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잘먹었습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동시에 탁 내려놓은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마크윈이 그녀를 올려다봤고, 이어서

 

“좀 더 먹어야 하지 않겠니?”

 

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제이미는 “다 먹었어요.” 고개만 젓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에 아린만이 남아서 슬슬 그의 눈치를 보다가 “자, 잘 먹었으얘.” 얼른 일어나서 후다닥 제이미를 쫓아갔다.

곧 식탁에는 마크윈 혼자 앉아, 그러나 역시 그 또한 별로 입에 뭘 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부녀의 식사가 끝났다. 제이미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제이미,”

 

방문이 닫히자마자 오늘 내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엔시나가 말을 건넸으나, 제이미의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나 잔다. 말 걸지 마.”

 

”……”

 

엔시나도 지금같은 상태의 제이미에겐 뭐라고 할 말이 없는지 조용해졌고, 잠시 뒤에서야 “잘 자.”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제이미의 옆에는 옷이나 기타 여러가지 챙겨놓은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걸 가만히 보던 제이미는 고개를 저으며

 

“그 꿈이나 더 보여주든지. 어쨌든 딴 소리는 하지 마.”

 

다시 간단한 말로 끝내 버렸다. “응.” 엔시나 또한 길게 말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는 아린만이 유일하게

 

“언니 아빠얘 왠지 언니 걱정 많이 하고 있으야. 혹시 나 때문에 그러얘?”

 

안중에도 없는 걱정을 꺼낼 뿐이었다. “아냐.” 제이미는 그래도 별 관련 없는 애한테만은 애써 웃어 보였고, 곧 “나 잘게.” 침대에 엎어지면서 한 마디 남기고는 그대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너도 빨리 자.” 그녀가 말했다.

 

“으야.”

 

아린은 제이미가 자기 아빠랑 뭔 얘기를 했는지, 아니면 원래 저런 사람인지 오늘 내내 별 말도 없이 조용히 있다가, 그렇게 잘 시간도 안됐는데 저녁 먹자마자 드러눕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지?” 리니아 또한 그랬다.

그녀는 왠지 집안에서 발견한 작고 동그란 구슬 비슷한 것–아마 '탁구공'이라고 했던가–를 바닥에 타닥타닥 튕기면서, 저렇게 침대에 누워서는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바로 잠들었는지 아무 움직임이 없는,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오늘 하루 내내 그냥 잠만 자고 싶었던 것 같은 제이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불을 덮은 제이미의 등이 그녀의 입 대신 대답해줄 리 없었고, 아린은 퓨우 한숨을 내쉬며 탁구공을 만지작거리는데,

 

“후우,”

 

그러다 몇분쯤 지난 걸까,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아니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건지 제이미가 도로 일어났다. “우야?” 아린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미를 보고 흠칫,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감정부터 너무 앞서는 애라니까.”

 

작게 투덜거리는 것부터 제이미의 그것이 아닌, 아주 조용하면서도 제법 무게가 있는 온풍이 감돌듯 하는 억양이 묻어났다.

제이미의 약간 날카로운 눈모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법 온화해진 느낌과 함께 푸른 눈빛은 오히려 더 강해져, 평소 제이미의 눈이 바다를 연상시켰다면 지금 그녀의 눈은 그 아래, 제법 깊은 곳에서 아른거리는 물결을 떠올리게 했다.

두 입술도 평소의 그녀와는 달리 아주 가지런히 모여 있었고, 흐트러져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는 모습 또한, 저게 제이미 앨리슨일 리가 없다는 느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모습이 아린의 눈에 들어왔다. “으야,” 입을 여는 아린.

 

“그럼 언니야가 그 엔시나얘?”

 

“그래.”

 

제이미의 모습,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그녀의 몸으로 움직이는 엔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미는 지금 자고 있으니 놔두고, 나도 곧 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어서 그녀는 “잠깐만,” 하고 아린을 비키게 하더니, 그녀 뒤의 의자에 앉아서는 왼쪽 밑에 있는 무언가를 꾹 눌렀다.

