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선]

명화주는 스물여덟이 되던 해 가을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밤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내리막이 끝나자, 인가가 보이고 가옥의 틈바구니로 옹색한 골목이 나타났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자신은 어디를 이토록 급하게 가고 있는가. 한 번쯤 의아해할 법도 하건만 자신을 끌어당기는 인력에 몸을 맡긴 채 그녀는 서둘러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길은 뱀처럼 구불거리고 백 보를 못가 잔가지 뻗듯 갈라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길 한번 놓치지 않고 달려 마침내 기와가 번들거리는 한옥 앞에서 멈춰섰다. 

역시 처음 보는 낯선 집이다. 그녀는 육중한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밤 인적은 없었고, 사랑채 한 곳만 희미하게 등이 빛났다. 다가가 방문을 열자 안에는 마치 그녀의 방문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두툼하고 폭신한 이불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깐 잠을 잤을까? 이불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화주가 깜짝 놀라 이불을 걷어내자, 팔뚝만 한 핏빛 잉어가 물 위로 솟구치듯 천정을 향해 치솟았다. 막혀있던 검은 천정에 몸을 부딪친 잉어는 그것을 뚫고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명화주는 두 손을 움켜쥐고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처절한 몸부림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마치 천정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스스로 잉어가 빠져나갈 만큼의 작은 구멍을 열어주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잉어는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 제모습과 꼭 같은 핏빛 허물을 벗고 번쩍이는 은색이 되어 빠르게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질량을 잃어버린 허물은 날리는 재처럼 팔랑팔랑 떨어져 맞잡은 화주의 손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명화주는 징그러운 듯 손을 털어 껍질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허공을 수직으로 올라간 잉어는 천장을 뚫었던 것처럼 먹빛 하늘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사라졌다. 순간 그 틈으로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백광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구멍 뚫린 천장도, 깔렸던 이불도, 대궐 같던 집도, 자신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순백 속으로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빛과 그녀만 존재했다. 
화주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환희·영광 끝을 알 수 없는 희열.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그 순간 화주는 위태천의 뜻을 깨달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고, 가위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벽시계를 보니 1분도 틀리지 않은 자정이었다.

'위태천왕님의 뜻이다! 그분의 명이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으로 자신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그녀는 주저 없이 일어나 자신의 침소 밖으로 달려나갔다. 자정을 넘은 밤은 고요했지만, 그녀는 격랑의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세상이 울렁거렸다. 숨이 가빠오는 것 잊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두시간 밤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꿈에서 보았던 기와집 앞이었다. 낡고 허름했지만, 틀림없는 그 집이었다. 조용히 문을 밀었다. 예상과 다르게 문은 빗장이 걸린 채로 굳게 잠겨있었다. 화주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망설임 없이 담을 넘었다. 

불이 켜진 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사람처럼 곧장 사랑채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빛이 없는 실내는 오로지 형체 정도만 식별을 허락했다. 꿈과 같이 이불은 깔려있었다. 하지만 폭신한 그 안에 누군가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화주는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며 잠든 사람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알몸이 되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꿈을 꾼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고 사실 같은 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준영은 열린 사랑채 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다. 혼처가 정해진 사람이 귀신에게 홀리듯 생면부지 여인과 몸을 섞었다는 수치심이 그를 속부터 흔들었다. 하지만 준영이 견딜 수 없던 것은, 저질러선 안 될 짓을 벌이고도 소리 없이 사라진 낯선 여인이 견딜 수 없도록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귀신에 홀린게야···'
준영은 자리에 주저앉아 맥없이 중얼거렸다.

천신대로 돌아온 화주는 자신의 거처에 결계를 치고 그날부터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손님이 찾아와도 대면을 하지 않았고, 점이나 굿도 예전 신어머니이던 한귀례와 다른 제자들이 그녀를 대신했다. 방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것은 귀례의 친딸인 조명신이 유일했다. 화주가 틀어박힌 후 천신단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봐. 대천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래?"

"쉬··· 조용. 이리 좀 와 보게. 들리는 말로 대천모님이 임신을···."

"뭐? 그게 사실인가? 아니 어떻게···."

"우리야 알 길이 있나. 그런데 얼마 전 부엌일을 보던 시녀 하나가 대천모님이 문을 열고 계신 걸 본 적이 있는데 배가···.. 그렇다더구먼."

"허! 참···."

"이 보게들."

한귀례가 날카롭게 치뜬 눈으로 수군거리던 두 사람을 불렀다. 사내들은 쭈뼛거리며 말을 그쳤지만, 궁금함을 못 참겠던지 하나가 귀례에게 물었다.

"신모님. 대천모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저희야 그저 걱정이 돼서 그러지요."

"자네들이 궁금해 하는 거 잘 알고 있네. 때가 되면 대천모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실 테니 그때까지 부정 타지 않게 각별히 조심해 주게들."

