명'으로부터 신지의 입문식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 모든 행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표현한 것은 "에바에 타느냐 마느냐"라는 것이 실은 강제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도를 만났을 때 "지갑이냐, 목숨이냐"라는 선택지 앞에 놓인 상황과 유사하다. 목숨을 선택하면 목숨을 지킬 수 있다. 그렇지만 지갑을 선택한다면 지갑과 목숨을 둘 다 잃을 것이 자명하다. 호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 강제된 선택의 구조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에바에 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제된 상황 속에서 주체성 또한 획득해야 한다. 그것은 관계 바깥의 자신은 없다는 것, 그리고 관계 속의 나야말로 진실한 것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이는 TV판에서의 아스카나 레이 역시 가지고 있는 질문들이다. 특히 레이와의 관계에서, 신지는 자신에게 있어 레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배운다. 수많은 복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신지에게 의미 있는 소중한 대상은 그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차근차근 가까워졌던 바로 그 레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지가 "여기 왜 왔느냐"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에바 초호기의 파일럿 이카리 신지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바로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 작품은 어떤 다른 단계를 밟게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과 코믹스 판에서 그것은 초호기의 각성과 더불어 본격적인 인류보완계획의 전개로 이어지며, 신극장판에서는 두 번째 극장판 "파"를 마무리짓는 서드임팩트의 발생과, 그 이후 "Q"의 세계로 넘어가는 기점이 된다.

 

  사실 저 대답은 그 전에, 신지가 자신의 친구가 자신의 기체로 살해당하는 것(이건 판본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똑같다)을 목격하고 "더 이상 에바를 타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신지의 아버지는 신지의 의도를 거스르고 강제적으로 더미 시스템을 이용해 적이 된 신지의 옛 동료를 살해한다. 그로부터 신지는 더 이상 에바에 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한다. 이때 미코토는 신지를 보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작품 초반부에 가출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던 도피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행동은 에바에 타기 전의 "진짜 나"로 돌아가려는 상상적 도피가 아니라, 신지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즉 무엇이 진짜 선택이냐는 선택한 결과물에 달려 있지 않다. 극 초반부에서 신지는 에바에 타겠다는 선택지와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둘 다 실행해본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신지에게는 "진짜 나"를 배반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주위의 반응 역시 어린애의 투정일 뿐이라는 식이다. 반면 극의 중후반부에 이르러 신지는 또 한 번 에바를 거부하기도, 탑승하기도 하지만 그 선택은 둘 모두 신지 자신의 진짜 선택으로서 인식되며, 타인들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관계는 나 자신이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지평이며, 동시에 "진실된 것"의 유일한 저장소다. 그것이 신지를 둘러싼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며 또한 그것의 해결책이다.

 

  물론 우리는 이를 거창한 운명을 짊어진 신지에게만 국한시켜 읽을 필요는 없다. 성장이라는 것은 일반화가 가능한 테마이고, 그것에 실패했을 때(자신의 입장에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꼭 신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TV판의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의 에반게리온은 위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