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하게 찢긴 시신들이 있어 도저히 온전한 무덤들을 만들 순 없었다. 한곳에 모아 흙을 덮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수습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미 미룰 대로 미루어 버린 작전이다. 통신도 안 되기 때문에 어쩌면 본부에서도 내 생존 가능성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래, 구체적인 계획 좀 들어볼까."

리스도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 들었는지 내게 물었다. 물론, 나로서도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실마리는 분명히 있다. 바로 수정 구슬, 난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수정 구슬을 가리켰다. 일단 건드리지는 않는 게 좋다고 해서 리스도 가만히 놔두고 있었다.

"역시 저 구슬에 뭔가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저 구슬은 내가 이 동굴.. 아니, 아예 또 하나의 세계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지하에 진입하던 아주 초기부터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고. 그리고 떠들어대던 것이 하나같이 '로봇'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까지. 

"내용은 기억해?"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내용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저런 희한한 구슬은 잊기가 더 힘들지. 구슬이 떠들어댄 내용을 간략히 간추려 보자면 이랬다. 일단, '괴물'들과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세주'라는 것. 두 번째로는 주인 되는 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것. 세 번째로는, 로봇을 다루기 위해선 아주 많은 조건이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강력한 감정'이라는 것.

"강력한 감정? 어떤 거?"

그걸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왜냐하면 구슬도 그 감정이라는 것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마지막으로 들은 정보는 (리스 역시 들었겠지만) 명령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 멈춰 버린 로봇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괴물들과 적대적이란 건 잘만 이용하면 아주 쓸만하겠어. 가령 놈들이 있는 곳으로 로봇을 유인한다던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 그럼 앞으로 저 수정 구슬들을 발견하면서 정보를 듣다 보면 로봇의 실체에 대해 더 접근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로봇이 아니라 현재 로봇의 주인이겠군."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들을 말해야 하는데.. 

"아, 그것도 그렇지만 당신이 말한 건 로봇에 대한 정보뿐이야. 로봇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막연한데.. 그래, 수정 구슬이 로봇의 위치도 알려 줄지도 몰라. 좋아, 그럼 일단 목표는 수정 구슬을 닥치는 대로 찾는 것으로.."
"생명 반응 감지, 접근 중."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고!

"뭐야?"

난 바로 팔을 뻗어 레이저를 쐈다. 붉은 빛줄기가 리스의 어깨 위를 스쳐 지나가며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던 괴물의 눈알을 꿰뚫었다. 이쯤 되면 나도 훌륭한 눈알 킬러.

"제길, 어느 사이에.. 여유롭게 떠들기엔 장소가 안 좋군!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

우왁스럽게 깔아뭉갤 줄만 알던 놈들이 제 딴이긴 하지만 슬금슬금 다가오다니 놀랍다. 놈들에게도 기습이란 개념이 있는 건가? 어쨌든 놈들의 기습은 실패했다. 결국 열 놈쯤 되는 나머지 괴물들이 괴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몰려들었고, 리스는 실패한 습격자들에게 똑바로 달려간 뒤 (표현 그대로) 불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에서 나온 불길에 적어도 세 놈이 휩싸였다. 직격당한 놈은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즉사했고, 나머지 두 놈은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른다.

"로봇들에 비하면야 이따위 조무래기 새끼들은! 뭐야? 다들 쫄았어? 그럼 얌전히 찌그러진 채 길이나 터!"
  
그녀의 기세에 괴물들도 움찔거린다. 애초에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무난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생명 반응 감지. 다수 출현. 접근 중."

내 스캐너가 또 경고를 보낸다. 다수가 접근 중이라고? 

"놈들을 죽여라!"
"생포할 것도 없다! 이 자리에서 찢어 죽여라!"

당장 눈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의 괴물들이 위쪽에서부터 비탈을 타듯 우르르 몰려 내려온다. 아까 그 피신처에서 괴물들이 로봇에게 죽었다. 위에 남아 있던 놈들의 부대가 흔적을 따라 여기로 내려오는 거겠지. 하도 급박해 잊고 있었다.

"하하! 아무래도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 할 건 네놈들인 것 같구나! 다만, 네놈들 몸뚱아리가 정말로 찌그러지겠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괴물들이 이죽거리며 우리를 비웃는다. 뒤에서 놈들이 몰려온다. 앞에 있는 놈들을 처치할 때쯤이면 너무 늦다. 정말 끝인가..

"아니, 프로스트. 아니야. 아까 당신이 말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있어."

리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뜻.. 아, 그러고 보니!

