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그날 이후로 매일 밤 자기 전,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정말 그녀에게 있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을 봐줘야만 했다. 내려오고 보니 제법 가파른 구덩이에서, 마치 외나무다리 반대편에 서 있는 듯 저쪽에서 옹기종기 모인 인간들. 그리고 그런 인간들과 여기 혼령들 사이에는 저 거대한 것이 떡하니 서 있었다. 그래, 저 유적이란 게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리치고는 꽤나… 특이했지만.

“으음,”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로, 시히델이 잠에서 깨면 아직 자고 있는 혼령들, 이미 깬 혼령들과 함께 저쪽에서 비슷한 상황인 듯한 인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호리에르가 그렇게 말했으니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뭐랄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언제나 그렇듯, 거의 일상처럼 목숨을 끊어놓던 것들이 뒤가 아닌 어디를 보든 시선에 들어온단 말야. 그녀는 이제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인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애초에 죽음으로 가득 찬 수백 년의 기억을 단지 며칠 따위가 감당할 리 없었다.

“일어났어?”

언제나 그렇듯 마르한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래도 바로 저 앞에 경계할 대상이 있기 때문인지 혼령들은 이곳에서 제법 잘 뭉쳤고, 때문에 시히델도 그 며칠 사이에 마르한뿐만 아니라 다른 몇 명의 혼령들과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는 며칠 전까지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이후 쓸쓸함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이 슬슬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았다. 설령 그녀가 지금까지 인간들과 계속 싸워온 혼령이라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말을 걸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혼자가 될 일이 생긴다면, 혼자가 되면 그만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시히델은 마르한마저 그녀에게 돌아선다 해도 별로 절망하지도 않고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어쩌면 그만큼 모든 일에 무감각해진 것이 아닐까. 심지어 저 신령들의 유적이라고 세워진 것에도 처음 봤을 때 살짝 두근거리기만 했을 뿐, 역시나 그녀는 몇백 년 전의 그 모범생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을 죽이며,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죽는 걸 보면서 그 모범생도 서서히 죽어갔다… 라고, 그녀는 이런 자아성찰 같은 것마저 별로 흥미가 없기에 여기까지만 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서,” 기지개 켜기도 귀찮아져서 기운을 가볍게만 피며 말을 꺼내는 시히델.

“오늘은 무슨 일 있어?”

“아니.”

마르한은 습관처럼 대답했다가 “아, 아니,” 다시 한 번 부정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시히델이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마르한은 “음,” 말꼬리만 길게 늘이더니 그녀가 아침부터 귀찮게 구는 그를 기운 끝으로 살짝 쏘자 부르르 떨고는 말했다.

“그, 내 말은, 저거 어쩔 거야?”

“뭐?”

“저 유적 말야.”

그의 말에 시히델은 오늘도 구덩이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있는 그것을 슥 쳐다봤다.

“유적이 뭐?”

“뭐냐니, 시히델.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마르한이 기운 한쪽을 뻗어 유적을 가리켰다. “우리,” 그가 말했다.

“분명 저 유적에 대해 알아보러 온 거잖아. 그런데 보라고! 지금까지 호리에르 말고는 우리 중 한 명도 저 근처에 가지도 않았잖아. 인간들이 저기 있느니 뭐니 하면서 말야.”

“그래서 뭐?”

“뭐냐니!”

평소답지 않게 화를 내는 마르한.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성을 낼 땐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라고 표현하지를 못하거나, 아니면 왠지 좀 말하기가 그래서 이렇게 혼자 답답해하는 거였다. 때문에 시히델은 일부러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쳐다봤고, 이에 마르한은 못 참겠다 싶어서 확 질러 버렸다.

“너가 좀 가 보라고! 거의 맨날 나서던 모습은 어디 갔어? 너가 먼저 가야 다른 혼령들도 갈 거 아냐!”

마르한의 이 말에 시히델은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사실은 조금 기가 막혀서 말하기도 싫지만, 그래도 친구인데 말은 해야지. 하지만 곱게 말할 생각따위 없었기에 그녀는 먼저 “그것 참,” 한 번 쏘아붙였다.

“귀엽구나. 내가 겁도 없이 인간들을 대할 때는 그렇게 붙잡고 매달리더니, 이제 와서 나서달라고 너가 직접 부탁을 하는구나. 하여간 여기 온 뒤로 참 별일이 다 생기네. 다른 혼령들이 나한테 말을 거는 일도 생기지 않나. 여기 참 재밌는 곳이야.”

