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은 가방을 들고 좀 더 걷기로 했다.
  컬러즈의 물건을 사줄 사람은 극지 적긴 했지만, 처분할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가격은 후려쳐질 것이다. 위험부담비용, 운송비용 등을 이유로 말이다.
  이유는 정해져 있고, 아주 정당한 이유이기 때문에 잭으로서는 항의할 건덕지도 없었다.

  실제로 컬러즈는 위험한 놈들이었다.
  슬럼가에 흩어진 머저리들이 아니라 본거지를 때리러 가라고 하면 잭도 질색할 것이다. 충분한 화력과 충분한 인원이 함께한 상태해서 최소한 3000크레딧 이상의 보상을 바랄 수 있을 때나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이윤은 거의 남기지 않을 경우의 이야기이며, 저 상태에서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잭은 적당히 도망 다닐 생각이었다.

  최소한 이 약들을 다 크레딧으로 바꿀 수 있다면 적당히 숨어 다닐 정도는 충분히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고 해도 역시 하루 만에 처분하는 것을 어려울 것이다. 근처에 컬러즈 놈들이 쭉 깔려 있을 것이고, 그 놈들과 제법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잭은 미행자의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잭이 블루하와이를 나서서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였다. 아마 블루하와이에 들어갈 때 쯤 부터 붙었을 거라고 잭은 생각했다.
  추적자의 얼굴은 몰랐다. 잭은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적자와 얼굴이 마주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간접적으로 그의 존채를 파악할 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남자고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키는 190에 가까운 장신이고, 근육질에, 코트를 입고 있으며, 신발은 군화라는 사실이 잭이 알아낸 모든 정보였다. 그리고 그가 혼자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적어도 상대는 갱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 것이다.
  컬러즈가 수의 잇점을 버린다는 수를 쓸 이유가 없었다. 이미 다수가 잭을 제압하려고 시도한 결과 이미 한 번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취할 수단은 둘 중 하나였다.

  포기하던가, 더 많은 수로 밀어 넣던가, 전문가를 고용하던가.
  컬러즈의 보스인 데이비드는 나름 머리가 돌아가는 친구였다. 만약 고용한 사람이라면 확실한 실력을 가진 암살자를 고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잭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았다.

  이거야말로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혈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잭은 느꼈다.
  전투에 대한 기대감과 고양감. 최근 들어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잭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싸울 수 있는 넓은 공터가 있는 골목길. 그리고 사람이 적은 장소. 적당한 장소를 잭은 생각해 냈다. 확실히 방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거리는 잭의 손바닥 안이었고. 잭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문제는 상대가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인물이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잭이 유인하는 곳까지 호락호락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멍청한 녀석이라서 따라온다고 하면 꽤나 시시한 결말이 될 것이기 때문에 실망감만 차오를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잭의 생각대로의 인물이라면, 제법 즐거운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체 말라 비틀어갈 것이라면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져줄 마음은 없었다. 침대 위에서 죽는 것은 수치지만, 그래도 모르지 않는가? 혹시 더 강력한 적이 자신의 앞에 나타날지.

  잭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비상계단을 타고 올랐다. 3m가량의 높이에 있었지만, 잭의 키와 점프력에 약간의 요령이 더해지면 충분히 닿고도 남았다. 잭은 그대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옥상으로 향했다.
  여기라면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 한 명 죽어도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방치될 가능성이 높은 장소였다.

  잭은 옥상의 파이프에 걸터앉아 접근을 기다렸다.
  철로 된 비상계단을 밟으며 차근차근 상대가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추적자는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인 모양이았다.
  물론 잭으로서도 그 쪽이 더 좋았다. 그는 총보다는 맨몸으로 싸우는 것을 더 선호하는 종류의 전투광이었다.

  기대대로.
  추적자는 정면으로 찾아왔다.

  그는 코트를 입은 거한이었다. 잭에 비하면 여전히 작았지만, 그대로 인간치고는 큰 키였다. 코트 안쪽으로는 방탄복을 입고 있었고, 반짝이고 장난기서린 푸른 눈동자로 잭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잭은 방심하지 않고 말했다.

  “우선 통성명을 하지. 나는 잭이라고 하네.”

  “샘 에반스.” 그렇게 자신을 밝힌 남자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체 말을 이었다.

  “【늙은 잭】. 자네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조사해 보았지. 경력 12년. 127건의 크고 작은 런을 뛰었지. 성공률은 70% 남짓. 그리고 모든 임무에서 살아남음. 중요한 것은 마지막 것이로군. 모든 임무에서 살아남음. 중요해. 내가 찾는 인재라는 증거지.”

