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반(半) 백 년 전, 동생 인이 태어난 지 꼭 백 년이 되던 날은 하늘빛이 참으로 고운 봄날이었다.
아침에 수련관의 제자들과 더불어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는 이미 치렀다.
물론, 앳된 얼굴에 아이 같은 동글동글한 웃음을 지으며 새하얀 머리를 풀러두고 수련관 여기저기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인이 상수(上壽 : 백세의 나이)가 되었다 하니 제자들은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인은 기껏해야 이제 막 열대여섯세로 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련관의 제자들도 보통 비범한 자들이 아닌지라 모두 바깥(수련관을 제외한 하계)의 사람들보다 두세 배로 오래 살지만, 많이 사는 자가 이백세 조금 넘게 사는 마당에 인은 과하게 어려 보였다.
그러나 수련관 제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수련관에서 적게는 삼십년에서 많게는 백년 이상을 수련하며 지냈던 지라 곧 잡념을 사그러트렸다.
그들은 모두 얼마나 먼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윗대(代)의 선진(先進 : 선배)들에게 익히 수련관의 스승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며, 그들이 직접 그를 보았음을 누누이 들어왔었다.
그러니 기이하다 여기면서도 하늘이 낸 스승의 딸이니 뭔가 다른 것이 있어 그런 것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설혹 의문을 제기한다 해도, 자신들의 스승은 허허 웃으며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하계인들에게 셀 수 없이 오래 전 일인지라 어떻게 하여 수련관에 이리도 기이한 가족이 하늘로부터 왔는지는 기억하는 이가 없었지만, 제자 중 몇몇에게는 하계에 내려온 뒤에 태어난 인의 첫 모습은 어제인 듯 생생했다.
하계에서 낳은 자식이라 그러한가 상계에서도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제 언니와는 달리 특별한 능력도 타고나지 않았고 여리기만 했다.
천계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빛의 기운마저도 그리 강하지도 않아 하계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가 행여 잘못 태어난 것이라 하계인들과 같이 짧은 세월에 바스라지지나 않을까 바람에 날아갈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항시 염려하고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길렀다.
허나 약하게 태어났다하나 인은 역시나 천왕 부부의 자식이었다.
백세를 맞은 오늘도 인은 활달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련관의 제자들을 귀찮게 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인을 귀찮아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래서 굳이 천계에서는 들어본 바도 없는 성인식을 치러 축하했던 것이다.
그 연유가 어찌되었건 잔칫상을 받은 제자들이나 인이나 기쁘기는 매한가지로 보였다.
그 중에서도 연은 그 누구보다도 기뻐 보였다.
어디 하나 닮은 데도 없는 동생이건만, 숨이 꿀꺽 넘어갈 것 같이 여려 아무도 손조차 대지 못하는 인을 가장 먼저 안고 얼러준 이가 연이었다.
천계의 시간으로 하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꽤 늦게 동생이 생기자 연은, 제 부모보다 동생을 귀히 대했다.
연은 자신 때문에 인이 이리도 허약하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항시 마음 아파했으나, 인은 언니가 어떤 마음을 품었건 누구보다 사랑하고 따랐다.
어쩌면 연도 동생에게 사랑을 듬뿍 줌으로써 잊고 싶은 아픈 마음을 누르고자 정성을 다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리도 인은 연과 부모의 염려와 애정 속에 선하고 곱게 자랐다.
그리고 항시 연은 마음도 몸도 곱게 자란 인을 자랑스러워했다.
축하 연회가 끝나자, 여느 날와 다름없이 한참 제자들의 수련을 방해하다 언니에게 손을 잡혀 얌전해진 인은 콧노래를 불렀다.
연은 인이 어찌하든 혼내는 법이 없었지만, 인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면 슬며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 얼러 산이든 강이든 지척의 아름다운 곳들을 인의 마음 한가득 담아주곤 하였다.
더욱이 날도 화창하고 바람이 솔솔 불어, 적시에 맞춰 핀 오색의 꽃들이 산들산들 춤을 추는 아름다운 날에 연은 동생 손을 붙들고 수련관 뒷산에 있는 둘만의 비밀 장소로 이끌었다.
뒷산이라 해도 워낙에 높은 산 위에 위치한 수련관인지라 뒷산의 꼭대기도 운무(雲霧)로 둘러싸여 그 형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고, 감히 오르기 두려울 정도로 깎아지른 산이었다.