아린은 엔시나가 누른 동그란 단추 같은 것, 그리고 그게 달려있는 네모난 어떤 물건과 그 뒤로 연결된 선들,

한두 가닥도 아니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위로 올라가는 선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거 무얘?” 아린이 물었다.

 

”'컴퓨터'라는 거야. 이쪽 세계의, 음, 그러니까 다용도 기계의 일종이야.”

 

“기계?”

 

“그런게 있어.”

 

비록 제이미보다는 훨씬 더 얌전한 느낌이었으나, 엔시나 또한 지금은 급한 일이 있는지 아린의 대답을 빨리빨리 받아넘겼고, 이를 대충 눈치챈 리니아는 일단 아린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자신 또한 그녀의 시선을 통해 엔시나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사실 엔시나가 하는 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냥 아린의 시선으로만 지켜봐도, 그녀는 그저 책상 위의 어떤 네모난, 그 '컴퓨터'라는 것의 일부인 듯한 무언가가 검은 상태에서 갑자기 색색의 화면으로 바뀌고, 그러자마자 엔시나가 기다렸다는 듯, 제이미의 가느다란 손으로 다른 '기계'처럼 보이는 것 위에서 손장난을 치는 모습. 다만 이렇게 그녀가 손장난을 치는 거에 박자라도 맞추듯, 저 색색의 화면 안에서 다시 검은색의 무언가가 나타난 뒤, 무슨 글씨처럼 보이는 게 휙휙 지나가면서, 그러다가 잠시 뒤 “됐다.” 하고 한 번 탁 누르자, 갑자기 모든 게 정리되었다.

 

“만일을 위해서야. 분명 너희 오빠가 다일의 동반자라고 했지?”

 

“야아.”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엔시나는 “잘 됐어.”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미소를 짓는 모습 또한 제이미와는 달라보였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너라서 다행이야. 그럼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거 잘 기억해둬.”

 

그리고 엔시나는 이어서 아린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뒤, 서로 고개를 맞댄 상태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

 

…..

 

….

 

 

..

 

.

 

 

 

 

“그래서,”

 

지도를 펼쳐든 나르사가 말했다.

 

“이게 이쪽 세계의 모습이야?”

 

그리고는 지도에 그려진 크고 작은 땅덩어리, 아니 '국가'들과 이 세계의 대분을 차지하는 바다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이따금씩 특이한 걸 발견할 때마다 “신기하네.” 를 연발하는 그녀였다. 한편 그 옆에서 슨우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곧 저쪽에서 무언가 하얀 게 잔뜩 쌓인 그릇을 가져오는 키리를 보고 “그건 뭐야?”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마시멜로'라고 하는 건데, 꽤 달아. 맛있어. 슨우랑 나르사도 먹어봐.”

 

곧 나르사의 옆에 얌전히 앉으며 탁상에 그릇을 내려놓은 키리. “응?” 나르사는 먹을 게 보이자 일단 하나를 휙 입에 던져넣고는, 몇 번 씹어보면서 “달아.” 한 마디 하더니 곧 “너무 달잖아.” 하고는 그대로 옆에다가 툭 뱉어 버렸다. “나르사,” 이에 슨우가 얼굴을 좀 찡그리자 나르사는 “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다시 지도를 들여다봤고, 그 마시멜로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던 키리는 “뭐 생각해?” 잠시 나르사를 노려보다 곧 다시 혼자 조용해진 슨우에게 물었다.

 

“잠시,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슨우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자 키리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 나르사에게 고개를 돌렸고, 계속 지도만 보는 그녀에게 “나르사,” 하며 팔을 흔들자, 그녀는 “응?” 친구와 눈을 마주하고는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왜 자신을 보는지, 고개를 돌려 지나치리만큼 조용한 남정네를 쳐다봤다. “야,” 가볍게 말을 꺼낸 그녀.