  샘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동시에 잭은 실망했다. 아무래도 상대는 잭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용건으로 온 사람인 듯 했다. 아마 싸움이 아니라 비즈니스다. 하지만 이미 퇴물 취급받고 있는 자신에게 일이라니.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기대 수명을 넘은 늙은 오크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잭 자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비하면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나이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젊음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많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는 것은 경험 뿐.

  그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시간이다.
  그렇다. 시간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단 두 가지. 경험과 투지를 제외하고.

  “일의 이야기라니. 아주 오래간만이군.”

  잭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직 상대를 판단하기에는 일렀다. 다소 김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샘 에반스라고 이름 밝힌 이 젊은 친구를 경계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복장, 서 있는 자세, 복장만으로 어느 정도 전투력을 유추해볼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이버웨어가 보편화되고 인간은 단순히 겉만으로 얼마나 강대한 폭력을 감추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시대가 온 것이다.
  손에서 기관총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였다. 아니, 손에 무기를 장착하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전신 어딘가에 비장의 무기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드잡이질을 하는 경우가 많은 잭은 내구성을 생각해서 그런 암기나 잔재주가 없는 물건을 선호하고 있었다. 내부에 해 놓은 장난질이 결정적인 순간에 작동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소문을 듣지 않았나? 최근 나는 퇴물이라고 불리지. 보면 알겠지만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 나를 고용한다는 것는 제법 리스크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샘은 웃었다.

  “의심하는 것은 이해해. 그렇지만 자네가 싸우는 모습이라면 봤지. 무엇보다 내가 필요한 것은 자네의 전투력이 아니야. 그 경험이지.”

  샘은 그렇게 말하며 난관에 등을 기댔다. 삐꺽하고 불안한 소리를 냈지만 샘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데. 리더가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거기서 자네를 선택했네. 그래. 우리는 그 경험이 필요해. 여차하면 현장에서도 뛸 수 있고, 충분한 경험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즉 팀을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로군.”

  잭은 그렇게 말하며 생각했다. 상당히 거창한 이야기였다. 아마 샘은 중개업자일 것이다. 그의 경험상 판단하자면 그랬다. 의뢰인의 의뢰를 받고 중개인인 샘은 팀을 조직했다. 그러나 리더를 정하지 못했다.

  샘이 아는 선에서 리더로서 우수한 인물이 없었던가, 그것이 아니면 우연히 시간이 맞지 않았다던가. 어느 쪽이건 그는 상당히 고심한 끝에 자신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잭은 예측했다. 이제 단물 다 빠진 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러너를 찾아온 이유가 그 외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잭은 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샘이 맡은 일은 아마 제법 촉박한 일일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손발 잘 맞는 팀을 통째로 고용하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팀을 급조해 만들었고, 거기에 현재 잘 나가는 러너가 아닌 잭을 선택해 리더로 놓으려고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간이 촉박한 끝에 가능한 선에서 최선의 팀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확실히 이야기가 빠른 것은 좋군. 그 말대로야. 우수한 멤버를 모았지만 다들 개성이 강한 탓에 이들을 규합하려면 아무래도 권위가 필요하지.”

  “퇴물에게 권위가 있나?”

  약간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샘은 양손을 과장되게 휘저었다.

  “그거야말로 웃기는 이야기로군. 자네의 전설은 여전히 매트릭스 깊숙히 남아있네. 마니아도 있지. 자네의 런 기록을 손에 넣는 것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주게. 누군가가 열심히 정리해주고 있었다는 거니 말이네. 물론 자네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쉬웠으면 끔찍했을 거야.”

  아무튼 숨어 다니는 일에도 나름 자신이 있는 잭이었다.
  런이란 기업과 대립하는 일이 많은 일이다. 자치권에 치외법권을 가진 초법적인 기업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이란 적어도 잭같은 범죄자와는 비교도 안되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업과 대립해 런을 하다보면 언젠가 기업에게 덜미를 잡혀 제거 당하게 된다.

  러너들의 대부분의 경력이 짧은 것도 그런 이유고, 잭이 전설적인 러너인 이유도 바로 그 탓이었다. 횟수로 12년. 12년이란 기간 동안 몇 번 실패를 했음에도 살아남아 최종적으로 기업의 공격을 피해냈기 때문인 것이다.

  “무슨 일인지 알려줄 생각은 있나?”

