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은 본 적 없어. 목소리.. 글쎄. 목소리라고 하기도 뭐해. 내 의식에 그 사람, 패러데이의 말이 전달된 거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내 동포들 모두에게. 먼저 자신을 패러데이라고 밝혔지."


놈다운 방법이다. 내게도 환각처럼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리스에게도 그 비슷한 방법으로 말을 전달할 수 있겠지. 


"사실 패러데이가 괴물들에게 로봇의 존재를 직접 알려 준 건 아냐. 우리한테만 이 동굴 어디엔가 로봇이 있다고 했어. 절대 괴물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원체 괴물들이 우릴 이곳저곳 떨어뜨리면서 지배했으니까. 그중에서 그저 살기 위해서 로봇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어. 아무 계획도 없이. 당연히 괴물들에게 들켰지. 그때부터 괴물들이 우리들을 끌고 로봇을 찾기 시작했어."


알 수 없군. 만약 노예 상태의 인간들이 먼저 로봇을 차지해버리면 괴물들로선 오히려 피해가 막심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인간들을 로봇 발굴에 동원했을까?


"왜 동굴 반대편이 당신네 세상과 맞닿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그렇게 당신들과 괴물들이 마주친 거고 전투가 벌어진 거겠지. 아마 괴물들은 당신들이 로봇을 노린다고 판단한 것 같아. 그래서 박살 내려는 거고."


우습게 됐군. 이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로봇의 로자도 듣지 못했는데. 어쨌거나 이 전쟁은 꽤 오래갈 것 같다. 레버티쪽에서도 사력을 다해 막으려 할 테니까. 하필 이럴 때 통신이 안 되고 있다니, 빌어먹을.. 자꾸 알 수 없는 통신만 잡음 섞인 채 간간히 들어오고.. 잠깐, 알 수 없는 통신?


"왜 그래, 프로스트?"


아뿔싸! 아뿔싸, 아뿔싸, 아뿔싸! 내가 정신이 나갔지, 왜 그걸 놓쳤을까? 다른 방향으로 침투한 내 동료들이라면 내가 호출명을 알고 있으니 바로 연락이 안 된다고 해도 누군지 알았겠지만... 그 잡음 섞인 통신에서 들려온 알 수 없는 호출명들.. 뭐, 뭐였지? 고퍼스하고, 퀸즐하고, 아일.. 뭐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야단났다. 이 동굴에.. 군(軍)이 아닌 다른 집단에서 보낸 놈들이 있다! 아마 놈들의 그 통신은 잠깐 혼선이 된 걸 테고, 호출명을 사용하는 걸 보면 적어도 민간군사기업에서 보낸 놈들일 것이다. 분명 정부에서 민간의 출입을 엄금했는데, 이 자식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 좀 해 봐!"


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도 당황스러울 뿐이다.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방법을!


===


"아일란트! 살아 있었구나!"


어두침침한 동굴 속에서 아일란트는 자신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퀸즐이었다. 퀸즐은 무전기로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두 사람, 고퍼스와 아일란트 중 한 명이라도 찾아서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고퍼스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인가?"


아일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통신을 시도하는데도 계속 침묵 상태라면 지금쯤 이미.. 하지만 아일란트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살아 있을 것이다. 아무렴, 살아 있고 말고! 고퍼스는 아틀란티스 컴퍼니 소속 최고 정예 병사 아닌가.


"통신을 계속 시도해 보자구. 내가 앞장설 테니, 후방을 부탁해."


그녀가 앞장서서 길을 걷기 시작했고, 아일란트는 뒤쪽을 주시하며 천천히 퀸즐의 뒤를 따랐다. 


"제길,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꼬인 건지..  


퀸즐이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아일란트도 한탄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군부대보다 먼저 동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괴물들의 맹렬한 공격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찌어찌 퀸즐과 아일란트는 잡음 잔뜩 낀 음성이나마 통신이 되어 위치를 파악하고 서로 만날 수 있었지만.. 고퍼스는 아직도 행방불명이었다.


