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직장은 구했고?"
"직장이랄게 있나요. 졸업 같은 거 안 해도 다 갈 수 있는 곳이죠, 뭐."


패러데이 놈이 스스로를 비하한다. 선생이라는 자의 눈썹이 약간 씰룩인다. 비아냥의 의미는 아니다.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신이 다닐 일터를 비하하는 녀석에게 한마디 가볍게 꾸짖고 용기를 북돋워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해 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시선이다. 그래, 그럴 땐 차라리 닥치고 있는 게 맞는 거다. 


"그래, 어디서 무엇을 하든.. 너 자신에게 떳떳해라. 그렇게만 하면 넌 분명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다."


빌어먹을, 닥치지 않았군. 그것도 정말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서 전하는 말. 그리고 그 말을 듣는 패러데이의 표정은.. 그냥 무표정이다. 그리고 놈은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등 돌려 제 갈 길을 간다. 다만, 선생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표정이 변했다. 아주 싸늘한 눈빛이다. 그리고 빌어먹을 하얀 빛이 다시 날 덮친다. 동굴로 돌아가는 건가?


"야 임마, 패러데이! 그거 끌고 오는 데 무슨 10분이나 걸려? 하.. 새끼, 진짜 답답하네! 느려터져 가지곤.."
"죄송합니다!"
"쟤한테 시키지 말라니까요, 주임님.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왜 시키신대?"


아니었다. 그저 장면이 전환된 것일 뿐. 허름한 옷 위에 파란색 조끼를 입은 남자, 패러데이는 유압자키를 팔레트에 꽂은 후 끙끙 끌어오고 있다. 놈은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파란색 조끼는 직원들이 입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웬만하면 전부 자동화가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자동기계가 이동하기 어려운 곳은 여전히 사람들이 직접 끌어와야 하나 보다. 물류 바코드를 검수하는 곳에도 사람들이 일부 배치되어 있다. 보아하니 운송장 바코드를 기계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사람이 직접 확인하도록 배치한 것 같다. 그나저나, 패러데이 놈이 일하는 걸 보니 확실히 어리버리하다. 보는 내가 답답할 정도로. 남들은 척 보면 확인하는 걸 운송장 하나를 손에 쥐고 거의 1분 가까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한다. 그런데 그것도 참 웃기는 게,


"야, 패러데이! 넌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도 제대로 확인도 못 하냐! 이 봉투에 적힌 바코드랑 운송장 바코드랑 다르잖아! 혹시 몰라서 확인했는데 역시나야, 아주. 눈깔에 겨자 소스라도 들이부었냐? 아오 진짜, 이 병신.."
"죄, 죄송합니다."
"할 줄 아는 말이 죄송합니다 밖에 없지? 대갈빡엔 똥만 들어차 갖곤, 쯧쯧. 후우, 진짜 저, 저 얼굴만 보면 주먹이 올라가, 내가. 한 대 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이 신통해!"


이 모양이다. 그러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녀석은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휴대 전화로 뭔가 열심히 보고 있다. 일하는 내내 우울해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놈의 표정이 그나마 좀 펴진 것 같다. 뭘 보고 있길래? 난 녀석에게 다가갔다. 날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난 놈 휴대 전화의 화면을 보았다..


===


"당신 누구야? 프로스트는 어디 갔지?"


리스는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프로스트는 수정 구슬에 손을 대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눈앞의 남자가 나타났다. 허름한 옷차림 위에 파란색 조끼를 입은 그 남자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구슬을 둘러싸고 싸우던 괴물들이 갑자기 피칠갑을 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가 누구냐고?"


얼굴로 보나 체형으로 보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는 남자였다. 괴물들의 피로 얼룩진 얼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남자는 점점 리스에게 다가왔다. 리스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가오지 마! 더 가까이 오면..."
"물어보길래 답해 주려고 다가간 건데.. 그럼 그냥 여기서 말할까?"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글쎄, 내 이름을 알면 참 실망할 거야. 아니, 그냥 이 모습만 봐도 누구나 실망하겠구나. 미안해. 그렇다고 해서 모습을 감추고 말하긴 싫었어."


남자는 영 씁쓸한 모양인지 어색하게 웃었다. 피로 얼룩진 섬뜩한 눈이 한편으론 리스에게 왠지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를 바라보다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리고 짚이는 이름을 말했다.


"혹시.. 패러데이? 당신이?"


리스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놀란 듯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다시 내려온다. 


"알고 있었네?"
"..프로스트가 말해 준 적 있어. 수정 구슬에 손을 댄 순간 당신이 나타나 공격을 했다고. 하지만, 분명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걸 들으면서 내가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어?"