  “아쉽게도. 비밀서약이라고 할까. 합류하기로 한 자가 아니면 알려줄 수 없어. 그리고 합류하게 되면 상당히 강력한 금제를 당하게 될 거야. 도중 이탈은 용납되지 않지. 미리 말해두지만 굉장히 위험한 일이네.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받아들여도 좋을 정도로.”

  “그렇군.”

  상당히 보안이 철저하다고 할까. 잭은 조금 흥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대감이 빗나간 탓에 느꼈던 실망도 사라지고 없었다. 대놓고 죽을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대체로 러너에게 일을 맡길 때 의뢰인들은 쉬운 일이라고 속이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위험하다고 미끼를 내거는 것은 그것이다. 정말로 위험한 일인 것은 틀림없고, 거기에 더해서 이쪽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잭은 방금 전까지 추측은 버렸다.
  급하게 팀을 모은 것은 분명히 맞을 것이다. 하지만 급하게 팀을 모았다고 해서 잭을 임의로 고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업에 잭을 선택하자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면밀하게 어떻게 교섭할지 생각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최근 꽤 심심했지. 기대해도 좋은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아. 이건 단지 자네에게 미끼를 던지려는 것이 아니야. 어중간한 각오로 팀의 분위기를 깨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거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될테고, 실패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지. 자네의 경력이 끝장나는 것도 100% 확정이야. 실패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성공할 경우엔?”

  “완벽하게 일을 끝냈을 경우에는 반반이군.”

  “이거 아무래도 상당한 거물을 상대로 일을 벌릴 생각인 모양이군.”

  과연 어디일까?
  드래곤이나 마왕이라도 상대할 것인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 경제라는 게임판 위에 메타휴먼이라는 말을 두고 게임을 벌이는 초월자들을 상대로 일이라도 벌리지 않는 한 이만한 리스크를 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그 미치광이 같은 일을 받아들인 놈들이 있다는 거군.”

  “정확히 넷. 자네가 들어오면 그 미치광이 일당이 여섯이 되는 셈이지.”

  “여섯?”

  잭이 묻자 샘은 자신을 가리켰다.

  “나까지 해서 여섯. 나는 계속해서 팀의 지원을 할 예정이거든.”

  “이미 미치광이 다섯이 타고 있는 배인가? 의뢰인도 포함하며 좀 더 우람한 배가 되겠는데.”

  “하지만 아직 출발하지 않은 배야. 마지막 티켓을 받을 건지 결정해주었으면 하는군. 물론 브레이크 없는 배에 타는 것인 만큼 그만큼의 편의와 보상은 주겠네.”

  “우선 금액에 대해서 들어볼까? 목숨을 건 일이니까. 적어도 싸구려 보상에 나를 팔 생각은 없어. 아무리 일이 궁하다고 해도.”

  말하자면 그것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소한 자신의 재주를 싸구려로 팔 생각은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자신이 있었다.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인선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실력과 경험이 있으며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러너. 【늙은 잭】이라고 불리는 러너를 고용하기 위해 왔다는 확신 말이다.

  “얼마 정도 원하지?”

  “10만은 받아야 겠군. 못해도 말이야.”

  “아무래도 아직 자네는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샘은 말했다.

  “그 이하로는 안 돼. 설령 내가 차선책 같은 거라고 해도 말이야.”

  잭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샘은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착각하고 있어. 10만? 그 정도 값어치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분명히 말하지. 우리 의뢰주는 자네에게 수수료 제외 100만 크레딧을 지급할 거네. 남은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는 돈이지. 괜찮은 신분을 구입해서, 따뜻한 남족 섬에 별장이라도 짓소 살아도 괜찮을 금액을 주겠네. 물론 캐쉬카드로. 1만 크레딧 캐쉬 카드 100장.”

  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어떤 일을 하려고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100만 크레딧이라는 금액은 평범한 금액이 아니었다. 베테랑 러너가 기업을 상대로 잠입, 납치, 절도, 교란, 파괴활동 등을 하는 데 드는 고용비가 1600에서 3000 크레딧 사이였다.

  그 돈이면 몇 달은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러너인 이상 다음 일을 준비하기 위해 돈을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금액은 그 정도 선인 것이다.
  10만도 잭은 통 크게 불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샘의 일은 분명히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일이 분명했고, 대기업을 상대로 런을 한다는 것은 10만 정도는 부를 만한 금액이었다. 이미 한 번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잭은 그렇게 하고도 살아남았다.
  그때 함께 일했던 동업자들은 전부 죽었지만, 잭은 살아남은 것이다. 다만 도망 생활에 거의 모든 돈을 탕진하고 말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일까.