그리고 두 자매의 비밀 장소는 바로 그 보이지도 않는 뒷산의 꼭대기였다.
하늘에 가까워 그러한가 이 장소는 몇몇 천계의 초목이 종종 그 모습을 보였다.
인이 약하게 태어났다고는 하나 워낙 하계인들에 비할 바도 아니었으며, 자라면서 가진 빛의 기운이 서서히 늘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이 장소를 찾아올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언니 손을 잡고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인은 이곳을 가장 좋아했다.
하계에서 그나마 천계에 가까운 이곳에서는 인도 특별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언니! 이것 봐라?”
인이 언니를 서둘러 부르자, 연은 밝게 웃으며 인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인의 허리께까지 오는 엄청난 크기의 민들레가 고개를 마구 흔들어 제끼고 있었다.
연이 보아도 그는 정말 기이하기 그지없어 실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어... 특이... 음... 그니까... 음...”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뭔가 칭찬을 바라는 인을 바라보며 인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보이는 바와 같이, 인은 생명을 키워 자발적인 의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키워낸 생명들은 전부 인의 성격을 닮는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나마 몇 년 전 거대 상수리나무를 키웠다가 나무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통에 한 번 이 비밀 장소가 초토화된 뒤에는 걸어 다니는 거대 생물들은 키워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파급효과인지 걷지 못하는 인의 생명들은 저렇듯 뭔가 하나씩 결함을 지녔다.
꽃씨가 어디로 흩날리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꽃대궁을 흔들어대는 민들레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다.
“그, 그게... 흠... 으흠... 굉장히... 건강하구나.”
인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잠시 아미를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확 낯이 펴지며 생글생글 웃었다.
“맞아! 건강해.”
연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번에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은 매 새끼를 자기 키만하게 만들어서 고양이 소리를 내게 만들었을 때는 연이 있는 그대로 징그럽다고 했다가 하루 종일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제 갓 태어나 눈도 못 뜨는 선분홍빛의 새 새끼를 거대하게 키워서 맞지도 않는 울음소리를 내게 하는데 어떻게 더 좋은 반응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연은 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천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슬퍼하던 동생이 이리도 기뻐하는데 어찌 함께 사랑해주려 노력해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어지럽게도 격하게 흔들어대는 꽃에 마음이 동했는지 인이 거대 민들레에게 다가가 그 의지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제야 민들레는 산들거리는 바람에 살랑거리며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언니, 어머니는 식물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지?”
“그렇지.”
인은 거대 민들레 씨앗을 하나 뽑아 바람에 실려 보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또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사물의 자취를 읽어 과거를 볼 수 있는 거지?”
“...”
연은 자신이 아버지인 천왕의 능력을 잊고 조심하지 않아 상계를 떠나야만 했던 사건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인은 대답이 없는 것을 긍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천계인들은 다들 고유 능력이 하나씩 뿐이야?”
“그를 하나라 하면 하나일 것이고, 여럿이라 하면 여럿이겠지.”
“그리 말하면, 어려운데?”
“그래. 하나씩이야. 하지만 여럿으로 보이는 능력들도 있지. 네 능력 같이.”
“으흠... 그렇구나. 언니는 보구(寶具)를 몸 안에 보관할 수 있잖아.”
“응, 맞아.”
“그리고 언니는 미래를 읽을 수 있잖아.”
“응?”
인의 말에 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계인들은 저마다 고유한 능력을 하나씩 타고났지만, 그 능력들이 제각기 달랐다.
헌데 그들 중에 인이 물은 것처럼 능력이 여럿으로 보이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허나 여럿으로 보여도 상관관계가 매우 깊어 그 근본의 힘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인의 능력도 생명을 키우는 것과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 두 갈래로 나뉘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생물 그 자유의 의지를 기반으로 그 크기와 능력이 정해져 키워진다.
이는 상계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법칙이었다.
그러나 연은 바로 이런 상계인들의 법칙을 깬 불편한 존재였다.
단순히 연은 다른 모든 천계인들보다 훨씬 상위의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배척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능력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연이 천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빛의 기운뿐만 아니라, 어둠을 기운도 가졌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연은 천계인들에게 배척받고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 갇혀 살았던 것이다.
인은 그런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연에게는 끔찍하고도 괴로운 세월이었다.
