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까 그 모습은 솔직히 좀 섬뜩했어."


리스가 무언가 말하려고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다가 역시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날 보고 한마디 한다. 퀸즐과 아일란트에게 했던 짓 말인가. 후우.. 리스가 보기엔 내 행동이 무척 감정적으로 보였겠지. 아무리 설명해도 민간군사기업이니 뭐니 하는 것 전부 리스에겐 뜬구름 같은 소리일 것이다. 나로서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다.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가장 이성적인 대처였다는 말.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더 할 말 없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프로스트, 당신 말야. 잠깐 다른 사람 같았던.."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그녀의 말을 자르고 이번엔 내가 궁금해한 것을 물어보았다. 리스는 분명 그 괴물 마법사의 공격이 있기 전에 미리 눈치를 챘다. 그래서 내가 그 무서운 불덩이를 피할 수 있었고. 이 어두침침한 곳에서도 그렇게 멀리까지 보이는가 궁금했다.


"나도 거기까지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마력의 흐름 같은 걸 느꼈어. 마력이란 게 사실 이런 공기 중에서 떠도는 것이기 때문에 제어하려면 인공적인 흐름을 만들 수밖에 없거든."


그런 것도 가능한가? 


"특히 녀석의 능력이 나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에 다루는 마력의 양도 훨씬 커서 느끼기 쉬웠어."


그런 마력의 흐름을 감추는 것도 가능할까? 만약 그런 거라면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는데.. 하지만 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지 않으면 마법 자체를 쓸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건 다행이로군. 하지만, 역으로는 녀석들도 리스가 마법을 쓰려고 할 때 미리 눈치챌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무엇이든 간에 일장일단이 있구만. 


"그런데, 대체 구슬은 언제쯤 나오려나? 이렇게 무작정 걷기만 해서야.."


리스가 약간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확실히 나도 불안하긴 하다. 물론 나야 이대로 입구까지 걸어간 다음에 입구를 부숴버리면 그만이지만.. 엄연히 약속을 하지 않았는가. 


"생명 반응 감지."


제길, 그리고 그냥 걸어가서 도착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앞에 누군가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게 누군지 알 도리가 없다. 뭔가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이 구슬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보호해야 한다!"
"천만에! 이 구슬이야말로 재앙의 근원이다. 파괴해야 해! 구슬의 목소리가 말하는 '사악한 괴물'은 바로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웃기지 마라! 괴상한 무기들을 사용하는 놈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굵직하고 바닥을 벅벅 긁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괴물들인데.. 배터리도 세 명분이나 챙겨서 넉넉하겠다, 은폐장을 한번 더 가동하기로 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좀 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리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수정 구슬이야."


괴물 열댓 놈이 벽을 등지고 수정 구슬을 감싸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비슷한 수의 괴물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씨근덕대고 있었다. 워낙 열을 올리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어서 기척으로도 우리를 느끼지 못했다.


"분명 노예들의 함정이다! 패러데이란 놈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함정이다!"
"괴상한 무기를 쓰는 놈들은 그놈들처럼 나약하지 않다! 놈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라도 로봇 군단을 차지해야 한다!" 
"로봇은 이미 놈들이 차지했다! 로봇에 의해 진격이 차단되지 않았는가!"


리스가 씨익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괴상한 무기를 쓰는 놈들이라면.. 당신네 말하는 거 아냐?"


그렇겠지. 그 마법사 괴물도 내 레이저나 수류탄을 보고 굉장히 흥미로워했으니까. 하지만 난 놈들의 말다툼이 더욱 흥미로웠다. 무식하게 싸움박질하는 모습만 보여 줬던 놈들답지 않은, 제법 논리적인 의견이 오가는 말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싸움에도 신경을 꺼야 했다. 나와 리스가 더욱 주목해야 할 수정 구슬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이참에 둘 다 확 쓸어버리면 되겠네."


리스가 나를 채근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 놈들이 육중한 방망이 하며 양손 망치를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놈들은 단순히 말다툼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구실만 있으면 저 방망이와 망치를 휘두르겠지. 난 도화선에 살짝 불만 붙여 주면 된다.


"지들끼리 싸우게 한다면, 헷, 재미있겠는데? 그럼 말 그대로 그 불은 내가 붙일게." 


