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모든 것이 새파랗게 불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무심하게 지켜보듯 그저 매정하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온 세상이 하얗고 파랗게 변한 것처럼 그 불길 속에 잠겨, 안에서 점점 새까맣게 물들던 나무 기둥은 결국 쩌억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붕을 덮고 있던 것들은 짚이고 진흙이고 너나할 것 없이 하나같이 열기 속에 오그라들고 있었고, 심지어 커다란 바위들마저 예사 불이 아닌 그것 속에서 서서히 가루가 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자란 나무와 풀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 비정상적인 화재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동물들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났거나 몸에 불이 붙은 채 울부짖으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싫어. 이를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거 싫어. 무자비한 불길을 보며 애원하듯 하는 그녀였으나 저 창백하고 퍼런 불길이 단순히 한 누군가의 의지만으로 꺼질 리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불길이 아직 닿지 않은 쪽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서로에게 빨리 뛰라고 재촉할 틈도 없이 그저 발만 움직이는 모습. 단 1초라도 더 먼저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는 이들을 보며 그녀는 온 정신이 떨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무나 싫고, 끔찍하고, 무섭고, 너무나 싫고, 싫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되는 거였다. 그런데 어째서,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묻고 또 물으며, 그런 중에도 저렇게 퍼져가는 불길을 어찌할 수 없이 보며 속으로 울고 있었다. 저 불은 멈춰야만 한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두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애원하기 시작했다. 누가 도와줘. 누구든 상관없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빌고, 몸부림치며 빌고, 울면서,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며 또 빌기만 하는 그녀였다.

한편 이런 그녀의 기도가 통한 것인지, 아니면 통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는 저 앞에 누군가가 오고 있음을 알았다. 모두가 죽어가거나 도망치는 상황에서, 불이 가장 먼저 번지기 시작한 저 윗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하얗고 파란 불 사이로 걸어오며, 지금 더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 누군가를 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듯한 모습. 굉장히 강력한 힘을 숨긴 채 불길 사이로 걸어온 그는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목소리도, 다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그를 아득히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가 잠시 뒤 천천히 팔을 들어, 그 안에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낼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잠깐, 그녀는 몸서리를 쳤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손에서 모아지던 작은 힘은 점점 폭발적인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힘을 모을 동안 무엇도 할 수 없었고,

콰앙!

“아아앗–”

갑자기 온몸이 불덩이에 던져지듯, 정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는 순간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으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불길도, 죽어가는 나무와 풀, 동물들도, 겁에 질린 채 도망가는 인간이나 혼령도 무엇도 없었다. 꿈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방금 본 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흠칫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 일 없다.”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를 다잡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놀란 기운은 진정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이 본 것들을 떠올려봤다. 도저히 꿈이라 여기며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정상적이고 또 너무나… '위험한', 그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이어서 곧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려는 걸까,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죽일 힘을 가지고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딘가가 찬물에 빠진 것처럼 차갑고, 불안정했다.

“깨워서 미안하구나. 어서 자거라.”

그녀는 일단 자신을 지켜보는 쪽에 대고 말했으나, 그런 자신은 그날 아침이 될 때까지 자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달빛 아래에서 노는 건 언제나 새롭고 즐거웠다.

단순히 저 은은한 빛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온 세상이 나이고 내가 바로 이 세상인 듯한 느낌에 잠겨, 그렇게 감도는 빛 속에서 몇 번이고 자신을 치유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언제부터였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소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분명 어느 산의 중턱일 것이었다.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은처럼 하얗고 밝게 빛나는 돌들이 깔려있는 위에, 몇 개의 기둥 너머 지금 소년이 서있는 발판으로 향하는 계단. 온통 저 달빛과도 같은 빛을 내는 이곳에서 소년은 어느날 눈을 떴고, 이후 자신을 환영해주는 달빛과 별빛 아래에서 얌전히 지낸 게 다였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저 밤하늘의 빛은 언제나 그랬지만 소년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몰랐다. 그냥 이 아래에 있으면 저 달과 별들이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거나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리면서, 소년이 무언가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듯, 분명히 은백색이어야할 빛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소년은 저렇게 빛이 무엇을 전해주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신도 저 크고 작은 친구들에게 답해주기 위해 가만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이거나 미소짓는 등의 행동을 이따금씩 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걸로는 저 빛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바였기에 소년은 언제부터인가 점점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빠져들었다.

하다못해 최근에는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이곳에서는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라고 할까. 며칠 전부터 소년은 이따금씩 그가 눈을 뜬 곳 바깥으로 시선이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소년은 지금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눈을 뜨기 전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는 게 없었다.

”……”

소년은 마치 무언가에 끌리듯, 그러나 이런 자신을 경계하면서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저 끝자락으로 발을 옮겼다. 이런 소년의 뒤에서는 아무런 바람도 무엇도 살랑이지 않았고, 때문에 저 무성한 녹빛으로 다가가는 소년에게 더 겁을 주었다. 저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생각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언제나 소년을 맞이해주고 환영해주는 저 달빛과 별빛들이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밝은 은백색이 소년의 몸을 넘어 소년이란 존재 자체를 비추는 것 같았으나, 이 빛은 전혀 소년을 이 돌바닥 위에 고정시키는, 혹은 가지 말라고 잡아끄는 빛이 아니었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소년은 달빛 그리고 별빛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저 산 아래를 바라보고, 또다시 시선을 저 하늘로 옮겼다가 다시 반대로 가고,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우물과 그 밖의 경계선에서 몇 번이고 주저했다. 마치 이렇게 주저하기만 하다가 평생을 갈 것처럼.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고, 아니, 애초에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이 오늘 이 순간만큼은 소년의 마음 속 한 구석에 작은 촛불을 키듯 서서히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소년은 천천히 앞으로 움직여 보았다. 아주 조금 움직이는 순간 그 웅장하면서도 자애로운 빛은 갑자기 멀어지고 저 산속의 흙과 잎이 어우러진 맑고도 속이 꽉 찬 향, 그리고 알 수 없는 잎사귀들의 어른거림이 소년의 눈앞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는 소년. 달빛과 얘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세상 어떤 것이든 영원히 친구일 수는 없는 걸까. 소년은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고, 어느새 수많은 흙과 향기가 그를 감싸고 있을 때에는 마침내 새하얀 돌바닥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였다. 소년은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움직였다.

Soulmate, 2부 : 달맞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