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는 스프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군살 없는 얼굴과 다부진 체격은 긴 시간 스스로를 단련해온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몇 점을 입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잠시 후 막사의 입구를 젖히며 얼굴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가 있는 진한 녹색 머리를 가진 사내가 들어왔다. 검은 머리의 사내가 엄지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핥았다. 

 “왜?”

  “카로스 사령관이 찾아왔습니다.”

  “뭐? 뭐야. 웬 일? 어디 있는데?”

  “지금 막사 앞에······.”

  “지금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검은 머리의 사내는 막사의 문을 발로 차며 들어온 오랜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짜증이 가득한 카로스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카로스의 매서운 주먹이 사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가 급작스러운 공격에 불평을 토로하기도 전에 카로스가 말을 이었다. 

  “정신 넋 빠진 놈아. 이런 사항을 왜 너 혼자 결정해? 미쳤냐?”

  “야, 일단 무슨 일인지······.”

  “설명? 오호라,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건 네가 나한테 해줘야 하는 거겠지. 대체 뭔 생각으로 뒤가 구린 ‘불멸자’의 의뢰를 맡은 거냐? 어?”

  사내는 맞은 부위를 만지작거릴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카로스는 얼굴을 구겼다. 험악하게 변한 얼굴을 하고 사내를 윽박지르려던 카로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대뜸 탁자 위의 고기를 집어먹었다. 

  “인마, 그거 내 거······.”

  점심을 강탈당한 사내가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카로스의 싸늘한 시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내는 주눅 든 채 입을 다물었다. 카로스가 말을 이었다.

  “얼마 받았냐?”

  “응?”

  “오, 윈터펠. 내 친구야. 계속 그렇게 못 알아듣는 척 했다간 다신 그런 짓 못하게 귓구멍을 뚫어주마.” 

  카로스의 살벌한 표정과 어투에 윈터펠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와는 오래된 친구였지만 돈에 관련된 건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받았냐고. 푼돈 받고 위험하다고 소문난 불멸자가 준 일을 받은 건 아닐 거 아니야? 얼마야.”

  윈터펠은 빛이 바랜 종이 같은 은회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카로스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카로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윈터펠은 꼼짝없이 진실을 토해내야만 하는 현 상황에 넌더리가 났다. 두 남자는 서로를 알고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윈터펠이 혀를 찼다. 

  “좀······, 많이.”

  “구체적인 수치를 대입해.”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윈터펠을 카로스가 쏘아보았다. 

  “말해도 안 믿을 건데.”

  “아, 더 이상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황금 1톤 쯤?”

  “이게 어디서 구라를······. 빨리 말 안 해?”

  “진짜야! 순금으로 1톤 정도 받았어!”

  “지랄. 왕국이라도 같이 엎어달라고 하던?”

  카로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가소롭다는 뜻이 다분한 행동에 윈터펠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카로스는 믿어달라는 윈터펠의 몸짓을 눈을 가늘게 뜬 채 노려보았다. 그는 허리춤의 걸쇠에 걸어두었던 칼을 빼 탁자 위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카로스는 윈터펠이 앉아 있던 의자에 몸을 맡겼다. 카로스가 한숨을 내쉬며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돈은 충분히 받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마.”

  “미친놈아! 진짜라니까? 보여줄게!”

  “지랄 똥 싸는 소리 말고. 나중에 분배나 잘해. 저번처럼 빼돌리다 걸려서 륜한테 다 뺏기지 말고.”

  “이 새끼가 안 믿네? 너 진짜라면 어쩔래? 내기할래?”

  “어휴, 이 화상아. 너랑 나랑 벌써 스물일곱이야. 우리 내일모레 서른이라고, 이 등신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쯧쯧. 아, 됐어. 말하지 마. 불멸자 건은 이대로 묻어둘 테니까. 소문이 좀 이상하게 난 놈이긴 해도 일단 돈 주는 의뢰인이잖아. 넘어가. 입 열지 마라. 오늘은 네 병력 좀 빌리러 온 거야. 2개 대대 내놔.”

  윈터펠은 말을 들으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카로스를 향해 최대한 당황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나 카로스는 윈터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으로서 답을 대신했다. 윈터펠이 이를 갈았다. 한참을 눈싸움으로 실랑이를 벌이던 윈터펠은 이대로 각자 원하는 것만 내세우다가는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윈터펠이 말했다.

  “천 명? 뭐하는데 천 명이나 필요해?”

  “응? 아, 울돌레이를 뚫어야 하는데 성이 하도 크고 단단해서 우리 애들만으로는 좀 힘들어. 그런다고 다른 놈들한테 선수를 뺐기면 금전적인 손해가 장난이 아니야. 자담 후계자가 먼저 뚫고 깃발 세우면 3천만 루블 준다고 하더라고. 영주 생포하면 그 두 배고.”
  “흐음. 근데 왜 루블이야? 제국 화폐로 달라고 해. 어디서 왕국 화폐로 퉁 치려고 그래?”

  “루블이 노이에스 화폐라 타 제국도 인정한다. 걱정마라.”

  윈터펠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리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카로스는 알았으면 됐다는 의미의 몸짓을 해보였다. 입을 벌리고 있던 윈터펠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2천 명으로 되겠냐? 울돌레이는 엄청 크잖아? 내가 알기로 그쪽 병사만 해도 수만 명이라던데.”

  “우리만 참가하는 게 아니잖아. 이 멍청아. 2천 명 주면서 거기 뚫으라고 하면, 난 그거 시킨 놈 머리통부터 뚫어버릴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허. 그럼 륜 데리고 가. 성 공략하는데 마법사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바쁘단다. 마력의 결정인가 마나의 결정인가 하는 것들이 가득한 광산에서 막노동 중이라고 하시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쪽에 마법사 많아서 상관없어. 근데 뭐냐, 네가 내 일에 관심도 가지고? 도와주게?”

  “밑에 애들만 보내놓고 손가락 빨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네 일 끝나야 불멸자 일을 시작하던지 할 거 아니냐.”

  “나까지 필요하다고? 규모가 좀 큰가보네······. 그러던가. 나야 좋지. 아, 대신 이번 건수에서 네 몫은 없다. 애들 건 있어도.”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구라의 대가다.”

  “아니, 구라 아니라니까 그러네?”

  카로스가 윈터펠을 무시한 채 칼을 들고 일어섰다. 윈터펠은 카로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윈터펠을 뒤에 남겨둔 채 카로스는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막사를 나갔다. 못다 한 점심식사가 미처 아쉬웠던 윈터펠은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카로스를 쫓았다. 나란히 걷던 카로스는 윈터펠이 무장하고 있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 칼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씹어 먹던 윈터펠은 카로스의 말에 자신의 허리춤을 살폈다. 그러고는 카로스를 보며 씩 웃었다. 

  “몰라. 어디 있겠지. 이봐, 펙서스! 올 때 내 칼 챙겨라!”

  “지랄이 풍년이다. 풍년이야.”

  카로스가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