“아니, 시히델, 내 말은–”

그냥 가볍게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가 마르한이 다시 뭐라 하려는 순간, 시히델은 짜증이 확 치솟는 것을 참지 못하고 더이상의 가식 없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곧바로 움찔하는 마르한.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느껴온 모든 감정, 지금 그녀를 이렇게 만든 모든 기억이며 감각이며 전부 이 한 시선에 담아 보내자, 비록 잠깐 그러고서 다시 유적을 멀거니 바라보았음에도 마르한은 더이상 말도 꺼내지 못했다. “미안해.” 그렇게 조용히 서 있다가 잠시 뒤 그가 중얼거렸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 정말이야! (시히델이 다시 쳐다보자 그는 온 기운을 휘휘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넌 우리 중에 가장 열심이었잖아. 기억해? 신령님에 대해서… 수업 때마다 항상 그랬잖아.”

적어도 이 말은 그녀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역시 별 감흥이 없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기운을 모으며

“쓸데없는 걸 기억하네.”

대답을 툭 던지고는 짧게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쫓아와서 추궁하는 마르한.

“다른 혼령들은 몰라도 난 이해가 안 돼. 넌 항상 수업도 열심히 듣도 그랬어. 그런데 왜 지금은 그래?”

”…그럼 너가 이해할 수 있게 한마디 해줄까.”

그녀는 도로 자리에 앉으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저번에 너네들이 약해빠졌다는 얘기 했지? 내가 그동안 혼자 저 앞에서 버티고 있었어서 너네들이 그렇게 물러질 수 있었다는 거 알아? 그렇게 너희가 여유롭게 물러지면서 이미 지난 지도 오래된 일이나 기억하고, 그렇게 쓸데없이 감상에나 빠지고. 그동안 내가 혼자 저 앞에서 모두 잊는 동안, 너희들은 내 덕분에 그따위로 물러터져서 툭하면 옛날 일에나 몰입해가지고, 정작 나한테 이해가 안 되네 뭐네 했었던 거잖아. 너 이건 알고 있었니?”

”……”

할 말을 잃은 듯한 친구 대신 땅만 쳐다보며 시히델은 계속했다.

“지금까지 너도, 나도, 저 중 대부분의 혼령도 몇백 년을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네들이랑 똑같이 보고 똑같이 생각할 것 같았다면 난 도저히 할 말이 없어. 애초에 난 저 유적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냐. 쉬고 싶어서 온 거지.”

“그럼,”

하지만 마르한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지 이런 그녀에게 다시 물어봤다.

“여기서 충분히 쉬면, 우리를 이해해줄 수 있어? 아니, 그러니까 네 일은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

“꺼지라고!!”

급기야 비명에 가까운 기운을 토해낸 시히델. 그리고 이런 그녀의 폭발이 온 곳에 울려 퍼진 것 같았다.

“그냥 꺼지란 말야. 왜 꼭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냐고! 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어느새 모든 혼령들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시히델도 마르한도 그 자리에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한은 시히델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보고는, 이런 태도마저 그녀를 더 화나게 할 것 같았는지 스르르 다른 자리로 갔다. 시히델은 그대로 주저앉은 채 낮은 한탄만 흘려보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제발 나 좀 쉬게 놔두라고. 그녀는 자신의 기운으로,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조금씩 기운이 사그라들며 그렇게 주저앉은 채로 늘어졌다.

……

“어찌 되었든 결국 우리들이 보기에,”

어느새 달과 함께, 그리고 별과 함께 온 밤이 빛나는 아래 그분들 중 하나가 결론을 말해주셨다.

“너희 혼령들에게는 딱히 수명이란 것이 있진 않아 보이는구나. 그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 너희들이 스스로 알고, 잘 활용해라. 너희는 각자 오랜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될 거니까. 다만, 이를 혼자 간직하지 말고 다른 이들과 잘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겠지?”

이 말씀에 모두가 동의해서 저마다 기운을 살랑거렸다. 시히델 또한 가만히 들으면서 동의하다가,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자신의 기운을 퍼뜨렸다. “응?” 가르치던 이가 그녀를 쳐다보셨다.

“저기, 신령님,”

시히델은 약간 소심하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생각하던 말을 그대로 꺼냈다.