패러데이가 되물었다. 리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들었던 패러데이의 목소리는.. 음색 자체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린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어린아이의 전언이 귀로 들어왔다면 그 로봇이란 걸 찾기 위해 이 동굴까지 들어왔겠는가. 적어도 신의 계시 버금가는 음성이라 생각하고 절박하게 들어온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절체절명의 위기라지만 꼬맹이가 들어오라고 말했다면 정말 들어왔겠는가. 패러데이의 되물음은 결국 리스 자신이 스스로 되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뭐 예전엔 아이의 모습으로 프로스트에게 나타났지. 그리고 프로스트는 그 어린아이와 싸움박질을.."
"그건 당신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해서.."
"아니, 싸움이야. 공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싸움이라는 것도 꼭 누가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고 일어나는 건 아냐.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리스는 당최 패러데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 아무리 들어도 중언부언의 헛소리다. 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해도 못 할 헛소리에 매달릴 필요도 시간도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 수정 구슬을 찾길 정말 잘한 것 같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들리거든? 그런 점에선 프로스트랑 똑같군."
"뭐?"
"정말 당신이 수정 구슬을 찾았다고 생각해?"
    

리스의 동공이 멈췄다.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그 꼬마가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 수정 구슬들이 오히려 당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 아냐?'
'수상해. 마치 유인하는 것 같아.. 당신은 그 꼬마가 누군지는 알아? 이름이라도..'


다름 아닌 자신이 했던 말들이. 그러자 패러데이가 리스의 기억을 흩트려 놓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됐어, 지금 프로스트가 갇혀 있을 때 전해야 할 말이 있어. 난, 당신이 로봇을 차지하는 거, 대찬성이야. 제어권을 갖도록 적극 도와주고 싶어."
"저, 정말?"


리스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놀랐다.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분명 기쁜 일이다. 자신을 동굴로 부른 사람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한다니. 일이 너무 쉽게, 그것도 잘 풀리는 것도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조건이 있어."
"뭐지?"
"제어권은 어떤 특정한 기기를 작동시켜야 얻을 수 있어. 당신이 가진 아주 간절한, 강한 감정이라면 그 권한을 획득하고도 남을 거야."
"강한 감정.."


강한 감정. 그것도 프로스트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그게 조건이야?"
"아니, 그건 그 기기가 요구하는 조건이고. 내가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 준다고 약속한다면 당신을 돕겠어."
"그게 뭔데?"
"프로스트가 그 기기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


상당히 뜬금없는 요구였다. 이 패러데이라는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다른 이에게는 분명 그렇지 않다. 하지만 프로스트에게는 유달리 적대적이다.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건 전혀 걱정 없어. 애초에 프로스트는 제어권을 차지할 생각이 없거든. 분명 로봇들을 내가 사는 세상으로 보내고 자신은 입구만 파괴하겠다고.."
"아니, 그럴 놈이 아냐. 절대 믿어선 안 돼. 그 정도로는 안 돼.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해."


리스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프로스트를 향한 이 이유 모를 적의가 궁금했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궁금해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프로스트를 죽여."


패러데이는 단호했다. 


"뭐?"
"그게 내 조건이야."


리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절대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럴 순 없어."
"그럼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어질걸? 당장 이 괴물들만 해도 당신이 어떻게 해 볼 만큼 만만한.."
"프로스트는 자신의 임무조차 차순위로 미뤄두고 우릴 도와주고 있어! 그런 그를 죽이라고?"


리스의 말을 듣자 갑자기 패러데이는 방정맞을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정말 거슬리는 웃음소리였다. 대체 어느 부분이 웃기길래 저렇게 웃어대는 걸까.


"임무? 그런 건 애.."
"닥쳐! 아무리 당신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그래서 로봇을 차지하는 게 쉬워진다고 해도 그 조건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물에 빠진 거 구해 준 사람 보따리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으라고!"


패러데이는 잔웃음을 치며 화를 내는 리스를 외면하다가 후...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리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알았다. 뭔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그렇다면 내가 따로 어떻게든 막아야겠군. 한 가지 충고할게. 로봇은 지금 공황상태야."


상당히 담담한 말투였지만, 패러데이의 얼굴엔 그늘이 잔뜩 끼어 있었다. 잠시 씨근덕대던 리스도 그 모습에 흥분을 멈추려고 애썼다. 


"제어권이 내장된 그 기기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만든 거야. 오류가 생긴다고. 일일이 설명할 순 없고, 어쨌든 지금, 두 개의 명령이 혼재하고 있어. 너희들을 공격하다가 멈춘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 경우가.."
 "지금의 내 모습조차 그 오류로 인한 결과물 중 하나야. 프로스트를 탓할 수도 없지. 전부 내 어리석음 때문에 생긴 일.. 그래. 내 어리석음 때문에 더 많은 피를 보기 전에 막아야 해. 반드시 푸른색 구슬을 먼저 찾.."


또 다시 리스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이어나갈 때, 바로 그 순간, 패러데이의 입에서 말 대신 다른 게 튀어나왔다. 피였다. 아주 시뻘건 피였다. 


"패, 패러데이!"


피가 튀어나오면서 하얀빛이 패더레이를 감쌌다. 리스는 반사적으로 그 빛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그렇게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하얀빛이 다시 걷혔다. 


"잡았다, 이 옘병할 놈!"


빛이 걷혔다. 빛이 걷힌 곳엔 컴뱃 나이프로 패러데이의 목을 그어버린 프로스트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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