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제이미에게 있어 이런 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와,”

나무가 너무 많고도 많아서 햇빛이고 달빛이고 뭐고 실오라기만큼만 간신히 들어오는 숲을 빠져나가, 제이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산이었다. 하지만 먼저 제이미의 발 밑에서부터 시작하자면, 크고 작은 돌로 장식된 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밝은 녹빛을 띈 여러 잔디와 풀이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평온하게 흔들렸고, 그렇게 땅에 피어오른 작은 털들 사이를 지나간 길은 각각 넓다란 마당으로 향했다.

“저게 집이야?”

“응.”

고개를 끄덕인 엔시나. 그리고는 신기해하는 제이미에게 인간계에도 저런 집이 있긴 있었다고 말해주는 그녀였다. 그 '저런 집'이란, 일단 넓은 마당에 큼지막한 정원석과 어두운 색깔의 항아리를 몇 개 두고서, 딱 봐도 나무로 만든 마루에 역시 나무로 만든 기둥, 나무로 만든 벽 등등 거의 대부분을 나무로 짓고서는, 그 위에 진흙을 발라놓은 집이었던 것이다. 제이미가 보기에 왠지 흙냄새가 좀 날 것도 같았지만 동시에 시원하면서도 이상하게 포근한 느낌의 그 집들은, 비록 그 지어진 방식은 같지만 집마다 제법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제이미는 눈을 깜박였다. 몇몇 집에서 아이들이 나와 놀거나 어른들의 품에 안겨 자는 모습이 뭐랄까… 따듯하게 느껴졌다.

제이미의 푸른 눈은 왠지 먼 것 같으면서도 가깝게 보이는 듯,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마을 길을 따라갔다. 마치 나그네들이 잠시 쉴 겸 누군가의 집에 들렀다 가듯, 또 중간에 만나면서 잡담을 나누듯 처음에 세 갈래로 갈라졌던 길은 각자 여러 집과 마당을 거쳐가다가 서로 이어지기도 하고, 다시 갈라지기도 하면서 산을 따라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보니 커다란 뱀 여러 마리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한 곳으로 모이는 걸로 보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나무들과 꽃, 풀들과 함께 산을 올라간 길은 그렇게 올라갈수록 점점 수가 적어지는 집들과 함께 서서히 하나로 뭉쳐서, 마침내 다시 한 길이 되었을 때는 저 높이 있는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 들어왔어. 닫아.”

한편 맨 뒤에 있던 그녀까지 다 들어오자 란이 한 마디 했고, 이를 누군가가 들은 것인지, 아니 어떤 사람도 이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갈 길만을 내려가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몰라서 주위를 둘러보던 제이미는 “위를 봐.” 엔시나의 한 마디에 무심코 고개를 올렸다가 “으왁!?” 넘어질 듯 기겁하고 말았다.

저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아니 커다랗고 작은 것들이 아주 천천히,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 천천히 쏟아지는 모습이 마치 뭐랄까, 유성우를 연상케 하는 듯 했다. 엔시나는 그렇게 겁먹은 제이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안심해, 제이미. 저건 우리를 해치거나 하는 게 아냐.”

“저,”

제이미는 움츠러든 몸을 펴긴 했지만 그것들을 유심히 보며, 대체 뭘까 하는 생각에서 물었다.

“저게 뭐야?”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저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잘 지켜보면, 마치 하나하나가 커다란 공 같았다. 물론 가장 작은 것들도 있지만 그 작은 거란 게 이미 사람 주먹만한 것이고, 큰 건 사람 머리만한 것에 심지어 저기 길에 놓인 정원석만한 것들도 있었다. 가장 가운데에는 마치 핵이 있는 것처럼 하얗게 빛나고, 그 하얀 빛이 밖으로 퍼지면서 점점 푸른 빛을 띄는, 그리고 가장자리에 가서는 청록빛 비슷하게 바뀌는 덩어리… 그래, '덩어리'라고 표현하는 게 이런걸 생전 처음 보는 제이미에게 있어 가장 적절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히 덩어리만은 아닌 것이, 뭐라고 할까, 저게 뭔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생기가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맞아.”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이미는 아무리 위험한 게 아니라고 해도, 저렇게 수백 개는 되어보이는 듯한 무언가가 이 마을 전체에 느릿느릿 내려오는 게, 저 모든게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얼른 저 앞에서 가는 란을 따라갔다. “저기,”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보는 그녀.