"'로봇'에 대한 정보도 가장 먼저 찾은 녀석이 하필 이렇게 사라지다니.. 어쨌건, 통신은 계속 시도해 보라구, 아일란트."


굳이 퀸즐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일란트는 계속해서 무전을 날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고퍼스에게서는 아무런 답변도 오지 않는 중이었다. 고퍼스의 신호를 따라서 오긴 했는데 왜 정작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까? 몸을 뜰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고퍼스도 합류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나저나, 아일란트. 혹시 봤어? 그 구조물들, 그리고 시체들."


퀸즐의 물음에 아일란트도 자신이 지나친 길을 떠올렸다. 이 동굴과 괴물들하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공적인 구조물들. 마치 고대 문명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훌륭한 건축 양식이었다. 그리고 그 훌륭한 구조물 근처에 즐비하게 널려 있던 괴물들의 시체들. 한차례 폭풍이 쓸어버리고 지나간 듯했다. 혹시 고퍼스가 한 걸까? 퀸즐이 고개를 저었다.


"고퍼스라면 그런 무모한 짓 따위 안 해. 다른 누군가가 한 짓이겠지. 하지만 파괴된 구조물들을 보면 폭파 장비를 이용한 게 틀림없어. 즉,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미 이 동굴에 우리보다 더 깊숙이 침투했다는 거지." 


그 누군가가 과연 누굴까. 아틀란티스의 숙적 갈드 코퍼레이션의 똘마니들일까? 아일란트로선 차라리 갈드의 똘마니들이 침투한 것이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만약 레버티군에서 보낸 특수부대원들이 먼저 침투한 것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비록 레버티군보다 먼저 이 동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괴물들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소규모 인원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이 추월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됐어, 아일란트. 미리 걱정하다 보면 끝도 없.."
"..기는 ...퍼스, 퀸즐? 들리나, 퀸즐?"
"고퍼스?"


잡음이 섞여 있어 소리가 깨끗하진 않았지만 퀸즐과 아일란트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무전기를 통해 고퍼스가 보내는 게 틀림없었다.


"고퍼스? 정말 고퍼스야?"
"...위치... 어딘가?"
"현재 수상한 구조물을 통과해 계속 걷는 중이다. 아일란트와도 합류했다. 어디에 있나?"
"....계속 걸어오면서 내려오..."


잡음이 심했지만 '고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려오라는 것 같은데.. 아래로 향하는 길이 있나 보군. 가자, 아일란트.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아니 근데, 약간 좀 꺼림칙한데. 갑자기 고퍼스로부터 연락이라니. 통신 상태도 양호하지 못하고.."
"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어. 일단 짚이는 건 다 살펴봐야지."


===


고퍼스로부터 연락이 오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퀸즐과 아일란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대학살극에 경악을 금치 못한 채 고퍼스에게 연신 무전을 날렸다.


"고퍼스? 고퍼스 들려?"
"...느 정도 들린다. 어디 쯤.."
"여기, 여기 로봇들이 괴물들과 싸우고 있어! 숨어서 보고 있는데.. 두 대밖에 없는데 거의 괴물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두 대..? 세 대 아닌.."


무전기 너머로 고퍼스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퀸즐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신을 보냈다. 약 삼십여 마리쯤 되는 괴물의 피를 주먹으로 찍어내는 건 분명 두 대의 로봇이었다. 하지만 고퍼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격전의 현장 한구석 바닥에 로봇 한 대가 반파된 채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대는 파괴됐다고... 역시 괴물들도 만만치.."
"야, 그래도 저 자빠져 있는 괴물들 시체를 보면 한 백여 마리였던 것 같은데, 저 세 대로 괴물을 저렇게 밀어붙이다니.. 우리가 찾긴 제대로 찾은 모양이야!"
"...로봇은 현재 적대적... 폐장... 좁은 길목 하나가 보일.."
"고퍼스? 고퍼스!"


