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자주 보게 되니 이제 익숙해질 정도다. 물론 반갑지는 않다. 지금 내 앞에 선 저 크고도 아름다운 로봇들이 금방이라도 날 빈대떡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반갑기는 개뿔이.. 잠깐, 이상하다. 안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 현상 발생, 작동을 정지합니다."

저 고철 덩어리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 싶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 대의 로봇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몸통 주변에 흐르던 푸른 빛줄기 - 방어막이 사라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멈췄어!"

리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로봇과 날 번갈아 본다. 그러나..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라. 나도 뭔 일인지 짐작도 안 가니까.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이미 나자빠진 리스도 딱히 일어나진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 로봇이 완전히 멈춘 것이 확실해지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과 함께 눈물로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로봇과 한창 싸울 때부터 이미 울부짖고 있었지만.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또, 또 죄다 죽어버렸어.."

아, 나도 그제서야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봇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일행들의 시신이 눈에 밟혔다.  나 역시 즐비하게 늘어선 아군 병력의 시신들을 본 적이 있다. 완전히 공감할 순 없지만 저 울분, 나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완전히 땅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딴 능력 있으면 뭐해.. 아무도 지키지 못했는데.."

눈을 감았다. 아군 병력의 시신들을 뒤로하고 만났던, 죽어가던 사람들. 그중 한 여인이 분명 내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 그리고 난 온갖 무기와 첨단 장비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다. 만약 그들이 나와 절친한 사람들이었다면, 내 안에 들어찬 울분도 지금 리스처럼 끓어오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울분은 지금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입구 너머에 그녀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다.

"아니, 다 소용없어. 그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게 뭐 때문인데. 바로 이 로봇이란 것 때문인데.. 이 로봇들도 적이잖아!"

리스는 불길 같은 눈물을 거두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주먹으로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한참을 엎드린 채 분노로 떨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얼굴에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뭘 하려는 걸까.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그나마 지켜 줘야 할 사람들도 다 죽었어. 그러니까.."

그녀의 손에서 불꽃이 솟았다.

"괴물이든 로봇이든.. 나도 단 한 놈이라도 더 죽일 거야.. 죽을 때까지 죽일 거야."

그래.. 그녀가 보여 줬던 그 신기한 능력이라면, 로봇은 무리겠지만 괴물은 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단 한 마리라도 더 잡고 죽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맞이해야 마땅할 죽음일까.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리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어도.. 내가 그 피신처 안에서 해야 했을 일은 거래가 아니라 보호와 안내였다. 바깥의 병력의 신경이 굉장히 곤두서있다느니 식으로 협박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중재해 줄 테니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해야 했고, 그렇게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만약 도와줬다면, 이 죄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땅을 구르고 있을 일도 없었다. 내 잘못이다. 정말, 정말 미안한 일이다. 미안하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누군들 낯선 사람을 선뜻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겠어. 뭐, 이제 서로 갈 길 가야겠지. 당신, 몸은 괜찮아?"        

고개를 끄덕였다. 구르고 로봇에게 시달려서 욱신거리긴 하지만.. 

"나도 어디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어.. 마지막까지 싸울 기회가 있다는 거지. 그럼, 행운을 빌어, 프로스트. 난 여기서 좀 더 할 일이 있어. 무덤도 만들어야 하고, 우뚝 멈춰선 망할 저 고철 덩어리들도 박살 내야.."
"잠깐!"

그녀에게 외쳤다. 그녀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렇다. 할 말이 남아 있다. 그녀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지만.

"무슨 말 하고 싶은 거야?"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느낀 이상, 바깥으로, 레버티 공화국으로 안내하겠다는 뒤늦은 제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부탁은, 굉장히 뻔뻔할 수밖에 없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역시나, 내 말을 들은 그녀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뭐, 기왕 죽을 목숨, 당신이나 돕고 죽으라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이에게 희생을 제안한다면, 나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공짜로 인력을 빌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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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만큼, 나 역시 당신을 돕지."

꽤 각오한 듯한 다부진 말투였지만, 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돌았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도움 필요 없어. 당신은 당신의 조국을 위한 일을 해. 난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테니.."
"내 계획을 수정하지."

그녀의 말을 자르듯 치고 들어오는 프로스트의 목소리. 리스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무슨 수정을 한다는 거지?"
"먼저 당신의 원래 계획을 돕고 내 계획을 실행하겠다."
"내 원래 계획?"

프로스트의 말에 리스는 잠시 고개를 외로 꼬았다. 원래 계획이라, 원래 계획. 그걸 떠올리다가 더 어처구니없었는지 이번엔 제법 크고 짧은 웃음을 터뜨린다.

"하! 지금 장난해? 직접 겪고도 몰라? 이 로봇들은 우리 적이야. 로봇 군단은 우리가 차지해야 할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적이야!"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다. 저 로봇들, 아무리 봐도 상태가 불안정해."
"뭐?"
"솔직히 압도적인 전투 능력을 갖췄지만, 저것들, 우리를 적극적으로 죽이려 하지 않았어. 놈들이 떠들어댄 말들.. 상황 분석을 제대로 못 하는 중이었어."
"어쨌든 소용없잖아?"

리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태가 불안정하든, 이상하든.. 우리의 적인 건 분명하잖아? 더 쓸데없는 시간 낭비 말자. 당신한테도 좋을 일 없으니."
"어쩌면, 저 로봇들의 제어 권한을 우리가 탈취할 수도 있다. 믿어 줘."

프로스트가 손을 내밀었다. 리스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 낭비 말고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프로스트의 말이 계속 귀에 걸린다.

"확실히 약속하지. 로봇의 제어권을 탈취해서, 저 괴물들을 모두 죽이고, 입구 너머로 로봇들을 전부 보내 당신들이 해방되도록 도와주겠어. 입구를 파괴하는 건, 그 모든 걸 마치고 하지. 결국 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것이지만, 당신을 돕는 건 확실하지 않아?"
"진심.. 이야?"
"믿어 줘. 지금 하고 있는 이 약속, 절대 어기지 않겠다. 나 프로스트,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다. 이미 저질렀던 잘못을,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겠다."

프로스트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리스의 머릿속이 오만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정말 이 자의 말이 가능하다면.. 하다면 복수는 물론이고 정말 해방도 가능하다. 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입구 너머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지 않은가. 정말 더 잃을 게 없는가. 아니다, 고통받고 있지만 여전히 고향이 있고, 그 고향에 동포들이 있다. 리스는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가시밭길이고, 가능성 없는 패배의 길이라고 해도.. 

"생각을 시간을.. 아니, 아냐! 좋아."

생각이 필요한가? 정말 가능성 없는 패배의 길이라도, 굳이 거절해서 얻는 게 없다면, 오히려 후회만 남는다면..! 그녀도 손을 내밀었다. 

"한번 끝까지 가 보자고."

그리고 손을 맞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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