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

 

오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2년이 흘렀다.

한귀례는 오선이 떠나던 날 섬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들어앉아 죽음을 맞았다. 명신은 시커멓게 타버린 모친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살면서 그토록 분노한 명화주를 본 일이 없었다. 치를 떠는 대천모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아니, 신단 사람으로 제 어미의 죽음 앞에 애도 대신 저주를 거들어야 했던 자신의 운명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어미가 원망스러웠고,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그녀의 삶이 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이 모든 가운데 대천모 명화주가 있다. 명신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갈리고 부서지도록 앙다문 잇몸으로 피가 배어 올랐다.

 

오선이 사라진 뒤, 천신단에는 흉흉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축 중이던 천선당이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가 된 일이 있었고, 신단의 살림을 도맡던 중요 관리자가 신단 자금을 도박으로 날리고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다음 해는 화주가 큰 병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는가 하면, 공석인 대천모를 대신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내부인들 간 알력 다툼이 일어나 살인사건으로 비화된 일도 있었다.

 

'일련의 모든 일은 명백히 위태천왕의 진노에서 비롯된 일이다.'

화주는 다급했다. 오선을 찾지 못한다면, 그녀를 온전하게 바치지 못한다면 천신단의 운명은 거기서 끝난다. 신단은 물론 평소 내왕이 없던 타 종단의 힘까지 빌어 오선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선과 연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서울로 올라온 연호는 오선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어제까지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오늘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된다. 그렇듯, 운명이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다.

뛰어난 사진작가가 되는 것이 오선을 만나기 전 연호의 꿈이었다면, 지금은 그녀와 생을 함께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자신마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앞에 두고 다른 무엇을 찾아 헤매겠는가.

 

사실 그들의 도피행각은 재력있는 선배 길창준의 도움 없인 불가능했다. 강원도 깊은 산중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창준 소유의 방갈로가 있었다. 그곳은 두 사람이 흔적을 지우고 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은신처였다. 현실주의자였던 창준의 눈에 둘의 결심은 사랑에 잠깐 눈이 먼 아이들의 치기 어린 불장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줬던 이유는, 한때 자신도 열병을 앓았던 -실패로 끝났지만- 조건 없는 사랑이란 판타지가 두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연호는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세간을 처분하고 분신처럼 아끼던 카메라는 창준에게 선물했다. 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창준과 이별했다. 

 

2년 동안 연호는 딱 두 번 창준을 찾아 서울에 올라왔다. 피부는 그을리고 눈에 띄게 수척해졌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들과 헤어진 이래 창준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상실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기대하던 사진 대전 마감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몇 달 전부터 아예 카메라를 들 의지조차 없을 만큼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무엇을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자신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후배가 저렇게 근사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그의 눈부신 미소에 창준의 가슴 밑둥이 싸늘했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오선이는?"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오선은 같이 오지 않았어요. "

 

"너희들 괜찮은 거야? 거기 뭐 먹고 살 게 있다고… 서울은 아니어도 이제 도심으로 내려와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에요. 형 우린 산이 좋아요. 이게 다 형 덕분이에요."

 

"짜식… 솔직히 한두 달 만에 찔찔 울며 내려올 줄 알았는데 좋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야?"

 

연호는 여전히 눈부신, 그러나 쓸쓸함이 살짝 도는 웃음을 머금었다.

 

"형. 저 아빠 돼요. 오선이가 아이를 가졌어요."

 

"정말이야? 헛…이 자식 봐라. 선배를 한참이나 앞질러 가네. 축하한다 인마."

 

"감사해요. 산을 내려오면서 알게 됐는데 그 종교단체에서 오선이를 찾으려고 필사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이제 저희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요. 형한테는 꼭 한번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아… 그래?"

 

"혹 저희를 찾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꼭 비밀을 지켜주세요."

 

"그래. 그건 걱정 하지마."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연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호가 돌아가고 창준은 문득 의욕 넘치던 2년 전이 그리워져 무인도에서 찍었던 사진첩을 들춰보았다.

'이때만 해도 참 열심이었는데…'

불현듯 연호가 주고 간 카메라가 생각이 났다. 진열장에 올려놓은 그의 카메라에는 아직 다 찍지 않은 필름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창준은 암실로 들어가 연호 카메라에 있던 몇 장 찍히지 않은 필름을 현상했다. 사진은 조악했다.

