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상식이 깨진 공간이다. 바로 옆에 펼쳐진 울퉁불퉁한 바위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쓸어본다. 미친 짓 같겠지만, 스캐너가 미친 게 아니라면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가선 안 된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다.'

빌어먹을. 입 닥쳐, 꼬맹이. 왜 녀석의 말이 내 귓가와 머릿속을 맴도는지. 그것도 너무 생생하게, 바로 내 뒤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있지도 않은' 꼬맹이가 아니라 '정말로 있을지 모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손에 잡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손 끝으로 전달되는 바위의 감촉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정말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돌출부. 살짝 밀었다. 


===


"문이 열리고 있어!"

사람들은 떨고 있다. 처음 만들 때부터도 반신반의했던 위장이었고 언젠가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해 왔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공포감이 극에 달했다. 

"어서, 어서 숨어!"

사람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더욱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집어치워! 아직 다른 출구도 다 못 만든 상황에서 도망친다고 해결돼?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봐야 할 것 아냐!"

젊은 여성 한 명이 그들을 가로막고 다그친다. 그 기세에 그녀의 붉은 머릿결이 흩날린다. 하지만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튀어나온 덩치 큰 사내도 덜덜 떨며 얼른 비키라는 눈치를 줬다.

"맞서 싸운다고 해결이 되냐! 그놈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야, 괴물.. 그리고 리스 넌 우리하고 사정이 다르니까 그렇게 나서겠지만.."
"사정이 달라? 계속 도망만 쳐 온 건 똑같은데! 게다가 이제 도망갈 길도 없는 마당에 도망을 가겠다고? 선택지는 싸우다 죽거나 싸우지도 않다가 뒈지는 수밖에 없어! 도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리스는 이런 한심한 인간들과 더이상 말싸움하기 싫었다. 혼자서라도 나서기로 했다. 그들을 밀치고 가로질러 다가오는 '괴물'에게 맞서려 했다. 그런데 문으로 향할수록 이상했다. 열린 지 꽤 되었는데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괴물들이라면 강 건너에서도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릴 텐데 어째 이렇게 조용할까.

"아아아아아악!"

뒤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틀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뛰어갔다. 그 좁은 통로에서 그 누구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치채는 게 늦어."

리스가 달려갔을 때는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 늦은 상태였다. 자신에게 도망쳐야 한다고 말했던 남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다른 한 남자는 그 '누군가'의 팔에 목이 감긴 채 거의 혼이 나간 듯 떨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살점에 닿기만 해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날카롭게 벼린 단검을 쥐고 있었다. 당연히 그 검 끝은 혼이 나간 듯한 남자의 목 부분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벽에 등을 밀착한 채 좌우를 쉴새 없이 둘러보고 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도 속절없이 보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너 누구야!"

명백한 인질극 앞에 리스 역시 손써 볼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리스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리스를 보고 있었지만 리스는 도저히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는 난생처음 보는 투구 같은 것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둥글고 검은 투구였다. 눈가에만 약간 옅은 색깔이 칠해진 것 같은..


===


붉은 머리의 여성이 날 바라보며 누구냐고 다그친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물론 답해 주진 않겠지. 이렇게 한 사람 붙잡고 죽일 듯이 목에 칼까지 들이민 상태에선 더더욱. 하지만 난 이들이 적인지 아닌지 구별할 도리가 없다. 이들은 과연 아군일까, 적군일까.

"다 죽일 듯이 인질극이나 벌이면서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묻고 있어?"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따져 묻는다. 난 혼자고 너희들은 여럿이고,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턱대고 친구 먹자고 할 순 없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그 요상한 투구나 벗지그래?"

투구? 아.. 내가 쓰고 있는 전면 헬멧 말하는 건가. 참, 누구더러 요상하다는 건지. 너희들 입고 있는 건 꼭 중세, 기껏해야 초기 근대에나 입을 법한 옷이면서. 가장 앙칼지게 따져 묻는 붉은 머리 여자만 해도, 흰 와이셔츠 위에 가죽조끼, 아래로는 가죽 레깅스 바지를.... 잠깐, 중세? 초기 근대?

"여기서 네가 입은 게 제일 이상하거든!"
"야, 야.. 리스! 자꾸 자극하지 말어! 어.. 어어!"

여자가 여전히 노려보면서 소릴 질렀다. 당연히 내 칼에 목이 달아나기 일보 직전인 남자는 아주 울부짖고.. 그나저나, 그렇다. 여기 있는 사람들 입은 건 죄다 아주 옛날 사람들이나 입었을 법한 옷들.. 나만 최신 전투복이다. 이런 곳에 영화 촬영 같은 게 가능할 리도 없고, 좀 전에 다 죽어가던 사람들도 옛날 옷들을 입었지. 그 사람들은 괴물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도 그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인가? 그런 건가?

"뭐야, 너.. 너도 그 괴물들과 싸우고 있단 말야?"

그제야 붉은 머리 여성이 약간 수그러져 묻는다. 그럼 한패인 줄 알았냐.

"그, 그럼 너야말로 우리가 놈들과 한패인 줄 알았냐!"

후우.. 이 사람들 지금 자기들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군. 이 동굴, 이 지하가 좀 이상하긴 해도 엄연히 레버티 공화국의 영토 내 장소, 그것도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군사 작전 구역이다. 충분히 의심을 해 볼만하다.

"레버티? 그게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우린 그 괴물들에게 끌려 왔다가 간신히 탈출한 것뿐이라고!"

여자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냐는 듯 다시 소리를 높였다. 거짓말 같진 않다. 

"그보다, 여기 길은 하나고! 난 너 들어오는 것도 못 봤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야.. 자극하지 말라니까..!"

그건 뭐, 알아서 열심히 대가리 굴려보셔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말이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