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는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오는 여성이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임을 한눈에 알았다. 

귀신과 직간접적으로 연이 닿는 사람의 얼굴엔 특별한 표식이 남는다.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 눈 밑으로 푸르스름한 그늘이 보인다. 진기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여자는 경계의 눈빛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다가와 앉았다.

"조은서 씨…맞으시죠?"

여자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동공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진짜 나오셨네요. 장난이 아닐까 걱정도 했었는데… 사실 이렇게 의뢰를 받고 나와도 허탕 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진기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헛헛 웃었지만, 여자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귀신을 퇴치하실 수 있으신가요?"

"뭐 확답은 못 드려도 사기 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꽤 젊으시네요. 이런 일 하시는 분들 대부분… "

"네 뭐.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떤 일을 겪으시는지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요?"

"그보다, 비용은 얼마나 들죠? 비싸지 않나요?"

"퇴치 후 오십 정도 주시면 됩니다. 퇴치를 못 하면 물론 안 받을 거고요."

은서는 진기가 건넨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에겐 3년 전 자살로 죽은 언니가 있었다.
언니 은지는 은서가 공부로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은지는 부모의 사랑을 노력으로 보답했다. 적어도 초등 학생 때 까지 은지는 집안의 기대를 독점하던 행복한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도 엄연한 재능이 존재하는 법. 은서는 언니보다 그 재능을 더 받고 태어난 게 확실했다. 언니가 주변에서 우등생이란 말을 들을 때, 동생은 천재라는 소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부모의 기대와 관심은 서서히 은서에게로 옮아가더니, 은지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녀는 착한 딸이란 타이틀조차 잃고 관심의 울타리에서 멀찌감치 밀려났다. 은지는 부모의 관심을 되찾기 위해 비뚤어진 행동을 했고, 그럴수록 부모는 냉대와 비난으로 응답했다.

그쯤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부모는 은서의 학구열을 높이는데 은지의 인격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녀는 늘 실패의 좋은 예가 되었고, 은서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한 들러리가 되어야 했다. 고등 학생 때 은서는 이미 인생의 낙오자였다.

'동생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퍽이나 많은 시간 부모 못지않게 동생을 원망했을 것이다. 은서는 언니가 가엾게 보였지만,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도 언니의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려웠다. 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언니처럼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부모가 가리키는 곳만 열심히 쫓았다.

평범한 저녁이었다. 아빠는 말없이 뉴스를 보고 엄마는 식사 후 먹을 사과를 깎았다. 물 끓는 소리에 엄마는 깎던 사과를 은지에게 건네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려놓은 은지가 사과를 깎았다. 멀거니 텔레비전을 보던 아버지가 그녀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는 고등학생이나 되는 애가 사과도 하나 제대로 못 깎냐? 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사과를 깎던 은지가 아빠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학교에서 사과 깎는 거 안 가르쳐 주거든? 안 배운 걸 어떻게 잘해?"

"니 동생은 안 가르쳐줘도 뭐든 잘 하더라."

주방에서 농담이라고 거든 엄마의 말이 은지의 억눌렸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는 속살이 푹푹 깎여 나가도록 거칠게 사과를 깎다가 엄지손가락에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곧 손가락 위로 붉은 피가 송송 배어 올랐다. 피를 보자 서러움이 울대를 타고 왈칵 올라왔다.

"맨날 은서 은서. 나는 사람도 아니야?"

"언니 피나. 손 베인 거야?"

"됐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서가 다가가자 은지가 소리치며 팔을 휘둘렀다. 그녀는 잊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칼이 들렸다는 것을. 은서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년이 미쳤나!"

벌떡 일어난 아버지가 달려와 다짜고짜 은지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곧장 은서를 안아 세우면서 다치지 않았는지 살폈다. 은서는 매우 놀랐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은지에게 빽 소리쳤다.

"너 미쳤어? 어디다 칼을 휘둘러! 동생 다쳤으면 어떡할뻔했어?"

"엄마. 그게 아니고…."

"잘하는 게 없으면 피해나 주지 말아야지. 은서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아빠가 눈을 부라리며 죽일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뺨이 벌겋게 익은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마룻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았다. 엄마도 아빠도 분명 자신을 보고 있는데…
'내가 다친 건 보이지 않는 건가? 이렇게 피가 흐르는데…'
그녀는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지금 죽여. 나 같은 거 살아서 뭐해. 지금 죽이라고!"