  “100만?”

  “주눅 들어도 이해하지. 하지만 그 정도의 일이야. 당신도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면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후우.”

  잭은 심호흡했다. 100만 크레딧.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잭의 솔직한 심정은 흥분이었다.
  이만한 일이 그가 말년에 와서 들어오다니.
  잭은 환희했다. 그가 뼈를 묻을 장소가 이곳일까? 아니. 물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의 전설에 한줄 새로운 구절을 써 넣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었다.

  여기서 죽건 살아남건. 어느 쪽이건 환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죽음인 것이 아니라면 잭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최후가 될 것이다. 오크의 삶은 투쟁이었다. 비록 잭은 오크 치고는 단독 활동을 조용하는 특이한 면이 있기 했지만, 그럼에도 오크로서의 투쟁 본능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좋아, 하지.”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이 코 앞에 들이밀어 졌을 때 잭은 이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순한 자살 임무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죽는다면 싸움터. 그렇게 생각하는 잭이었지만, 그래도 자살할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한다면 최고의 전장.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자연사 하는 쪽이 낫다. 개죽음한 병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런 잭에게 있어 샘의 제안은 고마운 이야기였다.
  이미 잭이 받을 수 있는 일은 그런 희생양이 되는 일정도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잭에게 어렵고 힘들지만, 제대로 된 일을 가져다 줬다는 것만으로 잭은 환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계약서에 동의하게. 다시 말하지만 한 번 계약하면 무를 수 없어. 이 계약서는 강력한 마법에 의해 수호되네. 말하자면 기어스라고 하던가? 그런 종류의 정신구속 마법이지.”

  “읽어봐도 좋나?”

  “물론. 공정하게 작성되었다고 약속하네. 대신 깨었을 때의 대가가 가혹하지만 100만 크레딧짜리 일이야. 그 정도는 당연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샘을 무시하고 잭은 계약서를 면밀하게 살폈다.
  최첨단 광학 의안으로 만들어진 잭의 오른쪽 눈이 재빨리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 내렸다. 그리고 잭은 결론 내렸다. 이상한 수작 같은 것은 없다. 동시에 그것과 별개로 이 계약서가 강력한 마력을 띄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대단절】 이후 초월종들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마법의 존재는 인간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인간들 사이에서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만 인간은 드래곤같은 다른 초월종들 같이 자유자재로 마법을 다룰 수 없었으며, 다룰 수 있는 마법의 종류와 갯수에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마법은 마법을 각성한 【각성자】 본인의 개성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마법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을 포함한 최상위 초월종들 정도. 그 외에는 역량과 갯수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잭은 이 계약서에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마법의 힘에 전율했다.

  마법에 완전히 문외한이 잭이 이만큼이나 마법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 계약서를 만든 자가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일반적인 하위종족의 범주인 엘프, 인간, 오크의 세 종족을 넘어선 종족의 누군가가 이 계약서를 만들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배후에 대체 누구를 두고 있는 거지? 100만 크레딧의 보상을 약속한 것도 모자라, 이 계약서에 깃든 마력은 대체?”

  심지어 보상에 대한 강제력 역시 존재하고 있어, 의뢰인이 보상을 미룰 경우 의뢰인 역시 사망하는 구조로 계약서의 항목이 작성되어 있는 것을 보며 잭은 눈 쌀을 찌푸렸다.

  “그건 자네가 계약하고 난 후에 가르쳐줄 이야기로군.”

  샘은 처음과 같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그래. 계약법은 별거 아니야. 거 아래 문단의 글을 읽으면 되네.”

  “흠.”

  잭은 샘이 시키는 대로 마지막 문단의 글을 읽었다.

  “선언. 나는 목숨을 걸고 이 계약을 준수한다.”

  그 순간. 잭은 몸의 일부가 계약서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극소량이었지만, 분명히 잭의 일부였던 무언가였다. 동시에 잭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구속된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은 곧 사라졌지만,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걸로 된 건가?”

  “그래. 서명되었군.”

  계약서를 돌려받은 샘은 잭에게 서명란을 보였다. 서명란에는 섬뜩한 핏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자네 정수의 일부지. 계약이 끝나면 자네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위화감도 곧 사라질 거야. 그러지 않으면 일할 때 곤란하니까.”

  “흐음.”

  잭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확실히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은 가면서 하도록 하지. 우선 내려갈까.”

  비상계단을 가리키며 샘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