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아침.

곽기정은 사다리를 들고 모과나무 앞에 선다. 사다리를 타고 올랐지만 사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모과들이 잘 구분이 가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곽기정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진하고 날것인 모과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곽기정은 가장 강한 향기가 나는 곳을 어림짐작하여 손을 뻗는다. 단단한 모과가 손에 잡히고 그는 그것을 힘껏 돌려 딴다.

그렇게 몇 개의 모과를 더 따고는 아래로 내려와 작은 채반에 담아둔다. 그리고 아궁이쪽으로 다가간다.

흙벽돌로 대강 만은 이 아궁이는, 곽기정이 매일 아침 주방으로 차를 끓이러 가기 귀찮아 만든 것이다. 다만 뜻밖에 편리하여 매일 사용하고 있다.

마른 장작 몇 개와 불쏘시개용 지푸라기를 아궁이에 함께 넣고 품속의 부싯돌로 불을 붙인다. 탄내와 연기가 좀 나는가 싶더니 이내 불이 확 피어오른다.

화광과 온기가 퍼지자 곽기정은 실제로도 느낌상으로도 주변이 좀 밝아진 느낌을 받았다.

곽기정은 불가에 앉아 잡곡을 말려 빻은 고운 가루를 모과에 골고루 뿌린다. 그리곤 삼베 천을 꺼내서 깨끗이 닦고 도마로 옮겨 묵직한 채도로 퍽퍽 소리가 나게 두드려 친다.

칼로 자르거나 한다기 보다는 도끼로 찍어 자국을 내는 느낌.

본래 모과차는 두 쪽 으로 갈라 씨를 발라내고 얇게 잘라내 꿀에 저며 끓인다.

지금 곽기정이 한 방법으로 끓이면 모과의 향이 훨씬 진하다. 문제는 각종 잡내가 섞이게 된다.

즉 전혀 좋은 차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 물론 곽기정은 석달 전부터 이렇게 모과차를 끓이다보니 이제 보통 모과차의 향기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 모과차는 다름 아닌 대호노사가 매일 아침 한잔씩 마신다.

 

곽기정은 호정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처지였다. 그러나 대호산장에서는 이와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호산장 안에서 도는 이런 저런 소문일 뿐. 곽기정 스스로는 대단한 직책에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곽기정이 매일 아침 모과차를 끓여 대호노사에게 가져다주지만, 곽기정은 대호노사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물론 이를 알지 못하는 다른 하인들은 곽기정을 대호노사의 측근이라 여겨 눈조차 마주치려고 하질 않았다. 심지어 대호노사에게 잘 보이고 싶다며 이런 저런 음식이나 돈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곽기정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해서 딱잘라 거절은 못하고 있지만, 우습게도 뇌물을 가져오는 부류는 대게 호정방에서 그를 괴롭히던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쓸 일도 없고 쓰지도 않을 돈이지만 모아는 두고 있는 상황.

 

곽기정이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에 어느새 해가 떠오른다.

곽기정은 아침공기를 깊게 마시며 잡생각을 치운다.

그리고 주전자를 가져다가 아궁이 위에 올리고 모과를 전부 주전자에 넣는다. 지난밤 담아둔 물에 모과가 빠지면서 퐁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장작을 딱 하나만 더 넣고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곽기정은 서서히 퍼지는 약간은 역한 모과향을 맡으며 품속에서 주먹밥 한덩이를 꺼낸다. 짭짤하게 간한 주먹밥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시간을 때울 참.

하지만 생각보다 허기가 져있는 상태였기에 주먹밥은 금방 곽기정의 뱃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주변공기는 싸늘하지만 아궁이의 불길은 따뜻하고, 뱃속 또한 든든한 상태.

열두살인 곽기정이 견디기엔 무리일 정도로 졸음이 밀려온다. 곽기정은 이내 꾸버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때 찬바람이 뺨을 살짝 스쳐지나간다.

누군가 급히 달려가기라도 한 듯 공기가 흩어졌다 모여든다. 평소라면 몰랐을 것이지만 곽기정에게 모과향의 변화는 아침잠을 깨는 종소리와도 같은 것.

곽기정은 의아함에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대호산장의 내원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자신의 거처를 지나가면 나오는 것은 대호노사의 수련장뿐이다.

곽기정은 아궁이를 곁눈질로 살피고는 자신도 모르게 수련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기에 조금 걷자 웅크려 있는 형체가 보인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듯 뒤쪽에 곽기정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다.

곽기정이 발걸음을 때려는 그 순간  음침한 안광이 찬바람처럼 퍼져나간다. 그 사람이 곽기정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동터오는 햇살과 연계되어 마치 짐승처럼 보인다.

그 사람의 정체는 곽기정도 알고 있는 사람으로 바로 호정방주였던 사람이다.