"뭐라고? 이게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빠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오자 은지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칼을 치켜들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 칼 안 내려놔?"

"이럴 거면 날 왜 낳은 거야? 내가 싫어? 없었으면 좋겠어?"

"이게 뭘 잘했다고"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다.
칼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아빠를 피해 뒤로 물러서던 은지는 갑자기 몸을 돌려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부모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녀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짧은 순간 은서와 은지의 눈이 마주쳤다.

"안돼 언니!"

"언니는 그대로 몸을 던졌어요. 정말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죠. 언니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도 부모님과 저는 한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때를 기억하는지 은서는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니가 죽고 난 후 부모님은 죄책감에 괴로워하셨어요. 모질게 대하긴 했어도 설마 딸이 그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에요. 그날 이후 우리 집에 웃음은 완전히 사라졌죠. 제 분발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그게 더 언니를 상기시키는지 두 분은 날이 갈수록 자책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셨어요. 저는 그런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어요."

묵묵히 은서의 이야기를 듣던 진기는 얼굴도 모르는 은지의 죽음이 가여웠다. 그렇게 복수를 한 그녀는 맻혔던 한을 다 풀었을까? 아니. 풀었다면 귀신으로 나타나는 일 따위 없었겠지.

"대학을 들어가서도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버지가 소원하던 판사가 되면 그 지긋지긋한 언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사법시험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시험을 얼마 남겨두지않고 죽은 언니가 나타났어요. 언니는 저를 집요하게 괴롭혔어요. 시험이요? 보시다시피 보기 좋게 낙방을 했고요. 다음 해도 또 다음도 시험 때가 되면 나타나 베란다에서 봤던 그 눈빛으로 절 물끄러미 바라봐요. 

부모님과 함께 굿도 여러 번 해보고 교회든 절이든 안가 본데가 없어요. 하지만 소용이 없어요. 시험만 다가오면 좀비처럼 나타나 저를 괴롭혀요. 이제 시험도 올해가 마지막이고요. 어떻게든 꼭 붙어야만 하는데…"

진기는 은서와 함께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고시생의 방이라 그런지 실내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하나 없이 딱딱하고 묵직한 책들로 가득했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일까. 대낮에도 단단하게 내려온 버티컬 때문에 실내는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그녀의 말대로 진기는 그곳에서 사람이 아닌 기운을 느꼈다. 먼저 그는 휴대폰을 꺼내 강건웅 형사에게 문자를 날렸다.

[진기·연암동 42 00 아파트 702호. 14시 개시]

남전에서의 사건 이후, 찬수는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여 진기가 일을 할 때 강 형사에게 문자를 보내도록 당부했다. 일을 마치면 확인 문자도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최소한 그때처럼 위험천만한 상황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기 전 바로 답신이 왔다.

[OK. 수고]

진기는 은서를 앉으라고 손짓하고 배낭에서 여러 장의 결계부적을 꺼내 현관문과 벽 네 방위에 붙였다. 귀신이 낌새를 느꼈을 때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이미 여러 차례 귀신을 보신 분이니 나타난다고 놀라고 하진 않으시겠죠? 어떤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마시고, 일을 마칠 때까지 제가 드린 수호구를 꼭 쥐고 계셔야 합니다. 하실 수 있죠?"

은서는 바통처럼 생긴 수호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는 손바닥에 특별한 표식을 그려넣고 엄지를 말아쥐었다.
준비는 끝났다. 숨을 크게 들이킨 후 진기가 입을 열었다.

"거기 숨어 있는 거 다 알아. 어서 나와라."

숨바꼭질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책장 뒤편에서 여고생 모습의 은지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녀의 등장을 예상했지만, 너무 태연자약하게 나타나는 모습에 은서는 헉- 숨 멎는 소리를 냈다. 진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은지라고 했나? 딱한 사정 이야기는 다 들었다. 하지만 이런 짓을 한다고 네 원한이 풀리는 게 아니야. 동생 그만 괴롭히고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나쁜 년. 나를 그렇게 죽게 만들고 다시 나를 죽이려 사람을 불러?"

은지는 진기를 무시한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은서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내가 왜 언니를 죽게 만들었는데? 언니가 자살해서 힘든 게 도대체 누군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감정이 북받친 것인가 은서가 울먹이며 귀신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은서 씨. 조용히 해요! 말려들지 말라고."