고퍼스는 퀸즐의 감탄에 맞장구 대신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끊어다기보다는 상태가 안 좋아서 끊긴 거겠지만. 퀸즐과 아일란트는 고퍼스의 마지막 말을 대충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유추하는 동안에도 뼈가 부러지고 살덩이가 뭉개지는 소리, 괴물들의 비명도 계속 이어졌다. 


"로봇이 딱히 우리에게 친절할 것 같지 않단 말로 들려. 아마.. 마지막 마디는 은폐장을 말하는 거겠지? 준비하자, 아일란트."


둘은 은폐장을 활성화하고 고퍼스가 알려 준 좁은 길목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로봇과 괴물의 싸움터에 휘말리지 않게 벽면에 바싹 붙었다. 끔찍한 싸움,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괴물들이 작정하고 로봇에게 달려든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괴물 하나는 그대로 로봇이 내지른 주먹 한 방에 코뼈부터 시작해서 머리뼈 전체까지 와지끈 갈라지며 대자로 드러눕고 말았다. 하지만 뒤쪽 좌우에서 달려들던 놈들은 기어코 로봇에게 매달려 뒤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봇은 거의 10미터가량 솟아오른 다음 그대로 땅에 충돌하면서 괴물들을 떨궈 냈다.


"장난 아닌데.."
"새로운 생명 반응 감지."
"이런!"


로봇의 묵직한 기계음에 퀸즐과 아일란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은폐장은 그저 시야만 가려 줄 뿐, 생명 반응까지 가려 주는 것은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고퍼스 자식, 생명 반응 탐지 기능은 미리 말했어야지.."


이대로 달려야 하나 생각했지만 의외로 괴물이 그들을 구했다. 둘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로봇을 향해 괴물들이 다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더니.. 좀 더 서두르자, 아일란트."


둘은 서둘러 고퍼스가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좁은 길목을 통해 몸을 내뺐다. 괴물들의 비명을 계속 들으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고퍼스와 통신 연결을 시도했다. 아무래도 좁은 길목이라 영 여의치 않았다. 


"이제 은폐장 풀어도 되겠어."


싸움터에서 꽤 떨어지고 약간 넓은 길목으로 진입하면서 둘은 은폐장을 풀었다. 하지만 통신은 여전히 되지 않고 있었다. 


"생체 스캐너가 반응을 안 해. 근데, 마치 방해 전파라도 흐르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 아무튼,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것도 아니고 일직선 길목인데 고퍼스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네 뒤에 있지."


그 순간 아일란트의 목덜미에 쇠망치 같은 충격이 들어왔다. 아일란트는 신음도 못 내고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처박혔다.


"아일란트!"


퀸즐이 놀라 뒤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그녀의 발치에 불덩이가 날아와 땅에 부딪치면서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윽!"


그 충격에 그녀 역시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숨돌릴 틈도 없이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번개같이 모습을 드러내며 발로 그녀가 들고 있던 총을 차서 떨궜다. 그리고 불길이 담긴 주먹 한 방에 그녀가 쓰고 있던 전면 방탄 헬멧을 깨부쉈다. 퀸즐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헬멧뿐만 아니라, 어깨 하며 복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으..윽.."
"이쯤이면 됐겠지?"
"그래, 여기 이 친구도 완전 뻗었군 그래."


퀸즐은 희미해진 시야 너머로 붉은 머릿결의 여인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와중에 남자로 추정되는 나머지 한 명은 포승줄로 아일란트를 꽁꽁 묶고 있었다.


"놀라운 마법인데? 정말 우리가 안 보이나 봐."
"마법이 아니라니까. 범위 설정만 바꾸면 최대 다섯 명까지도 몸을 숨길 수 있지. 뭐, 그나저나.."


남자는 기절한 채 꽁꽁 묶인 아일란트를 뒤로하고 천천히 퀸즐에게 다가갔다. 마치 질문 거리라도 있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질문은 퀸즐이 먼저 날렸다.


"컥, 콜록! 너, 너희들 누구야!"


남자는 몸을 숙이며 퀸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했잖아. 네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뭐..?"
"고퍼스가 아니라.. '프로스트'란 게 문제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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