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이 말하는 순간 두 촛불이 한 번 확, 청록빛의 열기를 내며 높이 솟았다가 잠잠해졌다. 제이미는 물 위에서도 잘만 불탔던 저 불이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다. 막상 크기 자체는 작은 촛불인데도, 아예 주위의 일대가 활활 타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

“혼자 끝까지 남아있느라 수고했다.”

이런 제이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는 엔시나에게 조용히 말했고, 동시에 확 타올랐던 촛불이 서서히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제이미는 한숨을 내쉬었고, 엔시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런 그녀를 보며 신령은 “그런데,” 말투, 아니 전해지는 말의 느낌이 살짝 궁금해하는 투로 변했다.

“굳이 물어봐서 미안하지만, 최소한 여기 돌아왔다 다시 가기라도 하지 않고 왜 그렇게 늦게까지 남아있었느냐? 다일은 너가 인간계를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해서 그랬을 거라고 하던데.”

제이미는 엔시나가 속으로 조금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다일이 얼마나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을지 잠깐 상상하던 그녀는 곧 잡념을 끊고 입을 열었다.

“그쪽 세계에 어떤 감정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 세계든 저 세계든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고,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저는 다만 그 차이를 보다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지만 그녀가 말하면서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유는 봤다.

“아젤리아를 찾아다니기도 했겠지.”

“어?”

놀라서 흠칫하는 제이미.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마침 엔시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본 그녀였는데, 이를 저 애도 알았다는 건 혹시 남의 생각도 읽거나 할 수 있다는 걸까? 엔시나는 대답 대신 어제 자신이 란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구의 동반자인지 알았을 때를 상기시켜주었다. “아,” 혼령이나 신령들끼리 서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인 듯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저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거나 듣거나 하는게 있기는 한 거야? 제이미는 이걸 계속 옆에서 지켜보고 느끼자니 슬슬 자신도 점점 평소의 감각에서 멀어져, 아예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놈의 '영'이라는 걸로 참 별걸 다 한다고 작게 투덜댄 제이미. 어쨌든 그녀는 둘의 대화를 다시 지켜보려다가, 순간 유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가 떠올라 다시 멈칫했다. 아젤리아라면 그 셋 중 하나잖아?

엔시나는 아무 말 없이 얼굴도 몸도 그리고 마음도 앉은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이를 본 유는 자신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한숨을 내쉬는 듯, 약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그녀의 주위에서 피어올랐다.

“정말로 죽은 것이냐… 미안하구나. 애초에 그 애를 보내는게 아니었어.”

”……”

신령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말이 없는 엔시나. 한편 제이미는 마치 끓어 넘치기 직전의 물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혼령의 슬픔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저 뒤로 피해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도 슬프기까지 한 건 아니지만 당황하긴 했기에,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숨겨보려 하면서(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일단 어떻게든) 나르사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그래, 그 키리라는 애야 어차피 사람이니 오래 전에 죽었겠지. 그런데 언제나 조용하고 고고하던, 그리고 셋 중 아는 것도 가장 많았던 아젤리아… 제이미는 아직도 그녀가 한번 화나니까 부채를 휘두르며 이것저것 다 날려 버렸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사실상 그녀의 머릿속에 제대로 박힌 부분이었기에. 그런데 그 아젤리아가 죽었다니? 애초에 저쪽 사람들이 혼령을 죽일 수 있기도 하던가?

“우리도 결국 살아있는 생물이야, 제이미.”

엔시나가 친구를 결국 잃은 슬픔 속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하며 대답해줬다. 생각을 숨겨보려는 제이미의 첫 시도는 그렇게 끝난 모양. 한편 신령은 언제 일어났었는지 아까 만졌던 그 커다란 덩어리를 잡고, 아니 잡기라기보단 두 손 사이에 가볍게 띄운 채 앉으며 말했다.

“의식을 준비해야겠구나. 마침 몇몇 아이들의 성년식도 있고, 여기 제이미도 영결식이 필요할 것이니 그때 같이 해야겠다.”

“네.”

