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의 : 이별하여 보내는 애틋한 마음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은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몸도 마음도 머리카락도 붉게 물들어버리니 저물어가는 하늘 사이에 녹아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감싸 안는 듯 부드러운 깃털이 느껴지자 연은 제 허망한 생각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무에 그리 실실 웃냐?」
“기분이 좋아서.”
「좋기는. 웃기고 있네.」
“너도 웃을 줄 알던가?”
연은 농을 하면서 부드러운 깃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뒷머리에 뾰족한 무언가가 콕콕 부딪혀왔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게냐?」
연은 정말로 오랜만에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까지 내며 즐겁게 웃었다.
「원... 도대체 네 생각을 모르겠다.」
“무어가?”
「어쩌자고 또 돕는 게냐?」
투박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연은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날이 선 검으로 베어낸 듯 날카로운 눈매 아래로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길다란 부리를 가졌다.
매끄러운 피부가 아닌 오색으로 빛나는 부드러운 깃털로 감싼 긴 목은 목소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게다가 연은 그런 자의 등 위에 얹혀져 허공을 날고 있었다.
허나 연의 눈에는 붉게 물든 하늘보다 자신을 태워준 자의 아름다운 자태만이 비쳤다.
“명아(明娥 : 연의 문금(文禽 : 공작))야. 인이는... 그 아이는 괴로울 거야.”
「그 배를 봐! 그건 그 아이의 죄야!」
본디 상계의 아이는 배 속에 있어도 어미의 뱃속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나와 스스로 좋은 자리를 찾아 길러지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여인이 배가 부르는 일이 없었다.
허나 인의 아이는 한참 동안 배가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바깥에 모습을 보인 바가 없었다.
분명 인의 안에 머무르고 있는 미약한 기운이 있었으나, 그는 인의 기운이 많이 약하나 연이 억지로 약을 먹여 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잡아둔 최소한의 빛의 기운이라고만 생각했다.
인과 그의 낭군처럼 기운의 차이가 극심함에도 이리 오래도록 그 명이 유지되는 경우는 유례가 없었기에,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있으리라 그 누구도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허나 아무 말 않고 아이를 가진 당사자들이 오해를 하건 착각을 하건, 약을 지어준 연은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했다.
헌데 어느 날부터인가 안의 기운이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커지며 배가 볼록해지기 시작했다.
인은 놀랍고도 당혹스러워 몇 번이나 연에게 물었지만, 연은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내가... 그런 거잖아.”
「너라고 그리 될 줄 알았냐! 겨우 기운을 가둬뒀더니 애가 될 줄 네가 어찌 알아!」
“과연 그럴까...? 내가 알고 있었다면... 내 죄인 건가?”
「...」
“죄 맞지?”
연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는 관두고 피식 콧소리를 냈다.
너무나도 빠르게 창공을 날고 있으나, 허망한 콧소리는 곡소리처럼 마음으로 들리고 머릿속으로 헤집어 놓았다.
허나 콧소리도 웃음소리도 연의 말에 담긴 혼돈의 깊이에 비하면 하찮게 느껴졌다.
연은 동생을 깊이 사랑했지만, 증오한다.
인은 언니를 깊이 존경하지만, 두려워한다.
이 자매는 세차게 흘러가는 강을 사이에 둔 날랜 범과 그의 병약한 새끼와 같았다.
목덜미만 물어도 죽어버릴 새끼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두고 와야만 하는 어미의 마음은 어떠한가.
혼란스럽다.
연은 끊임없이 웃고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것 때문에 마음이 삭아지고 문드러지고 흩어지고 있었다.
명아는 그를 알기에 잘못했다 야박하게 대할 수도 잘했다 함께 웃어줄 수도 없어, 이럴 때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영수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허나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함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말 저 말 고르느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알고... 있었던 게냐...?」
조심스럽게 물은 명아와 달리, 연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마음이었으나, 이번에는 증오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전례가 없으니, 아이가 안 생길 수도 있다. 그리 생각했지. 허나 그리도 끔찍하게도, 역시나 생겼더구나.”
「...」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의 태아며 모체(母體)니, 새 생명만큼이나 생기는 것보다 더욱 강하게 무언가를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은 없지. 헌데...”
연은 괴로운 듯 아미(蛾眉)를 찡그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괴로워했다.
오랜 세월, 그 가족보다도 오랜 세월을 함께한 한 마리의 벗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외면했다.