빛 한 점, 말 한 마디조차 없던 그 어둠 속에 평생 유폐될 수도 있었던 연에게는 그때 일만 생각해도 머리가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났다.
허나 연은 곧 마음을 다잡고 동생에게 언제나와 같이 다정하게 웃어줄 수 있었다.
인은 민들레 씨앗을 하나하나 뽑아 날리고 이제 막 언니를 돌아본 참이라 연의 격한 감정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언니야.”
“응?”
귀염성 있게 부르는 모습에 연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인의 다음 물음에 연의 웃음은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하계에 우리 수련관에만 상계인이 있는 건 아니지?”
“아...”
“응? 응? 으응? 맞아?”
귀여운 얼굴로 자꾸 물어오는 인의 성화에 연은 당혹스런 얼굴이었지만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 반대편의 국왕도 상계인이야.”
“그럼 저 바깥의 흑도국(黑度國) 왕은 무슨 능력을 가진 거야?”
연은 다시금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인이 사랑스러워 연은 상계의 법도를 묵인해주었지만, 상계인들은 서로가 설혹 상대의 고유 능력을 알아도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해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대적해왔던 마계인들의 능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금기였다.
능력을 간파당한 상대는 자신의 능력을 아는 상대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천왕 가족은 모두 천인 고유 능력이 대인(對人 : 남을 대함) 능력이 아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대인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능력의 제한은 치명적이었다.
연과 인의 아비인 수환(殊奐)이 천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대인 능력이 없는 절대적 능력자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열네댓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계인들은 대인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에 상대 능력 파악에 대한 내용은 당연히 금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능력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피를 부르는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다.
“인아. 상계인들에게 고유 능력이란 자신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거야. 그렇기에 그 누구도 서로의 능력에 대해 입에 올리지 조차 않아. 하물며 마계인의 능력에 대한 건 아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인 거야.”
“그치만 궁금한 걸?”
사실 인도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다.
꼼꼼한 천왕 부부가 자식 교육을 그리 설렁설렁 시킬 리 없었다.
다만, 인도 연이기에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이었다.
연도 그를 알기에 항시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대한 답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연은 이번 인의 질문의 답을 몰랐기에 답을 알려줄 수도 없었지만, 설혹 안다고 해도 입을 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도 하계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워낙 말릴 수 없는 말괄량이 기질이 있던 터라, 인만큼이나 궁금증이 많아 질문의 답이 궁금하긴 했다.
게다가 아예 가월기의 해극궁에서를 제외하고는 천인과 마인이 만나는 것에 불가능에 가까운 상계와는 달리, 하계에 내려온 안지(顔支 : 하계에 내려온 상계인)들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 장벽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만날 수 있기에 몇 가지 법칙에서 자유로웠다.
아무리 궁금하고 아무리 자유로워도 능력에 대한 금기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은 이렇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언니야, 우리 놀러 가자.”
인의 갑작스런 말에 연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당황한 연보다 콧노래를 부르며 연의 눈을 피하려 하는 인이 훨씬 미묘한 표정이었다.
연은 바로 인의 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너 흑도국왕의 능력을 알고 싶어서 나가려는 거지?”
“아, 아냐! 누, 누가 그렇댔어! 그, 그냥...”
“정말?”
“물론 것도 좀 궁금하지만,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수련관 주위를 벗어난 적도 없으니까 이제 성인이라고도 했고 한 번 나가보고 싶어.”
인의 의도는 빤히 보였지만 그래도 연은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바다에 갈까?”
연의 말에 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뫼 아래 마을에 놀러 갈까?”
“아니.”
역시나.
“흑도국(黑度國 : 마계의 영향을 받은 하계의 국가)?”
“어? 어...? 음... 그게... 으음... 그러니까 말이지...”
“거짓말은 말아.”
“... 응...”
“휴우...”
상계인들에게 하계라 불리는 곳은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었다.
후경(厚璟 : 천계의 영향을 받은 하계)과 흑도국, 각 구역은 상계의 영향을 받아 각각 천계와 마계를 닮았다.
허나, 하계는 두 구역을 가로지르는 장애물로 인함인지, 서로 굳이 침범하려 하지도 않았고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그리고 상계인들과 달리, 하계인들은 서로가 눈에 띠게 다르지 않아 신분을 숨기거나 위장한다면 어디 출신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천족인 연과 인이 마계의 영역권에 드는 것은 좋지 못했다.