영결식?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제이미가 그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어느새 그녀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와있었다. “으왓,” 마음속에서 대놓고 슬퍼하는 혼령 때문에 저 뒤로 빠져있다 갑자기 앞으로 내세워진 그녀가 비틀거리자, 유가 곧바로 바로잡아주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녀를 똑바로 세워놓은 듯 오히려 더 중심을 잃는 결과를 낳았지만. 제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저 앞으로 고꾸라지는걸 잡아줬는데도 저 정도의 위압감이라니.

“너무 그렇게 놀라진 말거라.”

자신을 무슨 거대한 괴물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는 표정에 눈이 가늘어지는 신령. “미, 미안.” 정신을 차린 제이미는 예고도 없이 뒤로 내뺀 혼령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그녀가 저 구석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음을 알고는 그만뒀다.

“어어…”

그리고 제이미는 왠지 그 커다란, 그리고 코앞에 있으니 더 커 보이는 그 영 덩어리에 시선이 꽂혔다가, 그런 자신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는 유를 바라봤다가, 다시 그 정말로 밝은… 아니, 혹시 저거 지금 계속 커지면서 더 밝아지고 있는거야? 제이미는 그렇게 계속 눈을 위아래로 굴리다가, 이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있느냐?”

“어? 아, 아니, 그,”

분명 할 말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잊어버리고서 눈앞의 소녀(일단은 소녀니까)를 멍하니 보는 제이미. 신령은 그녀가 입만 뻐끔거리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멍청하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리고 또 입을 연 채 멍하니 있다가 물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너, 내 생각은 못읽어?”

“너는 인간이잖느냐.”

유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애초에 영을 통해서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략적인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책을 보듯이 읽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다. 너가 이 세계에 흐르는 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너희 세계의 힘과 다를 뿐 그걸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똑같아.”

“그게, 어,”

입맛을 쩝 다시는 제이미.

“내 세계… 저쪽 세계의 힘이라고 할만한 것보단 훨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긴 사람 하나 치료하는 것도 제대로 못해.”

“너가 태어나서 자란 세계다. 너무 부정적으로 여기지 말거라.”

“더이상은 아냐.”

고개를 가볍게 젓는 그녀였다. “더이상은.” 유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고, 곧 신령이 들고 있던 영 덩어리, 확실히 점점 크기가 자라고 있어서 이제는 거의 선풍기 머리만해진 그것 때문에 제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슥 빼야 했다.

“그, 그거 뭐에 쓰려고 그러는 거야?”

이쯤되니 유가 일부러 저것의 크기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유는 마치 시한폭탄이 눈앞에 있는 듯 불안해하는 그녀를 보고도 태연했다. “확대중이다.” 그녀가 말했다.

“애초에 원래는 이 마을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인 것을 이 정도로 압축해놓은 것이야. 물론 그렇게 해서 이 아이에게 해가 되거나 하진 않기에 이렇게 한 거지만, 어쨌든 크기를 조금 늘려야 이 아이가 가진 것들을 더 잘 뒤져볼 수 있다.”

저 덩어리를 아이라고 부르는 태도에 눈을 깜박인 제이미는, 유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그게 계속 커지자 “어어,” 아예 자리를 뒤로 좀 옮겼다. 그리고 신령은 이런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영에 집중하며 물어보았다.

“더이상은 아니라고 했지. 너가 사는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

“생각하기도 싫은걸 내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제이미가 얼굴을 찡그리자 유는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꼭 말로 알려줄 필요는 없다.”

“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제이미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이런 자신을 보고 유가 설명해주는 것을 들었다.

“소량이라면 모르지만, 대량의 정보를 대화로 공유하는 건 이쪽 세계에서는 비교적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다일의 말로는 저쪽 세계도 마찬가지라지만, 이쪽 또한 여러 가지 정보와 지식이 진정한 힘이지. 그러니 더 좋은 방법으로 공유할수록 우리 모두에게 더 이득인 것이다.”