“저게 뭐예요?”

란은 뒤를 돌아봤다. “저거라니?” 그의 시선은 곧 여전히 겁먹은 제이미의 눈을 따라 움직였고, 곧 저걸 보며 기가 죽은 그녀가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영'이다. 정확히는 영을 인위적으로 뭉쳐놓은 것들이지.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이자 이쪽 세계의 근본이야.”

“영?”

제이미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던 란은 다시 앞을 걸어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혹시 혼령과 함께하면서 그 힘을 써본 적이 있나?”

“아,”

제이미는 어떻게 사령을 쏴 맞췄던 걸 떠올렸다. “딱 한번이요.” 이에 고개를 끄덕인 란.

“다일 말로는 저쪽 세계엔 영이 없다고 했으니, 너는 네 혼령으로부터 공유되는 영을 사용한 거야.”

눈을 동그랗게 깜박이는 제이미. 그렇게 총 따위의 것들에 흘러넣거나 하고, 다일이나 슨우 등이 마치 눈덩이 던지듯 뭉쳐서 던지거니 한 게, 그 이상한 힘이 저것들이라고? 어느새 하늘에서 다 내려와 각자 자리를 잡고 둥둥 떠다니는, 혹은 정말로 공처럼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들을 제이미는 다시 보았다. 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정말로 저것들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바람도 불지 않고 있는데 저렇게 다니고 있는걸 보면.

한편 다시 걸어가던 란은 어느새 마르한과 자리를 바꿔, 세 번째로 뒤를 돌아봤을 땐 훨씬 나긋나긋해진 얼굴이었다.

“잘 모르겠다면 하나 만져보세요.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 저걸?”

마치 살아 움직이는 벌레–모든 벌레가 다 징그러운 건 아니지만–를 만져보라고 하는 것 같아 오싹해지는 제이미였다. 이런 제이미를 보며 란처럼 재밌어졌는지 마르한은 숨죽여 웃었고, 곧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걸어갔다. “언니얘!” 한편, 이렇게 길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도중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제이미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갔던 아린과 이진이 지금 그녀가 지나치려는 집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언니얘 신령님한테 가야?”

제이미에게 달려와 같이 걸어가는 아린은 어느새 상처가 놀랄 정도로 많이 아물어있었다.

“어어… 그런 것 같아.”

별 반응 없이 묵묵히 가는 마르한 혹은 란을 흘끗 쳐다보고는 대답한 제이미. 그러자 아린은 이제보니 자기가 품에 안고 있던 그 덩어리 하나를 제이미에게 내밀었다. “여기얘.” 방긋 웃는 아린은 마치 여행가는 가족에게 간식거리를 내미는 아이 같았다.

“이걸로 언니도 치료하고 다시 오면 되야.”

“치료?”

이걸로 치료도 해? 아, 생각해보니 이진도 슨우도 그런걸 했던가. 제이미는 그러나 여전히 꺼림칙한 것을 어떻게 감추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다가, 그래도 얘가 이상한걸 내밀 리는 없다는 사실에 천천히, 그 청록빛의 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엇” 마치 미지근하면서도 살짝 따듯한 물에 손을 대듯, 묘한 따듯함 같은 것과 생전 처음 느껴보는 촉감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니, 그렇게 이 영 덩어리–그녀는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 손을 대면서 생각하다보니 곧바로 짐작이 가는 그녀였다. 바로 자신 혹은 엔시나가 그 영이라는 힘을 다루면서 느껴젔던 게 지금 이걸 만짐으로써 피부로, 촉감으로 느껴지는 그런 것. 마치 부화 직전의 알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따 보얘.”