얼굴색이 노래졌다 파래졌다 수 천 수 만 가지의 색으로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불이라도 뿜을 듯 흉악한 모양새가 되기도 했지만, 잠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난 뒤에는 조금씩 말을 더듬으며 본래의 조금 서글픈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방법뿐이었어... 그 뿐이라 생각했어. 그리고 그 뿐이었어... 인... 그 아이가 살 방도는... 그 뿐이었어. 전에 없었으니, 혹여나... 뱃속의 아이가 형체를 갖추지만 않으면, 그렇기만 한다면... 분명, 계속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를 빌었어... 그 때만은 그 아이를 진정으로 걱정만 했어. 미워하지 않았어. 그러했는데, 그리 정성을 들였는데... 나는 결국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이는 꼴이 된 거 같아.”
「그 아이의 죽음에 너로 인함이 아니다.」
“너도 죄라 했잖아.”
「...」
“그래... 그 아이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하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게 우리 둘의 운명인 모양이야...”
「알고는 있었으나 의도는 아니라는 거잖아.」
명아의 말에 연은 너무도 서글프게 싱긋 웃음 지었다.
“그래... 우리와 같은 상계인에게 자식은 품을 수도 내칠 수도 없는 존재잖아.”
「네 부모는 그리도 곤욕을 치렀으면서도 자식을 또 낳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
맨 몸으로 태어나 제 몸으로 살아가는 하계인들에 비하면, 많은 것을 타고난 상계에 사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숨기고 아끼고 다듬기에 급급했다.
너무도 오랜 삶을 살기에 무엇 하나라도 붙들고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인가.
그들에게 삶을 지탱하는 것은 단명(短命)하는 자들이 꿈꾸는 명예도, 물질도, 권력, 타인과의 관계도 아닌, 오롯이 자신만이 가진 능력뿐이었다.
그들에게 능력은 살아가는 힘이고, 삶을 지탱해주는 동반자이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욕망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보다 많은 능력을 타고나는 자를 미워할 수밖에는 없었을 런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나는 자는 그 부모의 능력을 조금씩은 물려받게 되지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금씩일 뿐이지. 허나 나는 부모의 능력을 그대로 타고나 버린 걸.”
「자식을 가지는 것은 부모가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함께 품은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을 탓할 수는 없어. 그게 설혹 너 같은 상계의 모든 규칙을 뒤엎는 자라도 그는 네 잘못이 아냐!」
다수의 능력을 가진 자는 어리고 늙고, 약하고 강하고를 떠나 모두 배척되었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허니 어린 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상계에서의 연은 가월기와 녹청제(綠靑際 : 이백년에 한 번씩 최고의 무구를 다른 이들에게 선보이고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무구를 꼽는 천계의 축제)가 열리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천항궁 밖으로 한 발짝도 걸음할 수 없었다.
눈에 띠지 않게 밖으로 잘 나다니는 연이었으나, 절대로 궁을 떠난 뒤에는 천계 안에 조금도 머무르지 못하고 휘둘러 천계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건 네 어미의 잘못이다. 네 어미가 대지모신(大地母神 : 대지 위의 모든 생명에 관여하고 관장하는 여신)의 딸이라 능력을 숨길 수가 없어 그리된 게 아냐! 도를 넘어서는 네 어미의 능력 때문이라고!」
“대지모신의 능력을 어찌 숨기겠어. 헌데 그 덕에 소전을 만났는데, 소전을... 그 이를 나는... 그냥 버려둔 거야. 내가 죽게 내버려둔 거잖아...”
연의 가슴 속 깊이 묻힌 연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명아는 마주보고 있던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지금처럼 내가 조금만 어머니의 능력 쓰려고 노력했더라면, 혹여나 소전(蘇纏)도 살 수 있었을 지도... 혹 그럴지도 모르잖아. 결국은 인이도 살렸으니까. 그러니까... 그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그도...”
연이 이를 악물며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기괴한 신음소리를 참아내며 괴로워하자, 명아는 두고 보지 못하고 악다구니쳤다.
「어쨌든 너도 생긴다는 보장은 없었던 거잖아!」
“헉! 아... 그래. 그렇지.”
명아의 목소리에 연은 숨을 헐떡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그리 목소리가 밝지만은 못했다.
「그래, 네가 그때 능력을 썼다 치자. 그럼 네가 너 잡아먹으려고 이 가는 놈들한테 살아남을 수 있었겠냐! 네가 그 놈들은 그냥 다 죽이면 내가 말도 안 해! 너 그 놈들이 달려들었으면 그냥 때리면 때리는 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가만히 있었을 거 아냐!」
“그건...”
「그러니 입 시끄러.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마!」
험하게 소리쳤으나, 명아 만큼이나 연을 위하는 이도 없었다.
그를 알기에 연은 명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
「말만 미안하지. 쳇!」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미안.”
「그 놈은 새끼도 못 배는 수놈이잖아.」
더욱 깊게 파고드는 연의 무게에 명아는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자못 위세가 당당하게 앞만 보고 갈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