 

“넌 뭘 그렇게 혼자 심각하게 그래? 먹고 잘 곳도 얻었겠다, 비밀 지킨다고 약속도 했겠다, 또 뭐 남았어?”

 

“그렇게 이것저것 다 얻었으니까 이상한 거야.”

 

슨우가 조용히 대답하자 나르사와 키리는 서로를 쳐다봤고, 그러다 나르사가 먼저 슨우를 다시 바라보았다. “뭐가?” 그녀가 물었다.

 

“생각좀 해봐, 나르사.”

 

제법 따끔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나르사는 빤히 쳐다봤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가 말했다.

 

“내가 만일 저들이었다면 둘 중 하나야. 정신병자 취급하거나 사람을 시켜 감시를 붙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분명 저들에게 우리 능력까지 보여줬어, 안 그래? 저 무슨… 의원들이라는 사람들 말야.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사람한테도. 그러니까 전자는 아니겠지.”

 

“응, 그래.”

 

맛없다면서 툭 뱉었던 마시멜로를 어느새 입안 가득 넣은 채 나르사가 대답했다.

 

“그런데 그개 왜? 저 사람들은 우리한테 이렇게 눌러살 곳도 주고, 옷도 줬잖아. 좋은 사람들이라고.”

 

“아니,” 키리가 끼어들었다. “슨우는 그래서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이에 슨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쪽과 이쪽 세계의 교류를 위해 왔어. 그런데 일반 시민들한테는 비밀로 하라는 것부터 뭔가 아냐.”

 

“그냥 좀 기다려.”

 

나르사의 눈에는 그가 무슨 위기감이라도 조장하려는 것처럼 보여, 모처럼 편히 쉬는데 저렇게 쓸데없이 나서려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어째 조용한 엔시나에게 의견도 묻지 않은 채, 그녀는 주방처럼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뭔 자기 생각대로 안 됐다고 저러고 난리야. 쓸데없이 진지해가지고…”

 

다행히 주방에 있는 기구들 중 몇가지(칼을 포함해서)는 그녀가 살던 세계와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밥 해먹는 건 그나마 수월하겠지 싶어 일단 마시멜로부터 삼키며 무언가 식재료가 될만한 것을 찾는데,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잠까–”

 

“지나쳐.”

 

엔시나가 얼른 말하면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녀의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못본 척 해.” 이 말에 나르사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다시 식재료를 찾는 척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 저기 천장에 조그맣게 달려있는 건 분명,

 

“아니 그러니까 발뺌할 수가 없는게, 당신들 그렇게 난리치는게 저기 카메라에 다 찍혔단 말예요.”

 

“카메라?”

 

“아, 그게 그런 장치였구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오고간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스쳤고, 이어서 그녀가 그 골목에서 본 조그마한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상기시켜주는 엔시나 또한 그녀처럼 약간 당황한 눈치였으나, 단지 슨우가 얘기할 때 조용했을 뿐 어느 정도는 가능성을 생각해두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여기서 말해야겠어.” 그녀가 말했다.

 

“이따가 저 둘한테 교감으로 얘기해.”

 

“으응.”

 

그녀는 식칼을 이제서야 찾은 척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

 

 

 

 

“알았지?”

 

엔시나가 다시 한 번 일러주자 아린은 “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어쨌든 확실히 외운 것 같았기에 엔시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럼 이만 잘게.” 이어서 아린에게도 어서 자라고 하는 그녀였고, 아린은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곧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래도 엔시나는 그 언니처럼 까칠하진 않아서 다행이예.”

 

아린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이미의 입으로 미소를 짓는 엔시나. “아니,” 그녀가 말했다.

 

“그 애도 너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은 아냐.”

 

이어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 채, 그녀는 잠에 들었다.

 

“다만 앞으로 힘든게 많아지겠지… 많이 슬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