천족이 가진 빛의 기운과 마족이 가진 어둠의 기운 사이에는 굉장히 강력한 인력(引力)이 작용하기 때문에, 체내의 기운이 약한 자가 반대 기운의 영역권에 들면 서서히 기운을 빼앗겨 소멸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윤회를 거듭하는 상계인들과 달리 그 영혼부터 존재가 사라지는 그들이였기에, 마족과 천족의 교합은 당연하게 금기로 여겨졌다.
널리 퍼진 몸 바깥의 기운보다 체내의 응축된 기운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에, 교합한 자 중 하나라도 기운이 강하면 한쪽이 삽시간에 기운을 빼앗겨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흑도국이라니.
인 또한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연의 일로 상심이 큰 천왕 부부가 인이 태어나자마자 제일(第一)로 금한 것이 마족과의 조우요, 제이로 금한 것이 마계 영역권의 출입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이 흑도국에 가자고 했다.
물론, 마계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 흑도국은 전체적으로 어둠의 기운이 그리 강하지도 않으며, 천족 중 가장 강한 연이 함께라면 조금씩이라도 흩어지는 빛의 기운을 보충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은 아직까지도 천왕 가족의 근심거리였다.
“위험해.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누차 말씀하시지 않았니...”
“마족과 마주치지 마라. 어둠의 기운이 있는 곳에는 발도 들이지 마라. 나도 알아. 안다고! 헌데 언제가 되었고 만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어?”
“그래도 굳이 더 마주치기 좋을 상황을 조성할 필요가 무에 있니?”
“꼭 만난다는 것도 아니잖아.”
“마계 영역권에 천계인 둘이 딱 나타났는데, 거기 안지가 확인도 안 해보겠니?”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익숙해지는 게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지!”
“너 지금 그거 억지라는 거 알지?”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타일러 보려 하였지만, 인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완강하기만 했다.
하지만 연의 마음은 이상하게 그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단순히 동생이 걱정된다, 금기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가서는 아니 된다고 가슴이 외쳤다.
“안 돼.”
“왜? 어째서? 왜 안 되는 건데? 왜?”
“너는 너무 약해.”
“나도 이제는 그리 약하지도 않다, 뭐!”
“그걸 네가 어찌 알아?”
“아버지, 어머니가 방에서 하시는 말씀 들었어! 나도 이제 천족 한 명 몫은 할 수 있다 하셨어!”
“그렇다고 네가 강한 건 아니야.”
“그리 약하지도 않아!”
“안 된다면 안 돼.”
“왜? 언니, 왜!”
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본디 순한 성격의 인은 이렇게 남을 조르거나 되묻는 일이 드물었다.
이 정도로 나올 정도면 저 혼자서라도 흑도국에 가겠다 나설 기세였다.
연은 자꾸만 안 된다는 하는 마음을 동생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안 된다, 인아.”
“언니, 나 성인이 된 기념으로 흑도국에 데려가 주면 안 돼? 정말 안 되는 거야?”
“인아...”
“전에 여기 왔을 때는 나 성인이 되면 가고 싶은 데 다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인의 눈에서 굵은 수정이 하나가 똑 떨어졌다.
연은 마음 한 구석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속에서는 안 된다고 외쳐도 인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이상, 그녀는 계속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은 안 된다 외치고 있었지만, 사실 연은 인에게 여러 모로 미안한 감정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상계인이면서도 하계에서 태어나 다른 상계 구경은 해본 바도 없고, 동족이라고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옷자락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일이 다 연은 자신에서 비롯되었음을 생각하면 항시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인의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천계의 수호를 받는 후경도 다 둘러보지 못하게 해 세상 구경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후경이라 해도 자식을 방치했다 이리 큰 사단을 낸 것이라 자책하던 천왕 부부가 인만은 그리 두지 않겠다며 아예 강수(强數)를 두어 인을 수련관에 묶어두려 하는 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나마 수련관 주변을 둘러 다닐 수 있는 것도 전부 연의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바였다.
그런 연이 동생의 부탁이라면 무얼 안 들어주고 싶겠는가.
상계인에게는 마음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하계인들의 눈물과 같은 보석을 떨구는 일조차 큰 고통인데, 동생이 그런 고통의 눈물을 흘리니 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후우... 기간은 그리 오래는 아니 된다.”
“들어주는 거야?”
“그래...”
“정말? 정말이지?”
“응.”
“지금 떠나자!”
“지금?”