말을 멈춘 유는 이젠 자신의 모습을 거의 가릴 정도로 커진 영 덩어리를 마침내 멈추고, 천천히 위로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영을 뭉친 아이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그 중에서 이 방에 있는 두 아이들의 역할은 우리 모두의 기억을 저장하고 공유하는 것이지. 분명 엔시나가 너에게 나르사의 기억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렇게 혼령들이 가진 기억들을 이 아이들과 공유해서, 그걸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이다. 모든 정보와 지식, 그리고 지혜를… 그것의 바탕이 될 누군가의 기억으로서 말야.”

“그럼,”

제이미는 신령이 그녀의 머리 위까지 떠올린 영 덩어리를 올려다봤다.

“이거랑 저거 안에…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 혼령들 기억이 다 있어? 정말 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지만,”

유가 말했다.

“거의 다 있지. 적어도 인간과 혼령이 공존할 때부터 살아온 이들의 기억은 거의 다 있다.”

“망령들은?”

제이미가 물었는데, 이때 그녀가 별 생각없이 던진 말에 유의 태도가 살짝 바뀌었다. 마치 살랑이던 바람이 갑자기 역행하는 듯, 신령의 작은 기운이 잔상을 남기며 살짝 흔들렸다. 이를 본 제이미는 자기가 못할 말을 했나 싶어 엔시나를 부르려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아젤리아에 대한 추억에 잠겨 말이 없었고–제이미는 그녀가 의외로 감성적이라는 걸 알았다–결국 유를 다시 쳐다본 순간, 그녀는 저 신령 소녀가 그 망령이란 이들에 대해 꽤나 안쓰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망령이라고 부르는 게 별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제이미. (그럴 줄 알았어. 제이미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들은… 내가 보호해주는 것이며, 도와주는 것이며 여기 사는 아이들이 누리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살아가지. 물론 자기들끼리는 여러 가지를 공유하겠지만, 그들의 방법에 대해서도 나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저들 중 지금까지 나를 직접 찾아온 것도 단 한 명 뿐이야.”

“아,”

마치 교류도 끊긴 먼 나라를 말하는 듯한 이야기. 그런데 내일 이진이 그쪽으로 간다는 건 왜 가는걸까 생각하며, 제이미는 잠시 조용히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신령이 영 덩어리를 천천히 내리면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너는 인간이지만 혼령인 엔시나를 통해서 지금 너의 기억을 이 아이와 공유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아이도 너에게 어떤 기억을 전해줄 수 있고 말야. 물론 한 쪽이 일방적으로 넘기는 것도 가능하지.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엔시나가 그동안 동반자들과 함께 겪은 모든걸 이 아이와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빨라도 며칠은 걸리겠지. 그러니 너한테는 따로 물으마, 제이미. 네 기억도 이 안에 포함되기를 원하느냐? 물론 여기 들어가는 기억들은 나 또한 보게 될 것이다. 사실 나중에 가면 여기 사는 거의 모두가 볼 것이야.”

“내 기억을 여기 주면,”

제이미는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그 거대한 덩어리를 약간 겁이 나면서도 신기해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저쪽에서 살았던 기억을 주면, 난 더이상 기억을 못하는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하지만 유는 고개를 저었고, 이에 제이미는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결국 너의 기억이다. 무슨 일이 있었든 언젠가는 네가 지나온 삶이 도움되는 날이 있을 것이야. 보다 소중히 하거라.”

왠지 낡은 고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에 제이미는 어깨만 으쓱하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내 기억도 나름 쓸모있다는 말이겠지. 맘대로 해.”

“잘 생각했다.”

유는 덩어리를 정확히 제이미와 자신의 얼굴 사이에 띄워놓고는, 천천히,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듯 자신의 힘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거대하면서도 절제된 기운이 서서히 그 영의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그것을 통과해서는 제이미의 머리로 향했다. 침을 꿀꺽 삼킨 제이미는 유의 긴장하지 말라는 말에도 저절로 몸이 떨려왔고, 곧 무언가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 마치 입시 공부를 할 때처럼 약간의 복잡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치 그녀가 술에 취해 누군가에게 막 떠들어대는 것처럼, 자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을 때의 그 시원함 비슷한 무언가가 머릿속을 감쌌고, 이런 두 감각이 서로 교차되는 속에 제이미는 갑자기 잠이 오는 듯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