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연이 몰래 만남을 가진 것도 꽤나 오래된 어느 날, 연은 그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서두르는 통에 연은 항상 품에 고이 간직하던 그의 탈을 놓아두고 화이소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연의 침소에는 덩그러니 그의 탈 만이 남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마계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왕인 수환(殊奐)은 천항궁에서 마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천계에 겁도 없이 잠입한 간 큰 양상군자를 잡기 위해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의 발길이 미친 곳에는 탈 하나가 있었다.
마계의 탈, 수안(囚顔).
해극궁의 연회는 이미 끝났기에 사라졌어야만 했던 탈이다.
하지만 그 탈이 자신의 딸의 방에 있다.
탈은 연회에서 자신을 가리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신성한 가월기에 자신의 모습을 대신한 탈을 부수거나 태움으로써 모든 부정을 씻어 버려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백 년에 단 한번, 단 한 차례만 자라는 천수(天樹)로 만드는 탈이 쳔계의 탈인 피아(避我)도 아닌 마계의 탈, 수안이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목(魔木)의 탈이 딸의 방에서 발견되었다.
딸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천왕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연은 흰 달이 모습을 감춘 후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연은 조용하게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행복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그와 더 가까워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그를 사랑하게 될 터였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은 한창 물이 오른 한 떨기의 수선화와 같았다.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하고 제 방 문을 연 연은 방 안에 있는 부모의 존재에 놀랐다.
부모는 자신이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 다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부모는 모르기를 바랐다.
부모가 그의 존재를 알면 자신을 그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 할 것이다.
그녀도 그와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의 말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언젠가는 부모가 알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늦추고만 싶었다.
“어디를 다녀오는 게냐?”
“그.. 그것이...”
“연아, 이리도 늦게 다니는 연유가 무엇이냐? 네 아버지께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는지 모른다.”
“....”
“연아.”
“어디를 다녀왔는지조차 말을 할 수 없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이다!”
“....”
“여보, 소리를 높이는 것은 좋은 방도는 아닙니다.”
“저 아이가 말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무슨 연유인지, 도대체 수안이 왜 이 천항궁에 들어와 있는지!”
수안이라는 말에 연은 아연실색(啞然失色: 뜻 밖의 일에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람)하여 제 몸을 뒤졌다.
없다.
그의 탈이 없다.
그를 처음 만나고 단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것이 없다.
“왜 말을 못하는 게냐!”
“여보.”
“말을..!”
“소녀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연은 부모에게 무릎을 꿇었다.
안 될 일을 되고자 만드는데 못할 일이란 없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인 게냐?”
“저는.. 그와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
“그가 누구더냐?”
“....”
“누구냐고 묻질 않느냐!”
“혹, 네 동무라던 그 자를 뜻하는 것이냐? 그 해극궁 연회에서 만났다는 그 자?”
“예, 어머니....”
“그가 무엇이길...”
“그 동무가 마족인 것이냐?”
“예...”
“설마 너!”
“어떤 사이더냐?”
“그 자를 온 마음을 다해 연모(戀慕)하고 있습니다.”
“연이, 네가!”
“여보, 화를 내지 말고, 아이의 말을 차근차근 들어보아야 합니다. 제발 소리 높이지 말고 아이가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천왕은 못마땅했지만, 옳은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연아.”
“예, 어머니.”
“상계(上界)의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
“예.”
“그럼에도 그 자를 계속 만나야 하겠느냐?”
연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지만 간절함을 전하는 데에 그 작은 움직임이면 충분했다.
“그 자가 죽을 것이다.”
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그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죽일 수 있다.
그와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의 명은 그칠 것이다.
그의 따뜻한 미소도, 부드러운 목소리도, 우수에 찬 눈빛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럼 너는 네 영생 모두를 슬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겠지.”
연의 입술에서는 서서히 붉은 피가 세어 나왔다.
“죽음이다.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슬픈 것이고, 다시는 만질 수 없어서 미워하는 것이며, 다시는 행복할수 없어서 죽임인 것이다.”