“응!”
“지금은 좀... 아버지, 어머니께도 알려야지.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필요하고.”
허나 인은 시간을 끌어서 자신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언니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의 귀에 들어가면 수련관을 나설 엄두조차 나지 않게 혼이 날 터였다.
“지금! 지금 떠나자.”
허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쏙 들어갔던 눈물이 단박에 눈 한 가득 고였다.
연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꺼리는 마음과 동생의 원(願)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격돌했다.
그러나 단단하기 그지없는 눈물에 새빨갛게 그어진 눈의 상처가 보이자 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 그래. 가자꾸나. 한 번 정한 이상 빨리 다녀오는 것이 낫겠지.”
“응!”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께 말씀 올리고 가자꾸나.”
“흐응...”
“인아. 착하지? 언니가 갈 수 있게 해줄게.”
“으응...”

동생의 뒷모습만 봐도 얼마나 기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앞서 빠르게 하산(下山)하여 뒷보습만 보였으나,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연의 귀에 다다랐다.
동생의 마음이 이리 와닿으니 연의 입가에도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더구나 예상 외로,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도 금기시 하였으나, 매년 정기적으로 흑도국의 왕이 나라 안을 정찰하는 시기도 아니었기에 그를 만날 일이 특별히 없을 거라 여기는 마음도 있었다.
천계인이 둘이나 그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신경이야 쓰이겠지만, 서로 마주치는 게 그리 좋지 않음을 그도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찾아오겠거니 했다.
이러나 저러나, 천족(天族)이 마계의 영향권으로 가는 것은 다소 염려되는 일이나 천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연이 함께 하는데 얼마나 위험하랴 싶은 마음도 있었다.
허나 그 어떤 이유보다도 금지옥엽 귀한 딸이 새빨간 눈으로 굵은 수정을 뚝뚝 흘리며 간절히 청하는데, 성인이 된 기념으로 그리도 가고 싶어 하는 데 못 들어줄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 생각보다 쉬이 수환(殊奐 : 천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헌데 여리(麗悧 : 천왕비)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녀에게는 딸을 잃을 뻔했다는 그 괴로움이 아직도 가슴에 맺혀 마음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아비인 수환보다도 어미는 제 자식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이 숨겨둔 수안(囚顔 : 마계의 탈)을 발견한 것은 수환이었으나, 연의 인연을 깨고 하계로 내려갈 채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한 것은 여리였다.
그 뒤 여리는 인이 태어날 때까지 마음을 놓아 버린 텅 빈 자식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자신이 고달픈 것보다 자식이 괴로워하는 것이 더욱 아팠다.
헌데 어찌 이리도 쉽게 다들 괜찮다, 한 번은 괜찮다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도 아팠으면서, 그리도 괴로웠으면서, 어찌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마음을 열어버린 것인지.
자신이 잘못된 것인가 한참을 홀로 괴로워했다.
허나 당사자인 연이 청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애간장이 끓었을 수환이 괜찮다하지 않은가.
수환과 여리는 겉으로만 봐서는 연과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여리는 수환과 억겁(億劫 : 무한하게 오랜 시간)의 세월을 함께했다.
그런 수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그의 의견도 중히 여겨주고 싶었다.
그저 모르는 척하고 보내줄 수도 있겠지만, 인이 전부터 멀리 하계를 구경하고 싶다 한 것만 거의 반 백 년의 세월이었다.
차라리 한 번 내보내주고 더 이상 성가시게 굴지 않으리라 약조를 받아내고서야 허락을 내렸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살펴본 연의 마음 또한 그리 밝지는 못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다 그리 여겼다.
그러니 동생의 즐거운 모습에 연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여전히 편치 않았다.
죄책감뿐만이 아니라 해도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동생의 행장(行裝 : 여행갈 때 쓰는 물건과 차림)이나 성진(星辰 : 많은 별)을 통해 미래를 읽어볼 수도 있지만, 연은 웬만하면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다른 것이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이었기에, 다들 알고 있다 하여도 능력이 둘이라는 것을 숨기려했다.
물론, 그리 노력해도 연이 능력을 쓰는 것을 본 적조차 없는 인에게도 들키는 실정이었으나, 저주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능력을 굳이 사랑하는 동생을 대상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동생에게 불편한 내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나기에 행장을 가볍게 꾸리는 것이 옳으나 연의 행장은 연이 아니라면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연은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