구슬을 부수려는 놈들을 공격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살짝 불만 붙이는 수준이라 하더라도, 지키려는 놈들이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우리가 구슬을 빼내기 쉬울 테니까.


"오케이.. 보자, 불덩이를 크게 만들면 마력 흐름을 들키기 쉬우니까.."


리스는 손가락 끝에 작은 불꽃을 띄우더니 수정 구슬을 부수려는 무리 쪽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놈의 눈알 쪽에 가볍게 흘려보냈다. 불꽃 크기만큼이나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휘말린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구 몸부림친다. 눈알에 직격당한 놈은 그대로 나자빠졌다. 안 그래도 팽팽하던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지면서 금세 야단법석이 벌어진다.


"뭐야!"
"이놈들이 기어코 공격을!"
"잠깐! 우리 중엔 화염 마법 쓸 줄 아는 녀석 없.."
"아가리 닥쳐라!"


단순무식한 놈들이다. 그 단순무식한 놈들이 불꽃에 뜨겁게 데었는데 오죽할까. 놈들이 들고 있던 양손 망치 하나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날아든 망치가 구슬을 지키려는 무리 중 가장 앞장 서 있던 놈의 머리에 꽂힌다. 퍽석! 호박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놈이 쓰러졌다. 이제 그나마 유지되던, 놈들답지 않던 이성적인 대화는 없다. 놈들다운 본능적인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죽여라! 구슬을 부숴라!"
"구슬에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죽여도 상관없다!"


살점이 찢어지고 피가 튀기며 뼈가 드러나는 싸움이 적나라하게 벌어진다. 나 같은 인간은 아무리 때려봐야 소용없는데 그래도 비슷한 체구의 놈들끼리 싸우니 볼만한 싸움이 벌어지는구만.     


"잠깐, 마력 흐름이야!"


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슬을 지키는 괴물 중 한 놈이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 뻗은 손에서 푸른 번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 푸른 번개가 구슬을 부수려는 놈들을 덮쳐 새까맣게 굽기 시작했다. 이런 옘병, 저런 놈도 있었다니!


"제길,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우리가 구슬을 빼앗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겠어. 빨리 움직이자, 프로스트!"


동감. 최대한 속보로 구슬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슬을 지키던 놈 중 하나가 등을 돌려 구슬로 다가온다. 제길, 이길 것 같으니 이제 구슬을 챙기겠다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구슬을 들고 뛰어야겠다. 어차피 내 손에 닿으면 구슬도 은폐장 영역에 들어오니까 놈들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수상쩍게 여기겠지만 보이지 않으니 쫓을 수도 없지. 우린 그냥 죽어라 뛰기만 하면 돼!


"..참 아이러니하죠? 먼저 창조했던 병기를 막기 위해서 새롭게 만든 무기라니. 하지만, 이번엔 아무런 위험이 없습니다.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합니다! 로봇 군단! 아, 꼭 기억하세요! 제어 권한 장치는 푸른색입니다! 우리들의 수호자, 로봇 군단!"


이 빌어먹을 구슬이 하필 이럴 때 수다를 떨고 지랄이야! 이러면 은폐장으로 감싸도 소리 때문에 위치를 들키는데.. 하지만 이제 지체할 틈이 없다. 구슬도 항상 떠들고 있지는 않을 테니 그때까지 도망치면 그만이다. 리스도 내 의도를 짐작하고 각오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구슬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내 시야가 다시 하얀빛으로 뒤덮였다. 


===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 리스도 없고, 괴물들도.. 잠깐, 아무도 없지는 않다. 아니, 아무도 없는 정도가 아니다. 굉장히 소란스러운 소리. 사람들이 한 수백? 수천 명 정도되는 듯하다. 확실하진 않다. 하얀빛 사이로 서서히 주변의 윤곽이 잡힌다. 근데, 이 장소.. 어디선가..


"졸업 축하한다, 패러데이."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이제 막 청년티가 나는 남자를 보고 여러 덕담을 하는 듯하다. 선생은 분명 그를 '패러데이'라고 불렀다. 패러데이라.. 빈말로라도 잘생겼다곤 못 하겠군.


"어머님이 이 모습 봤더라면 참 좋을 텐데.. 분명 기뻐하고 계실 거다."
"예,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식 풍경이다. 전에 보았던 '꼬마' 패러데이가 지금 고교 졸업을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