 

'자식. 사진작가가 되겠다던 놈이…'

 

하지만 마지막 한 장의 사진이 상을 맺으며 떠올랐을 때 창준은 숨이 턱 막혔다. 붉은 암실 등 아래 약품이 뚝뚝 떨어지는 사진을 들어 올린 그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는 오선의 실루엣.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헝클어지고 이목구비는 짙은 어둠에 묻혔지만, 사람의 내밀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아름답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워!'

그 한 장의 사진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몇 년을 헤매며 프레임에 넣고 싶었던 그것을 왜 여기서 보아야 하는가. 질투. 열패감이 몰아쳤다.

 

'어떻게 연호 자식은 이렇게 운이 따르는가. 그 어리버리한 녀석에게 이런 작품은 어울리지 않아.'

 

둘의 도피를 도운 것도, 보금자리를 제공한 것도 자신이다. 무엇보다 녀석은 이제 사진에 더는 미련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실루엣에 묻힌 인물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그들의 사랑을 도운 자신은 이 정도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창준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창준은 그 사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진 대전에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단박에 본선에 올랐고, 결선 심사 중이던 최준용 교수의 눈을 사로잡았다. 최 교수는 미동 없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심사장을 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대천모님. 찾은 것 같습니다."

 

오선이 천신단 사람들에게 붙잡혀 왔을 때, 만삭이 된 그녀의 배를 보고 화주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신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목놓아 울지 않았으리라. 마당 한가운데 붙잡아온 세 사람을 세워놓고 화주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오선을 바라보는 명신의 눈에서 그리움과 원망,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굵은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오선은 신단 깊숙한 내실에 감금되었고 연호와 창준은 천신단의 지하창고에 갇혔다.

 

"이봐! 당신들 지금 이러는 거 불법인 거 알아? 당장 문 열지 못하겠어?"

 

납치된 이후 내내 물려있던 재갈이 풀리자 창준이 지하실 철문을 두드리며 거칠게 항의했다. 누군가 빠르게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창준이 희미하게 웃으며 연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금방…"

벌컥 철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창준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들고 있던 곡괭이자루로 그의 정수리를 힘껏 내려찍었다. '퍼석'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창준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그는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사진 한 장이 이런 참혹한 비극을 불러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창준의 얼굴 모든 구멍으로 피를 흘러나왔다. 연호는 죽어 널브러진 창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명화주와 사람들이 창고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지하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에 반사되어 파리했다. 사람이 죽어 눈앞에 있는데도 모두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연호는 턱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더는 물러날 수 없는 구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연호는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화주는 시선을 연호에게 묶어둔 채 수하에게 말했다.

 

"청도에서 왔다던 그 신도가 지금 있나?"

 

"엄광목 말입니까?"

 

"왜 사람 백정 하다가 천신단에 귀의했다던데"

 

"곧 불러오겠습니다."

 

수하 하나가 그를 부르러 지하실을 나갔다. 엄광목은 중국에서 청부살인자로 일하다가 공안에 쫓겨 한국으로 도피한 사내였다.

 

"대천모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지하실로 내려온 광목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자네가 사람 포를 뜬다면서?"

 

"무슨 말씀이신지…"

부리부리한 광목의 눈이 번쩍였다.

 

"내 들은 이야기가 있네."

 

"그런…."

 

"아니, 자네를 탓하려고 부른 게 아니네. 사람이 포를 뜨면 많이 아프겠지. 안 그런가?"

 

"자백을 받아야 할 때 하곤 했습니다만. 견딘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광목의 얼굴에 야만스러운 미소가 서렸다.

 

"자백은 필요 없네. 저놈 포를 떠서 죽여주게. 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죽는 순간까지 똑똑히 느끼게 해줘야 해."

 

연호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그들을 보고 입이 얼어버렸다.

 

"알겠습니다. 모양이 험하니 대천모님은 올라가십시오."

 

"아니네. 내가 보지 않으면 그렇게 죽이는 의미가 없지."

 

"안돼…. 안돼요. 제발 살려주세요!"

