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락팔락, 사각사각, 톡톡. 반복되는 화음에서 규칙성을 찾자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사람이다. 자신의 몸집보다 큰 의자에 파묻혀 양쪽에 있는 종이 탑에서 종이를 꺼내 읽고 서명하고 다시 내려놓는 사람. 그 내려진 종이를 모아 다시 다른 종이 탑에 올리는 사람. 오로지 움직이는 건 눈동자와 손뿐인지라 살짝 무섭기까지 해 보이는 그 사람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다. 금색의 살짝 곱실거리는 긴 머리에 살짝 눈매가 올라간 파란색 눈, 오뚝한 코, 미녀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외모다. 귀에는 별장식의 귀걸이가 걸려있었고 손가락에도 반지만 4개가 있다. 드레스는 황금으로 지은 듯 반짝이고 있고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등이 별자리처럼 수놓아져 있다. 신발은 굽이 높은 하이힐로 드레스에 만만치 않게 보석들이 박혀있다. 팔락팔락, 사각사각, 톡톡. 팔락팔락, 사각사각, 톡톡. 팔락팔락, 끼이익. 반복되던 화음 속에서 처음으로 불협화음이 섞여 들어온다. 소리가 난 곳으로 여자가 돌아보자 하인차림의 한 남성이 서 있다.

"은하 공주님. 건강검진을 받을 시간이십니다."

"알았다."

여자는 간단히 대답한 뒤 종이를 책상위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곧바로 문으로 향한다. 또각또각. 끼이익, 탈칵. 그리고는 아무소리도 나지 않게 됐다.

은하 공주가 걸어서 도착한곳은 진찰실이었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안절부절 못하고 서서 돌아다니고 있다. 하얀 머리에 하얀 가운. 하얀 신발에 하얀 장갑. 유채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인이다. 은하 공주가 들어오자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음에 의자 하나를 내준다. 고민하는 듯 입을 열듯 말듯 자꾸 달싹거린다. 작게 한숨을 내쉰 뒤에 드디어 입을 연다.

"공주님. 오늘은 제가 진찰하게 됐습니다. 공주님 주치의가 지금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알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궁중의 여성은 여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 공주를 봐 줄 수 있는 유일한 여 의사는 지금 출장을 가 있다. 그 덕에 궁궐에서 가장 높은 의사인 어의가 급히 투입됐다. 문제는 어의도 남자라는 것이다.

"공주님. 그게… 진찰을 미뤄도 되겠습니까? 저는 공주님에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제대로 된 진찰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주치의가 돌아오면 그때 연락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문책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의는 안도한 표정을 지은 다. 공주가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늦추거나 받지 않는다면 문책이 오는 것은 주치의와 어의다. 궁중의 모든 의사의 최종 책임자인 어의는 궁중에서 발생하는 모든 의료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공주가 만약 이번 일을 제대로 문책하기로 했다면 어의는 목이 달아났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내심 건강검진기간에 출장을 나간 공주의 주치의에게 원망의 마음이 든다. 어의가 슬슬 일어날까 하는데 순간 강한 빛이 뒤쪽에서 비친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네?"

은하 공주는 전혀 놀란 반응이 아니다. 아니, 전혀 반응이 없다. 분명 그렇게 강한 빛을 정면으로 받았는데 은하 공주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이 눈에 저 정도의 빛이 비친다면 눈이 아프다면서 눈을 가려야 했다. 어의는 얼굴이 굳는다. 이것은 분명한 이상신호다. 정상인이라면, 분명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공주님. 죄송하지만 조금 더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은하 공주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그저 어의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의는 방 한편에 마련된 책상에 가더니 위에 종이에 몇 글자 끄적인다음에 진찰용 도구 여러 가지를 가지고 온다. 그중에는 촛불에서 나오는 빛을 집광시키는 것도 있다. 어의는 물품을 들고 공주에게 다가간 다음 촛불 빛을 집광시켜서 공주의 눈에 잠깐 비춘다. 그러나 공주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어의는 한결 더 얼굴이 찌푸려지면서 공주의 눈에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어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적으면서 말한다.

"공주님. 의사의 권한으로 말하겠습니다. 잠시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바쁩니다만."

"이런 말하긴 송구스럽습니다만… 공주님의 눈은 지금 상태가 위험합니다. 이미 시력 저하는 일어나고 있고, 자칫 내버려 두었다가는 실명까지 올 수 있습니다."

은하 공주는 어의가 뒤돌아 있기에 표정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어의의 말에서 이미 충분한 진실성을 느꼈다. 공주는 한숨을 살짝 내쉰 뒤에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래도, 휴양을 다녀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보고서와 함께 폐하께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주님은 잠시 방에 들어가 한숨 푹 주무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은하 공주는 보고서를 작성중인 어의를 내버려두고 문밖으로 나갔다. 눈을 비벼보기도, 깜빡이기도 해봤지만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짓고 나서는 공주의 방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