“하지만 혼령들이 계속 어디서 생겨나는데, 어, 그러니까, 나이가 많이 어린 혼령들에게 말예요, 예를 들면 수백 년 이상 차이가 나는 혼령에게 자기 경험이나 그런 걸 모두 전해주기엔 많이 힘들지 않을까요? 일단 시간도 많이 걸릴 거고.”

“그렇게 생각하느냐?”

신령은 자신의 반응을 숨긴 채 대답했고, 이에 시히델은 왠지 혼나는가 싶어서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를 보면서 꾸중 대신 되묻는 말씀을 꺼내시는 신령님.

“좋아. 그러면 말해 보거라. 수백 년 이상 자신이 본 걸 말해줄 때 생기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다른 혼령들도 둘러보시는 그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이에 신령님은 다시 한 번 모두를 둘러보더니 “흠,” 기운을 살짝 일그러뜨리면서 곧 수업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순간 시히델이 “아!” 짧은 기운을 던지자 이번엔 아예 모든 혼령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에 움츠러들면서도 호기심에 약간의 자신감을 섞어, 조막만 한 기운을 흘려보내는 그녀.

“어어, 기록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어딘가에 표시를 한다든가, 다른 혼령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식으로…”

이 말에 전당이 조용해졌다. 혼령들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고, 이런 시선 속에 부끄러움과 함께 자신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음을 느끼는 시히델. 마르한마저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쳐다보는데, 순간 저 앞에서 신령님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핫,” 신령님께서 웃자 모두가 다시 그분에게 시선을 돌렸고, 신령님은 그렇게 재미있어하다가 웃음을 유지한 채 시히델을 보았다.

“좋은 질문에 좋은 대답. 좋아, 앞으로 넌 잘 봐둬야겠다. 이름이 시히델이지?”

“네? 네에!”

칭찬을 받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크게 해버린 시히델이었고,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갑자기 거대해진 것 같아 활짝 웃었다.

……

“으, 응?”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뜬 그녀. 아직 밤이었다. 혼령들은 어느새 모두 자는 중이었고, 인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 잠깐, 다들 잔다고? 다들 자는데 왜 나만 멀쩡히 있는 거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이 거대한 구덩이에 있고, 오히려 자기가 아직 해가 뜬 중에 혼자 푸념하다가 잠들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어느 사이에 슬슬 기어들어왔는지, 그녀의 옆에서 이런 바닥에 잘도 누워 자는 마르한.

시히델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바라보며, 동시에 꿈에서 본 그것이 떠올랐다. 그래, 생전 처음으로 질문을 하던 바로 그 순간. 생전 처음으로 칭찬을 받던 순간. 어쨌든 기억만은 하고 있었다. 조용히 시야를 닫은 그녀. 그러면서 한탄이 가볍게 쏟아져 나오려는 것것을 도로 삼키고는, 마르한이 아침부터 했던 말이 생각나 왠지… 좀 그랬다.

“미안.”

시히델은 나른하게 누운 그의 기운을 최대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렇게라도 사과를 하니 조금은 편해진 기분.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정말로 다들 자고 있는 풍경에서 스르르 빠져나가, 가파른 벽을 차분히 타고 올라갔다. 곧 그녀는 벽의 끝을 잡고 몸을 일으켜 구덩이 밖으로 나왔고, 이런 그녀를 달과 별, 그리고 메마른 땅이 반겨주었다.

“밤 풍경만은 좋구나, 여긴.”

혼자 중얼거린 그녀가 천천히 마른 땅 위를 가로질러 아무 방향 없이 움직였다. 애초에 원래 있던 자리는 너무 멀리 가지 않는 이상 확실히 구별이 가능해서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는 어디를 가도 마른 땅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전부 말랐고, 도저히 생물이라고는 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나무나 풀,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곤충을 제외하고는 영 살지 않을 법한 그런 곳. 이곳에서 시히델은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실로 오랜만에 '그냥 돌아다니고 싶어서' 떠도는 중이었다.

“달빛은 해가 있기에 존재하지만, 별 중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것들이 있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옛 가르침 중 하나가 생각나 마치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듯 하는 그녀였다.

“그러니, 너무 가까워서 뜨거운 해나 남에게 의지하는 달보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힘으로 살아가는 별이 더 좋을 수도–”

“누가 도와줘요!!”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시히델은 흠칫했다. “응?” 놀라서 파악을 제대로 못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소리가 전해졌다.

“아무도 없어요!? 제발 누구라도…”

순간 멍해진 시히델. 밤중에, 그것도 이 밖에서 무슨 일인 걸까? 그녀는 일단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