 

시커먼 사람들이 발버둥 치는 연호의 팔과 다리를 잡아끌었다. 연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수하가 입을 막으려는 것을 화주가 말렸다.

 

"입은 놔두게. 저놈의 비명을 들어야겠네."

 

팔뚝과 다리부터 살가죽이 벗겨지며 연호는 처절한 짐승 소리를 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사람이 아닌 핏물이 시뻘건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날숨이 멎을 때까지 화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저 두 놈 흔적도 없이 태워버려라."

 

화주는 짤막하게 명령하고 지하실을 나섰다. 그녀는 곧바로 오선을 가둬둔 방으로 향했다. 눈이 퉁퉁 부은 오선은 화주가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제발 연호 씨 좀 만나게 해주세요."

 

화주는 배 속의 아이가 재앙의 씨앗이라도 되는 것처럼 딸의 한껏 부푼 배를 노려보았다.

 

위태천은 진노하실 것이다. 어떤 벌이 떨어져도 달게 받아라. 그게 네년의 운명인 거다."

 

"연호 씨는… 그 사람은 잘못 없잖아요. 그 사람이라도 풀어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어머니. 아니 대천모님"

 

"사내놈 이름이 연호인가? 그놈은 이미 천벌을 받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연호가 죽었다는 것을 직감한 오선은 그가 고통 속에 질렀던 비명과 같은 소리로 절규했다. 오선은 화주를 밀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수하들이 그녀를 붙잡으려 하자 넘어져 있던 화주가 말했다.

 

"놔둬라."

 

수하들은 자리에 멈췄지만, 명신은 오선을 따라 달려나갔다. 화주는 절망한 듯 주저앉은 그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초점이 나간 멍한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내게 내린 천벌인 게야. 다 끝났다…."

 

"오선아! 거기 서!"

 

오선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천신대 마당을 가로질렀다. 마당에 있던 신단 사람 누구도 그녀를 막아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곧이어 뛰어나온 명신만이 오선을 간절하게 부르며 그녀를 쫓았다. 명신은 초조함에 피가 말랐다. 오선이 달아난 방향이 자신의 불길한 예감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쪽은 낭떠러지였다. 절벽 끝에서 오선이 마침내 멈춰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을 본 명신은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선아. 안돼. 이건 아니야."

 

"다 끝났어. 이모."

 

"오선아 잠깐만. 제발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명신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 지난 2년 동안 정말 행복했어. 아…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그 위대하다던 위태천께서도 주지 못했던 행복을 연호 씨가 가져다주었어.

 아이가 태어나면 대천모 같은 엄마가 아닌, 진짜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어. 우리 세 사람 함께 행복한… "

 

"알아 오선아. 나한테 생각이 있어. 내가 도울게. 너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

 

"틀렸어. 이모. 어머니가 연호 씨를 죽였어. 어머니가 연호 씨를 죽였다고. 어머니가!!"

 

'아가 미안하다. 너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널 보호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구나. 함께 가자.'

오선은 슬픈 얼굴로 명신을 바라본 후 주저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까아아악"

 

명신은 비명을 지르며 천신대를 향해 달렸다. 눈물이 흐르다가 격한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바보. 바보! 이 멍청한 계집애. 너는 몰라도, 나는 너를 딸로 키웠는데 어떻게 내 앞에서'

오선은 천신대 대문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오선이 뛰어내렸어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 빨리!"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오선은 몸 이곳저곳이 부러지고 찢긴 채 절명했다. 명신은 주저앉아 의식 없는 그녀를 흔들며 목놓아 울었다.

 

"엄마도, 너도 왜 기다리지 못해! 왜 기다리지 못하냐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고 명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옷매무시도 고쳤다. 구급대원들이 달려들어 오선의 맥과 호흡을 확인했다. 명신은 구급대원 하나가 절망스럽게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화주와 파출소장을 비롯한 수하들이 해안에 도착했다. 딸이 생의 끈을 놓은 마지막 순간조차 화주는 그녀의 이름 한번 부르지 않았다. 구급대원이 화주에게 달려와 자신이 일을 그르친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화주는 딸의 사망 선고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심한 듯 자리를 뜨기 위해 그녀가 등을 돌리는데, 오선의 곁을 지키고 있던 대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배가 움직여요! 아기가! 배 속의 아기가 아직 살아있어요!"

