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도...
아니, 그때 흑도국에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생과 동생의 낭군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묶인 이상, 반드시 만났을 것이다.
그것은 상계에서 자신도 겪어보고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허나, 안타까운 것은 자신은 살았으나, 동생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매가 똑같이 사랑해서는 아니 될 자들을 품었으나, 그 끝은 이리도 달랐다.
연에게는 그것 또한 죄스러웠다.
어찌 자신만 살아남은 것인가.
사랑하는 사내를 죽이고, 사랑하는 동생을 내버리고, 어찌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인가.
매일을 후회하며 돌이켰다.
모든 죄를 자신이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이 받으리라.
허나 연이 아무리 강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남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끝끝내 동생이 죽어가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연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서글픈 울음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며 가까스로 돌아서고자 하는 자신의 몸을 막았다.
얼른 뒤돌아 달려가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마른 몸에 절망이 어디라고 끝도 없이 울음이 흘러나오는 것인가.
우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지쳐 제 다리로 설 힘조차 없어 남에게 기대야만 할 것이라.
우는 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겨워 크게 울지도 못하리라.
연은 입술을 꼭 문 채 또 다시 눈을 감았다.

다 잊고 싶다.
힘겹게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을 잊고 싶다.
마지막 말이라도 남기려고 부들부들 떨며 연 어머니의 피 흐르는 입술을 잊고 싶다.
아슬아슬하게 명을 잡고 있던 아버지의 제자들을 잊고 싶다.
반(半)쯤 죽여 놓을 때까지 몰아쳐도 저만은 행복하다고 외치던 동생의 낭군을 잊고 싶다.
이미 붉게 물들어버린 수련관을 보며 자책하던 수환의 부하들의 얼굴을 잊고 싶다.
그들은 결국 천왕을 지키지 못한 대죄를 지었다며 명계의 절벽에서 떨어져 생목숨을 끊어 버리기까지 했다.
모두를 다 죽인 제 낭군을 살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동생을 잊고 싶다.
그 중에서도 동생의 간절한 부탁에 대 죄인을 보내야 했던 나를 잊고 싶다.

매일을 이리도 절박하게 잊고 싶다고 가슴을 부여잡고,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연은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몸이었다.
잊을 수 있었다면 이미 다 잊으련만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영겁세월을 살아야 하면서도 찰나를 살아가는 하계인들보다도 잊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것이 긴 세월을 영유하는 자들의 숙명이었다.
무엇 하나 잊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무어라도 내어줄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연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오늘과 같이 동생이 오는 날에는 파리해져 가는 그 고운 얼굴만 보아도 당장에 흑도국으로 달려가 그 왕을 단칼에 죽여 버리고만 싶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미쳐버린 것 같다.
미쳤다.
뒤돌아 한참을 걸어 이제 뒷모습조차 보이지도 않으련만 여즉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동생을 생각하면 숨이 가빠졌다.
가슴 언저리가 커다란 납덩어리로 꽉 눌린 듯 답답해져 왔다.
그 무엇으로도 해방할 수 없는 마음의 짐이 온 몸을 짓눌러왔다.
검고 질퍽거리는 늪 속으로 쭈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연은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이 아이가 죽어도 나는 그를 죽이지 못하겠지.
이 아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아니까.
내가 사랑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