대호노사가 호정방을 쓸어버릴 때 호정방주 구유경만큼은 살려두었었다. 죽이는 대신 하인으로 삼은 것이다.

대호노사는 사실상 대호산장을 관리하지 않았고, 총관을 자처하는 이도 없었기에 구유경은 유야무야 대호산장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곽기정은 사실 구유경과 초면이 아니다.

예전에 호정방에 하인으로 들어갈 때 대면한 적이 있지만, 구유경의 입장으로 보면 곽기정은 그저 하인들 중 한명. 알아볼 리 만무하다.

구유경은 빠르게 곽기정의 얼굴을 살피고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곽기정이 궁금함에 묻자 구유경은 쏜살같이 달려와 곽기정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리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설원의 여우 같은 모습이다.

구유경은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그 예상이 틀어지자 곽기정을 순순히 풀어준다.

“여기가 수련장 입구 아니었나??”

구유경이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 몇 번의 잔기침과 함께 입을 땐다.

“대호노사의 수련장엔 지하 밀실이 있는데 이 시간에는 거기 계십니다.”

곽기정은 별 뜻 없이 말한 것이지만 구유경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였는지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돈다.

“오호라. 네가 바로 그 다동이구나.”

“전(前) 구방주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뭐야. 내 밑에 있던 녀석이냐?”

구유경의 태도는 친근함이라기보다는 하대에 가까웠다. 당연하기도 한 것이 그의 입장에서 얼마 전 까지는 모두가 그의 아래였으니 말이다.

더 이상 구유경과 말을 섞을 필요성을 못 느낀 곽기정은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구유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등을 돌리려는 곽기정의 어깨를 잡아챈다.

곽기정은 그 순간 여러 개의 송곳이 앞쪽 어깨를 후벼 파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곽기정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당혹감과 약간의 짜증이 섞이자 곽기정의 얼굴엔 오히려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구유경은 히죽 웃으며 뻗었던 손을 요란하게 거둔다. 곽기정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구유경의 그 손짓은 요호투심조(妖狐妬心爪)라는 무공이었다.

음험하기로 제법 이름 있는 사파의 무공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았다.”

구유경이 장난처럼 한마디 던진다.

곽기정은 섬뜩한 감각을 느낀 어깨를 잠깐 어루만지다가 대꾸한다.

“좋습니다. 대답할만한 거라면 대답해 드리죠.”

구유경은 주저 하지 않고 묻는다.

“그는 매일 아침 차를 일정한 시간에 마시냐?”

“…….”

“너는 예전에 호정방에 있었냐?”

“…….”

“그와 말을 해본 적이 있냐?”

“…….”

구유경은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세 질문을 연달아 하고, 곽기정은 하나같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군.”

오히려 대답을 한건 구유경쪽이었다.

자문자답을 끝낸 구유경은 재빨리 자리를 뜬다. 그런 구유경의 모습에 곽기정은 의아함을 감추고 구유경이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본다.

“나도 모르게 대답이라도 한 것일까.”

곽기정이 작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선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런데 보통의 바람이라기엔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흩날리는 나뭇잎. 작게 피어오르는 먼지 등의 방향을 볼 때 바람은 수련장쪽으로 불고 있었다.

정확히는 수련장 쪽에서 바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같았다. 그리고 바람이 멈춘다. 

공기는 애초에 고요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단단한 마위마냥 딱딱히 굳어진 것만 같았다.

조금 전 구유경의 요호투심조를 경험했을 때 느끼는 불쾌함에 가까운 섬뜩함이었다면, 이번 것은 산위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방금 마주한 것 같은 체념을 부르는 섬뜩함이었다.

[대앵!]

둔탁하게 낡은 종을 치는 듯 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종소리의 고저가 균일하고, 완만하여 좋은 종소리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소리가 하늘을 놀라게 하고 지축을 흔들 만큼 커다란 소리라는 것.

종소리와 함께 거대한 파장이 곽기정의 몸이 가랑잎처럼 나뒹군다.

곽기정이 가장 먼저 귓가가 멍해지면서 균형감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서있는지 누워있는지 움직이는지 멈춰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몸에 힘을 주어 손을 움직여봤지만 깊은 진흙탕 속에 빠져있기라도 한 듯 느릿하고 텁텁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뱃속에서 불쾌한 꿀렁임이 전해지더니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 토사물이 흘러나온다.

거기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정체모를 빛의 편린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린다. 곽기정이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온 대호노사였다.

하지만 대호노사의 정수리와 가슴팍. 그리고 배 쪽에서 작은 용이 튀어나와 한데 엉키며 대호노사의 안광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또한 보았으니…….

곽기정은 ‘헛것이겠지’ 하면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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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회에 토한 주인공. 다음회엔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