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극궁이 있는 마계와 천계의 경계선인 화이소(和異所)의 반은 푸른 싹이 돋아나고 반은 죽어버린 기괴한 나무 그늘 아래 그녀가 서있었다.

화이소에서는 더 이상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이 마계와 천계를 환하게 비추고 있건만 그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 멀리 천계의 영물인 비호(緋虎)의 영험한 울음소리인지 마계의 영물인 마견(魔犬)의 구슬픈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기려(綺麗 : 곱고 아름다움)한 두 눈만 감았다 떴다.

그녀의 푸른 치마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흩어졌다.

그는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녀의 모습이 달빛에 이리도 처량한데 그녀의 모습을 봐주는 것은 바람뿐인 듯했다.

마음이 공허하니 뒤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는 시린 바람이 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는 따스한 순풍이 불었다.

그는 그녀보다도 더 일찍 화이소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아 기억하고 싶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천족인 그녀였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로 벅차 올랐다.

그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과 반대되는 기운에 재빠르게 손에서 보구(珤具 : 천족과 마족이 성인식을 치르면 받는 무기, 자신의 분신과 같음), 비월도(飛月刀)를 불러냈다.

자신의 보구에 짙은 빛의 기운을 잔뜩 불어넣고 뒤의 마족을 향해 겨눴다.

그녀의 빠른 대응에 그는 놀랐지만 살풋 웃고 그녀의 보구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운은 마왕인 그가 막기에도 벅찰 만큼 강했다.

전마제에서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自責感)이 가득 차 올랐다.

만약 그녀가 그임을 금방 알아채지 못하고 보구를 멈추지 않았다면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리라.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싫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내가 싫다.

천왕인 아버지보다도 강한 내가 싫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내가 싫다.

눈물이 그녀의 투명한 볼을 타고 흘렀다.

흘러내린 눈물은 둥글게 모여 흰 진주로 바닥에 닿았다.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그들 사이에 흘렀다.

갑작스런 공격에 불이 치밀어 올랐던 그의 마음이 뭉클하게 움직였다.

저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미안해요. 정말.. 정말로..”

그는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도, 그녀의 섣부름이 서럽지도 않았다.

자신을 몰라본 그녀가 밉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고 싶다.

내가 잘못해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안... 정말 미안해요.. 정말!”

그는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당겨 품 안에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품에서 위로 받기를 바랐다.

그의 등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용서하기를 바랐다.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위로 받고 용서한 이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화이소를 찾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의 계급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름이나 계급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행동에 집중했다.

그들에게 이름이나 계급은 단지 거추장스러운 장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을 만든 자는 천족과 마족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음을.

서로를 가지고 싶고, 더욱 다가가고 싶고, 더 가까이에서 서로의 체취를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족과 마족 사이의 사랑은 강한 자에게는 마음의 짐을, 약한 자에게는 죽음을 선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짐승의 왕인 호랑이와 여린 토끼가 교합을 하면 약한 쪽은 죽음 혹은 그보다도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세계의 규칙이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와 그녀의 마음에 불이 붙을수록 위험했다.

한 명은 죽음의 고통을, 한 명은 죄책감을 품고 영원에 가까운 생을 이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