이제 핏기가 남아있지 않은 입술을 타고 툭 터져 불어져 나온 석류 알보다도 붉은 피가 흰 비단 도포를 물들였다.
부부는 그런 딸이 너무도 가여웠다.
하지만 불행한 길로 뻔히 눈뜨고 들어가는 딸을 앞두고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느냐?”
크게 숨을 들이 쉰 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다시 입술을 깨물고 고개만 조금 움직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깊은 한숨을 내쉰 천왕은 품에서 특별한 무늬 하나 없는 단순한 모습을 한 탈을 꺼내 앞의 탁자에 올려놓고 딸의 방에서 급히 빠져나갔다.
천왕비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연에게 다가와 소매로 딸의 피를 살포시닦아주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갔다.
다리에 모든 힘이 풀리며 연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주저앉았다.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조금이라도 슬픔을 줄일 수 있으련만 연은 울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운 굴 속에서 울다가 수 천 번, 수 만 번 까무러쳤다.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눈물 대신 피만 흘렀다.
연의 방에 붉은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날수록 밤은 깊어만 갔다.
 
이미 날이 밝아 화이소 지천의 꽃들이 만개하건만 그녀가 오지 않았다.
소전은 불안한 마음을 곧 올 것이라는 말로 겨우 다스리며 그녀를 밤 새 기다렸다.
아침 이슬이 그의 어깨 위에 앉고 밤 안개가 소전의 눈 앞을 가려도 그녀는 곁에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이름 모를 풀과 그녀가 살폈던 작은 소리로 우는 새도 그대로 그의 곁에 있건만 그녀는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1각이 한 해보다도 길었고 그녀가 없는 지금이, 쫓겨 다니며 수 차례 거듭 죽여야만했던 암살자들보다도 악독했다.
소전은 죽을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소전이 마왕이 되게 도와준 심장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발이 저리고 몸이 안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손만 닿으면 아리지도 쓰리지도 않을 터인데 그녀는 소전의 곁에 없었다.
그녀가 오지 않은 이후 소전은 화이소를 단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 새에 그녀가 오기라도 할까 염려했다.
얼마가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힘겨운 시간이 계속됐다.
너무 아파서 오지 않는 그녀를 원망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화이소에서 첫 만남부터 날 죽이려고 했던 그녀를 미워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어째서 내가 아픈 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내가 기다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살아온 날보다도 긴 역겨운 시간이 흘렀다.
그는 숨가쁜 상념에 서서히 지쳐갔다.
그런 그를 뒤에서 누군가 안았다.
그녀의 체취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다.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그의 것이 아닌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녀다.
그는 뒤돌아서 보지 않은 사이에 부쩍 마른 그녀를 품에 가뒀다.
이제 그들 사이에 조심해야 하는 문제나 규제 따위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와 그녀뿐이다.
그녀 만이 가진 따뜻하고 포근한 향취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그녀를 온전히 느끼려는 듯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몸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만이 가진 시원하고 부드러운 향취가 그녀에게 닿았다.
그가 지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그녀를 탐하고 그녀가 그를 찾았다.
그와 그녀의 숨바꼭질은 끝났다.
 
다리 사이로 지나는 서늘한 바람에 그녀가 살포시 눈을 떴을 때 밤의 어둠보다도 깊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저 눈을 볼 수 없는 것일까.
그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그녀의 잠을 방해할까 치울 때 하늘보다도 맑은 눈이 자신만을 향해 반짝이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저 눈이 사라지는 것일까.
그도 그녀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바보라도 되어버린 걸까.
어디가 아프지는 않냐는 한 마디, 이제 움직이는 것이 힘들지는 않냐는 한 마디 걱정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제 이름은 연이에요.”
그녀의 이름은 연(聯)이다.
“저는 소전이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소전(蘇纏)이다.
처음 들은 이름이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를 위해서 그 이름을 불러서도 서로를 찾아서도 안 된다.
누가 살고 누가 사라지든 그들에게는 죽음 만이 남는다.
죽음이 싫은 이유는 아프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