어떻게 그것을 천천히 손으로 잡으며, 그 생소하면서도 미지근한 따듯함에 정신이 팔려있을 즈음 아린은 제이미에게 말하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제이미도 손을 흔들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며, 그러면서 옆에 난 식물들–그 중에는 생전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엔시나 또한 이 세계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있다고 말해줬다–을 둘러보며, 또 여러 크고 작은 집들, 이젠 대부분이 저 밑에 있는 것들을 둘러보며, 손으로는 그 영 덩어리를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툭툭 쳐보거나 쿡 찔러보기도 하는 등 마치 아기가 공 가지고 놀듯 이리저리 뜯어보는 제이미. 그러다가 어느새 마지막 집, 아니 집이라고 하기에는 작아서 사람이 혼자 사는 집이거나 그냥 저 위의 어딘가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 같아 보이지만 어쨌든 그곳을 지나가며 제이미는 고개를 올렸다.

“저긴 누가 살아요?”

“내 집이지.”

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신관의 거처다.”

그리고 역시 짤막하게 더 설명하는 그를 제이미는 조금 불편하게 여기며, 차라리 저 마르한이라는 신령이 계속 얘기해주면 나을 거라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혼령들이 죄다 엔시나같진 않다는 생각에(“제이미…”)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신관이 머무른다는 그곳을 지나 마침내,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자 제이미는 마치 떨어뜨리면 깨지기라도 할 듯 두 손에 살짝 쥐고 있는 그 영 덩어리를 든 채, 이제보니 그걸 들기 시작한 때부터 절뚝거리기는커녕 오히려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한 다리를 움직여 란이 멈춰선 곳까지 다다랐다.

“다 왔어.”

란은 더 안내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들어가서 기다리면 신령님께서 오실 거다. 괜히 부담 가질 필요는 없으니 편히 있어라.”

“네에.”

제이미는 더이상 앞으로 가지 않는 란을 두고 길을 마저 걸어갔다. “고마워요.” 한 마디 남기고는 길의 끝에 들어선 제이미는 란이 걸어서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의 등을 조금 불만스럽게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이 걸어오른 산과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와,” 꽤 좋은 경치였다. 숲을 막 나왔을때 봤던 그것이 위에서 바라보니 아기자기하게 보이면서 더 아늑한 느낌이 들었고, 한편 그녀가 지나온 숲도 작게 보이면서 저렇게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그녀를 놀랍게 했다. 확실히 그녀는 정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어쨌든 사람 사는 동네같긴 하네.”

저 밑에서 아이들이 크고 작은 영 덩어리들을 가지고 노는걸 보면서 제이미가 중얼거리자 엔시나가 조용히 웃었다. 제이미는 다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다만 하늘은 자신이 살던 곳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아니 훨씬 더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뭐 구름도 있겠다 별도 있겠다–갑자기 드는 생각이지만 저 별도 혹시 커다란 영 덩어리가 아닐까?–달은… 아, 저기 있구나. 제이미는 뒤돌아서서, 자신의 세계에서 보이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랗고, 하늘이 깨끗해서인지 약간 푸르면서도 은빛을 띄는 달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올려다봤다. 아주 크고, 밝고, 마치 보는 사람을 감싸면서도 끌어당기는 듯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제 가야지, 제이미.”

이렇게 주위를 계속 둘러보는 그녀에게 엔시나가 말했고, 이에 제이미는 “응.” 구경을 멈추고 발을 움직였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이 영 덩어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으니 상처들이 저절로 아물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기로 쓰기도 하고 치유도 하는 힘이라고? 제이미는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엔시나의 말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졌다.

마을을 넘어 산을 올라가, 실은 이 산이 커다랗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턱보다 좀 밑에 있지만 제법 높이 올라온 제이미. 그리고 이런 그녀가 마침내 조금은 평평해진 길을 밟았을 때, 그녀의 앞에 보이는 건 커다란 돌 덩어리들. 그것도 저 밑에서와는 달리 좀더 새하얗게 빛나는 것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물?” 제이미의 눈앞에 보이는 건 푸르고 잔잔한 수면이었다.

“연못 아냐?”

제이미가 눈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