"내가 죽은 게 너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왜 내가 힘들 때 한 번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지? 솔직히 너도 내가 망가져 가는걸 은근히 즐겼잖아?"

"어렸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했어? 언니는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나 해?"

진기는 뭔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설득하여 조용히 보내긴 틀렸다. 그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가슴 속 지옥문을 열었다. 귀신은 진기의 가슴으로 빨려들지 않으려고 괴성을 지르며 버텼다. 그 와중에도 동생의 힐난을 멈추지 않았다.

"너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우리 가족은 행복했을 거야!. 네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야. 너도 나처럼 자살하게 될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만들겠어!"

"죽어버려! 이 나쁜 년아!"

은서는 빽 소리를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수호구를 은지의 얼굴에 던졌다.

'아뿔싸!'
진기가 눈을 떴을 때 귀신은 은서의 몸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그녀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기서 떨어져!" 

진기가 눈을 부라리며 은서를 잡고 흔들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귀신의 형체가 출렁출렁 은서의 몸 밖으로 밀려 나왔다. 은서의 눈이 허옇게 돌아가더니 진기를 거세게 밀치고 현관 쪽으로 달아났다. 진기는 몸을 날려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녀의 손톱에 걸린 결계 부적이 맥없이 찢어졌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고음과 함께 귀신이 은서의 몸을 빠져나와 문밖으로 달아났다. 은서는 넘어진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느라 눈을 끔벅였다.

"큰일 났군. 언니가 달아난 것 같아요."

"어떡하죠? 다시 돌아오지 않겠죠?"

"다시 올 겁니다."

절망스러운 은서의 얼굴을 뒤로하고 그는 빠르게 복도로 나갔다. 한낮 복도는 적막했다. 어디로 달아났을까.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진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만난 귀신은 은서가 말한 언니의 원혼이 아닌 것 같았다. 귀신의 표독스러움에 원한보다 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찬수 어르신이 말씀하시던 자원령일지 모른다. 강렬한 원망을 품고 사는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산다는 악령. 어쨌든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있는 놈이라면 상당히 위험하다. 체념하고 은서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복도에서 기괴한 신음이 들렸다. 맞은편 705호의 문이 15도쯤 열려있고 소리는 거기서 흘러나왔다.
진기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가가 열린 705호 문을 노크했다. 신음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대답은 없었다. 사람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진기는 주저할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거기…괜찮으세요?"

진기는 열린 문틈으로 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진기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꺼풀을 크게 깜박였다. 들어선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유리창에 은지… 아니 이젠 은지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린 악령이 신음하며 납작 눌어붙어있었다. 어마어마한 힘에 눌리듯 악령의 형체는 심하게 일그러진 채 버둥거렸다.

"어찌 감히!"

두뇌를 공명하는 울림에 진기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는 보았다. 유리에 달라붙은 벽을 마주 보고 눈에서 희뿌연 섬광을 내는 여고생이 서 있는 것을. 머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여고생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악령은 달아나려고 필사적이었지만,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가열된 타르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카아아악' 가래가 끓는듯한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악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진기는 가슴이 화끈거렸다. 당황스러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가슴 한복판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부옇게 올라왔다. 진기는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의 문장을 재빨리 지웠다. 하지만 가슴의 울림은 점점 커졌다.

'지옥문이 공명하고 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현상에 진기는 어찌할 줄 모른 채 여고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 갈빗대가 활짝 열리듯 안으로부터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며 온몸을 흔들었다. 동시에 여고생도 몸이 크게 출렁였다. 눈을 두세 번 깜빡였나? 그녀는 평범한 소녀로 돌아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기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빛과 진동은 온데간데없었다. 목덜미를 타고 굵은 땀이 흘렀다.

"누구…. 세요?"

"아… 그게… "

낯선 이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듯 여고생은 한 손으로 몸을 가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기는 그녀의 표정에서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먼저 읽었다.

"아. 미안해 겁내지 마. 나쁜 사람 아니야."

"…… "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문도 열려있고… 혹시 나쁜 일이라도 있을까 봐. 그보다… 학생 괜찮아?"

"아… 아? 네 괜찮아요."

"그런데 학생… 혹시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기억이 나?"

"이상해요. 정말 이상한데…."

