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동(東)으로 떠났다.

천계의 입구에는 이미 많은 탈들이 불타고 남은 가루만 남아 있었다.

천족들은 해극궁 연회가 끝나면 항상 천계의 입구에서 각자의 탈을 비밀스럽게 태워 아무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녀도 수많은 탈처럼 자신의 탈을 태워 가루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그 누구도 그녀가 무슨 탈을 쓰고 연회에 참여했는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녀의 탈이 아니라 그의 탈이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탈을 그녀는 도저히 태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도포 안에 탈을 숨겼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뒤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녀의 것이 된 그의 탈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있을 때만 드러냈던 얼굴을 내보이고 이음새 하나 없는 흰 도포를 흩날리며 천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새와 같은 날개도 없고 그녀가 입은 도포가 새의 깃털도 아니건만 주변의 공기가 모두 그녀를 받혀주는 듯 했다.

바람이 그녀를 스칠 때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탈이 그녀의 속살을 간질였다.

달 아래 빛나던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피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녀의 속도가 빨라졌다.

빨리 그를 보고 싶다.

어딘가에 있을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그녀가 빠르게 향한 곳에는 항상 하늘의 모습을 닮은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궁이 있었다.

천항궁(天恒宮).

천계에서 가장 강하고 모든 천족이 사랑하는 자인 천왕이 사는 곳.

그곳이 그녀의 거처였다.

하늘의 빛을 전부 담을 듯 빛나는 천항궁으로 그녀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붉은 작약이 만개하고 은은한 연꽃과 부드러운 수선화 향이 물씬 풍기는 궁의 뜰에 내려왔을 때 그녀를 반기는 부드러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명아(明娥)야, 나 왔어.”

주인의 목소리에 더욱 반가운지, 긴 꼬리의 문금(文禽 : 공작), 명아는 높은 울음소리를 길게 뻗어냈다.

그에 그녀도 화답하듯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왔느냐, 연(聯)아.”

“즐거웠는지 모르겠구나.”

명아와 그녀의 맑은 소리를 듣고 선남선녀 한 쌍이 천항궁에서 걸어 나왔다.

천왕(天王)과 천왕비(天王妃)였다.

또한 그들은 그녀의 부모였다.

“매우 즐거웠어요. 좋은 동무도 만났고요.”

“참으로 다행이구나, 연아.”

“그래도 달이 제자리에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오다니, 이 아비의 속이 다 문드러져서 형체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냐?”

“참으로 불효를 범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래도 간간이 소식이라도 전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여보, 그만해요. 우리 연이가 성인이 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리도 아이처럼 혼을 내십니까?”

“하지만 여보.”

“차가 다 식습니다. 식기 전에 마시는 차가 가장 맛있답니다.”

“그럼요. 어머니께서 특별히 아버지 만을 위해 기르신 차가 아닙니까?”

“허허허, 하긴 여리(麗悧), 당신의 차는 늘 향그럽고 특별하지요.”

“당신도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차 향에 몸을 맡긴 천왕 가족과 아름다운 새, 명아는 향기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그 시각에도 그녀, 연의 머리 속에서는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서(西)로 떠났다.

새까만 어둠도 아니고 밝은 빛도 아닌 포근한 어두움의 세상의 입구에서 그는 무수한 파편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마족들이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자신들의 탈을 부수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도 이제 아무도 몰래 그녀의 손과 입술이 닿았던 탈을 부수어야 한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래왔고 그런 것처럼 이 탈도 마계의 입구를 장식하는 무수한 파편들 사이로 흩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짙은 군청색 도포 안에 탈을 숨겼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그녀의 숨결이 그의 살에 닿은 듯 그의 몸이 간지러웠다.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달과 같은 웃음이 다시 그의 얼굴에 피어 오르며 그의 몸이 서서히 띄워졌다.

그는 빠른 속도로 마계의 중심을 향해 날았다.

그녀가 마족이라면 최대한 빨리 찾아, 그의 곁으로 불러 매어두고 싶다.

그녀가 천족이라 해도 좋았다.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녀와 만날 시간까지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할 듯싶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밤의 기운을 전부 쏟아내는 듯한 상야궁(常夜宮)이 자리잡고 있었다.

상야궁.

다섯 번의 백 년이 흐른 동짓달 보름마다 열리는 피의 축제인 전마제(戰魔際)에서 단 한차례의 싸움도지지 않은 자인 마왕의 거처.

그 피의 제전의 승자가 사는 곳이 그의 거처였다.

하지만 그가 발을 디딘 상야궁에는 피도 전쟁의 모습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야광주가 머리에 박힌, 키가 여덟 척 반 정도 되어 보이는 흰 색의 맥이었다.

그 옆에는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눈을 가진, 키가 여섯 척이나 되는 거대하고도 고혹(高惑)적인 숫사슴이 함께였다.

그 모습이 보통의 사슴과는 달리 요사스러웠다.

그런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거대한 사슴의 콧잔등을 쓸어주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슴, 미록(迷鹿)은 그의 마음을 읽고 기분 좋은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미록 옆에 있던 맥의 등에서, 방금 내린 눈보다도 눈보다 흰 털을 가진 늙은 여우가 일어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소전(蘇纏)님, 오셨습니까?”

“아 백모(白謨). 또 맥의 등에서 자고 있었나.”

“몸이 늙으니 느는 건 잠 밖에 없습니다. 제가 자고 있는 사이 맥이 걱정이 되어 이 늙은 몸을 제 등에 업어주었나 봅니다.”

“그런가?”

“미록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으신 듯 한데, 첫 해극궁의 연회가 즐거우셨나 봅니다.”

“아아.. 그렇지.”

“전마제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녀를 그리는 소전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사고는 치지 않았나?”

소전은 사슴을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백모에게 물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 미록은 여러 가지가 무수히 많은 색으로 변하는 큰 뿔이 떨어져라 좌우로 흔들어댔다.

“큰 일은 없었습니다. 맥의 화를 돋워 사랑을 조금 망가뜨린 것 밖에는 없습니다.”

백모를 한 차례 노려 본 미록은 소전의 도포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괜찮다. 네 무리를 돌보고 있어.”

그러자 미록은 가기 싫다는 듯, 다섯 가지의 소리를 길게 뽑았으나 소전의 얼굴이 단호하여 곧 단념하고는 도깨비 불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숲으로 몸을 숨겼다.

상야궁의 숲으로 미록이 제 무리를 통솔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소전은 맥의 맑은 눈을 들여다본 뒤 입꼬리를 올렸다.

“네 눈은 참으로 내 동무와 닮았구나.”

“동무가 생기신 겁니까?”

백모의 물음에 마왕인 소전은 고개만 끄덕 하고 맥의 머리를 살짝 손을 올리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소전의 손길이 싫은지 맥은 두 앞발로 제 머리를 비볐다.

백모는 아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허나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맥의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정말 다행이지 않느냐? 정말 다행이로구나.”

마계에 맥의 높은 울음 소리가 길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