"적대적인 생명체 발견. 존재 불분명 대상을 향한 공격을 보류하고 말살 대상을 변경합니다."
"말살 작업 개시."

우뚝 멈춰 서 있던 로봇 세 대 중 두 대가 갑자기 그 거대한 몸을 돌려 몰려오고 있는 괴물들을 향해 뛰었다. 말 그대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높이를 뛰어 그대로 놈들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대 역시 아치를 그리며 나와 리스를 뛰어넘어 괴물들을 내리찍으며 강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에워싸라! 놈들을 에워싸... 아아악!"

그야말로 피가 튀고 뼈가 박살 나는 광경. 로봇이 휘두르는 주먹 한 방에 괴물들의 머리통이 쪼개지고, 어깨 위에서 떨어져 나가 땅을 구른다. 리스가 말한 대로, 잘만 이용하면 이 로봇들은 최고의 동지가 될 수 있다. 그야말로 일당백. 저 수많은 근육 덩어리 괴물들조차도 로봇들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프로스트! 지금이야! 빨리, 빨리 뛰어!"

리스가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지금은 도망칠 때지. 난 도망치면서 잠깐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야. 일단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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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가 자료를 검토할 때 스턱만도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스턱만 대위, 손에 쥐고 있는 게 만화만 아니었으면 그 진지한 태도에 아주 감탄하고 칭찬했을 거야."
"아니 이런.. 만화 무시해? 엄연한 문화이자 중요 자료라고."
"네 뒤에 계신 웨인 소령님한테 그렇게 보고 드리라고."
"어, 뭐야, 소령님! 언제 오셨습니까!"

스턱만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뒤돌아섰다. 레이첼 웨인 소령은 말없이, 그저 옅은 미소를 띠며 스턱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웨인이 정말로 열 받았을 때 표정이다. 스턱만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넌 뒈졌어, 스턱만."
"아, 이게.. 그게 아니라, 이게 패러데이의 성장 과정에 따른 감정 변화를 추측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여서.."
"너 이제 뒈졌다고."
"...죄, 죄송합니다."

레이첼 웨인 소령은 피곤하다는 듯이 업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올리비아 대위, 주변인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살아남은 사람이 많지 않아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패러데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따돌림을 받은 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패러데이는 정작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아,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 놈이 왜 그랬는지 나도 알 것 같아."  
 
웨인 소령은 컴퓨터를 켠 다음 로크 검사에게서 받은 자료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료로 받은 명단의 80%가 이미 살해당한 사람들이었다.

"진짜 복수는, 죽이는 것보다 고통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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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리스는 대학살의 현장을 빠져나와 이 거대한 동굴 속 또 다른 작은 동굴로 몸을 숨겼다. 리스는 피곤한 모양인지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쓴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우습잖아? 내 동료들을 다 죽였던 놈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으니, 어떻게 웃음이 안 나오겠어."

하지만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게다가 여전히 그 로봇들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신세라니, 참 꼬일 대로 꼬였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쓸어내며 숨을 고르다가 문득 날 쳐다본다. 뭔가 할 말 없느냐는 것이다. 할 말이야 많지만, 지금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따로 있는 듯하다. 아.. 그랬지. 수정 구슬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가 궁금하겠지. 결국 다시 수정 구슬에 대한 정보로 주제를 돌려야 했다.

"구슬의 정보에 대해선 아까 주구장창 얘기했잖아. 그걸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말해야지."

그녀가 약간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왜 그 수정 구슬에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했는지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왜? 손대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스의 동공이 흔들린다. 툭 내던진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하는 표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을 하다 보니 '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놈이 수정 구슬을 건드리기 전부터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까지. 

"수정 구슬에 손을 대면 환상이 보이고, 그 환상 속의 꼬맹이가 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은 실제로 작용한다고? 아주 특이한 마법이군."

리스가 내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약간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

"그 꼬마가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 수정 구슬들이 오히려 당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 아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발길을 두는 곳마다 나타나는 수정 구슬들.. 추적당하는 게 오히려 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수정 구슬들은 끊임없이 로봇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수상해. 마치 유인하는 것 같아.. 당신은 그 꼬마가 누군지는 알아? 이름이라도.."

이름은.. 분명 패러데이였지. 

"뭐? 패러.. 뭐?"

잘 못 들었나? 나는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패러데이. 그러자 그녀의 동공이 더욱 흔들린다. 뭔가 납득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녀가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뭐라도 잘못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주저하며 침묵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와 괴물들에게 로봇의 존재를 알려 준 사람이.. 바로 패러데이야."



[계속]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열 번째 이야기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