여고생의 얼굴이 옅은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진기에게 가깝게 와서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기가 몸을 살짝 상체를 뒤로 물리자, 자신이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억이 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기억이 나지? 그리고 아저씨 가슴에서 나던 그 빛…"

"아. 그게 보였어? 학생 혹시 귀신… 아 미안."

귀신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옥의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았다!

"어떻게 하신 거지? 신이 빛을 피했어."
여고생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아까 소멸된 귀신도 봤겠네. 그거…혹시 학생이 한 거야?"

"네? 네. 그렇긴 한데… "

그때 문이 왈칵 열리며 건달처럼 보이는 사내 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진기를 발견하고 다짜고짜 다가와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이 새끼 뭐 하는 놈이야?"

"아니, 당신들은 누군데…컥컥"

"아저씨! 뭐 하는 거예요? 놔요. 이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에요."

소녀가 달려들어 사내들의 멱살 쥔 팔을 거칠게 뜯어냈다.

"뭐야. 명기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 아는 사람은 아닌데…"

사내들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자 명기는 다급하게 둘러댔다.

"열린 문틈으로 쥐가 들어와서 비명을 질렀거든요. 지나가던 저 아저씨가 놀라서 도와주려고 들어온 거에요."

진기는 구겨진 옷을 털며 불쾌한 표정으로 사내들을 바라봤다.

"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자애 혼자 있는 집에 함부로 들어오고 그럼 어쩝니까?"

건달 체면에 사과는 못 하겠던지, 역정으로 미안함을 퉁친다.

"용건 끝났으면 얼른 가슈." 

건장한 사내가 진기의 등을 툭 밀었다. 진기는 떨떠름한 얼굴로 명기를 본 705호를 나왔다. 복도를 따라 열린 문틈으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이웃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는 은서의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명기라고 했던가?'
진기의 머릿속에 악령과의 싸움은 이미 사라지고 명기와 기묘한 만남으로 어지러웠다.

"저기… 언니는 잡았나요?"

은서의 물음에 진기는 그제야 소멸한 악령을 떠올렸다.

"네. 악령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 다행이에요. 제 실수로 다시 또 나타날까 봐 얼마나 무섭던지….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잡았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악령은 언니의 혼령이 아니었어요."

"네? 그럴 리가요. 보셨잖아요. 귀신은 분명 저희 언니였어요."

"모습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놈은 언니를 본뜬 자원령이었을 겁니다. 은서 씨. 혹시 죽은 언니를 많이 원망했나요?"

"그건… "

"은서 씨의 증오심에 이끌린 악령이 죽은 언니 행세를 했던 거죠. 언니를 보고 은서 씨는 더더욱 그녀를 원망했을 거고요. 놈은 사람의 증오심을 먹고 자라요."

"언니 때문이에요! 내가 사시에 계속 떨어진 것도, 그래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도,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버린 것도 모두 언니 때문이라구요!"

진기는 그녀의 분노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은서 씨가 언니를 계속 증오하는 한, 다른 자원령이 나타나 또 언니 행세를 할 겁니다. 이제 그만 언니를 놓아주세요."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진기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겁지겁 지갑을 찾던 그녀에게 진기가 말했다.

"아.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 귀신은 제가 잡은 게 아니라…"

물끄럼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꽃이나 한 다발 사서 언니 한번 찾아가세요."

복도를 걸어 나오던 진기는 705호 앞에 우뚝 멈춰섰다.

"명기…."

진기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상한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올라탔던 것은 귀신이었을까? 지옥문이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단서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어 만나봐야겠다. 진기는 705호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복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런데 어떻게 오신 거에요? 연락도 없이"

명기는 불쾌한 눈으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아. 그건 미안하다. 워낙 급하게 호출이 들어와서."

"호출이라니… 할머니가요?"

사내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복도에서 사내 중 하나가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방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했다. 명기는 재빨리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대로를 향해 뻗은 골목을 내려가며 연신 이쪽을 돌아보는 진기가 보였다.

'저 아저씨 뭐지? 가슴이 빛났었어. 그리고 위태천이 사라졌어.'

명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천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으로 들어선 순간, 위태천에게 빙의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의식과 의지를 또렷하게 느꼈다. 15세를 넘기고 몇 차례 빙의를 경험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철저한 방관자였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위태천을 물린 것이 자신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연락처라도 물어볼걸… "

시야에서 사라진 진기의 모습을 아쉬워하며 명기는 오랫동안 창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부른 것은 누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