 

"뭐라고?"

 

뻣뻣하게 섰던 화주가 번개에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구급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칼 가져 오니라!"

 

"네? 무슨 말씀을…."

 

"지금 당장 아이를 꺼내란 말이다. 당장!"

 

구급대원들은 급하게 메스를 가져와 오선의 배를 가르고 살기 위해 꿈틀거리던 아이를 꺼냈다. 명신은 기적을 목도한 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기를 모포로 두르고 있던 대원에게 명화주가 다짜고짜 물었다.

 

"사내인가 계집인가?"

 

"아. 딸입니다."

대원은 경황이 없는지 모포를 들춰 아기의 아랫배를 본 후 말했다. 화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구급대원의 품 안에 있던 아이를 낚아챘다.

 

"오오오. 이럴 수가 위태천왕님의 뜻이었어. 이 모든 것이 그분의 뜻이었어!"

 

화주의 눈으로 감동에 북받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녀는 아기를 들어 올려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 너를 명기라고 부를 것이다. 부디 위태천의 훌륭한 그릇으로 자라다오 아가."

 

명신은 들것에 실린 오선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오선아. 이 불쌍한 것아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행복하게 못 해줘서 미안하구나. 아기만큼은 내가 꼭 지켜주마. 반드시….'

 

움켜쥔 오선의 손마디에 가느다란 은반지가 있었다. 명신은 오선의 유품을 빼 손에 꽉 쥐었다.

화주가 오선의 곁으로 다가오자 명신이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품에 안은 아기와 오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처녀적 잉어 꿈을 꾸었을 때, 난 네가 빛을 향해 올라간 잉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잉어가 아니라 내 손에 떨어진 붉은 허물이었구나. 명기를 품느라 애썼다."

그 말을 남기고 화주는 일행과 함께 천신대로 올라갔다. 명신만이 오선의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지켰다.

 

 

 

 

명화주. 명오선. 그리고 명기  끝

 

 

 

 

에필로그 

 

명기는 이모할머니 명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명신의 인자한 얼굴이 자연스럽게 화주의 얼굴을 어둠 속으로 밀어냈다.

 

'이모할머니가 없었다면….'

 

철이 들기 무섭게 명기는 엄마 오선이 겪었던 갈등을 똑같이 겪었다. 윽박지르진 않았지만, 무당이 되라고 집요하게 강요하는 화주를 떠올릴 때면 그녀는 지금도 아찔해진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그녀가 비뚤어질 무렵, 명신이 조용히 그녀를 해안가 절벽으로 불러냈다. 친할머니인 명화주를 포함 천신단 식구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오직 명신만은 유일하게 그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명신은 그간의 모든 일을 명기에게 털어놓았다.

명기는 충격을 받고 심하게 동요했다. 무엇보다 엄마의 비참한 최후가 그녀를 거칠게 흔들었다.

명신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도 침착했다. 그녀는 오선의 유품인 반지를 명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반드시, 엄마처럼 되지 않도록 내가 지킬 것이다. 약속하마."

 

그녀는 명기가 천신대에 머물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가장 우선에 둘 일은 그녀를 화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었다.

명기는 명신의 치밀한 계획대로 자살 소동을 벌여 천신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화주는 몸져누울 만큼 크게 놀랐다. 오선의 일을 겪었던 그녀는 명기도 그렇게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고, 명신은 그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서울행은 명신이 화주에게 내놓은 일종의 묘안이었다.

 

명기를 독립시키는 것.

성인이 될 때까지 평범하게 자라게 하는 것.

그녀가 비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자신과 신단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는 것.

스물이 되면 천신단으로 돌아오는 것.

 

화주는 괴로운 듯 신음을 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스물이 될 때까지 온전하게만 자라 준다면, 그녀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서울이라 해도 학교나 거처를 감시할 수족이 여럿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통제할 수 있다는 명신의 귀띔을 화주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앞으로 3년, 명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태천의 빙의를 막는 방법을 찾겠다고 명기에게 말했다.

약속은 명기에게 했지만, 명기의 눈 속에 깃든 오선과 귀례를 향한 굳은 다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