한귀례의 단속에 천신단은 차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녀가 임신했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호기심조차 대천모를 욕되게 할 수 있다고 천신단 사람들은 서로 당부와 주의를 나눴다. 하지만 입 가벼운 사람은 늘 있게 마련. 처녀 보살이-세간에서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인근에 파다하게 돌았고, 소문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날아다니다가 목포 인근을 헤매던 준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람 잘 찾기로 유명하다는 점집을 찾았다가 천신단 명화 주 이야기를 얻어듣게 된 것이다. 

준영은 그길로 남해로 달려 천신 단을 찾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소문뿐이었지만, 명화 주. 혹은 대천모라 불리는 그 처자가 그날 밤 자신과 동침했던 여인이란 것에 이해 못 할 확신이 들었다.

"제발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대천모님은 외부인과 일절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돌아가요."

"아니. 안됩니다. 제가 왔다고, 한준영이 찾아왔다고 한번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이봐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 무슨 행패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화주···아니 대천모님을 만나기 전에는 못 돌아갑니다."

"뭐 이런 진드기 같은 놈이 다 있어!"

준영은 자신을 막는 경비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리고 천신대 본채를 향해 냅다 뛰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기 있소? 나요. 나! 내가 왔소. 행전에 사는 한준영이 왔다구요! "

고함을 듣고 본채 입구에서 장정 서넛이 달려 나왔다. 준영은 그들을 피해 본채 옆으로 난 돌계단으로 뛰어 올라갔고, 장정들은 사색이 되어 그를 쫓았다. 준영은 계단이 끝나는, 명화주가 기거하는 별채 나선당 앞에서 장정들에게 붙들려 돌바닥에 얼굴을 짓눌렸다.

"이거 놔! 그녀를 꼭 만나야 해."

"아니 이놈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내가 왔소! 한준영이 왔다고!"

준영의 고함에 놀란 장정들은 그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때 나선당의 쪽문이 천천히 열렸다. 명화주는 그곳에 앉아 막 끌려 내려가던 영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천모의 등장에 놀란 장정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험한 꼴을 당했지만 준영의 얼굴은 반가움에 환해졌다. 그는 잡혀있던 팔을 거세게 털어내고 자기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요! 기억하겠소? 그날 밤 당신과 함께···."

그의 절박한 외침에도 명화주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점은 마치 간절한 그의 눈을 투과하여 더 먼 돌계단 어디쯤 머무는 듯 보였다.

"가시우."

"짤막한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쪽문이 닫혔다. 장정들은 사라진 화주를 향해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영준을 억세게 끌어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영준은 천신대 밖으로 내팽개쳐지고 굵은 소금을 소나기처럼 맞았다. 
그녀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걸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내쳐질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비록 하룻밤의 사랑이지만 몇 달을 애타게 찾아 헤맨 그 사람이 던진 눈빛에 그는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왈칵 화라도 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무관심과 지루함이 역력한 그녀의 눈을 마음으로 받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다. 

언제 천신대를 떠났는지 모르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꼭 보름이 지난 후 길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반듯한 명문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 외모며 학식이며 하나 빠질 것 없던 준영이 무녀에게 홀려 객사했다는 이야기는 묵은 전설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그가 떠난 몇 달 후, 화주는 예쁜 딸 하나를 낳았다. 아비가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 명오선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오선은 지엄하신 위태천왕의 의지 시다.'

사랑도 없는 사내와 동침을 하고 딸아이까지 낳은 것은 꿈에서 보았듯, 위태천이 이 아이의 쓰임과 운명을 결정해 자신을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신의 사랑을 독점하고, 거기다가 자신의 피붙이로 사명의 대를 잇는 것. 화주에게 넘치도록 과분한 은혜이자 신의 뜻을 완성할 중차대한 임무였다.
오선을 온전하게 키워 위태천의 현신을 위한 그릇으로 만드는 일. 그것은 위태천이 화주를 선택한 궁극의 이유였고 그녀가 대천모로써 받은 가장 막중한 사명이었으니 어떻게 오선을 키웠겠는가.

유년부터 오선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자랐다.
귀한 몸 어디 한 군데 흠이라도 질까 봐 오선은 천신대에 사는 또래들과 노는 것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신대에 오래 머문 신단 식구조차 그녀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한귀례와 조명신 모녀는 화주의 명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오선의 모든 수발을 도맡았다.

금지옥엽 귀한 딸이라고는 하지만 화주는 오선에게 살가운 어미가 아니었다.
매사에 엄격했던 자신의 기질을 딸이 그대로 물려받아 어미를 뛰어넘는 무녀가 되길 바랐던 그녀는 어린 딸의 서투른 행동을 그냥 보아넘기지 않았다.
불행히도 오선은 존재조차 모르는 제 아비의 성정을 더 닮았던가. 기대와 다르게 유약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그럴 때마다 화주는 어린 오선을 가혹하게 몰아세웠다. 한창 사랑받고 자라야 할 나이에 외로움을 먼저 배운 오선은 아이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그늘을 얼굴에 지니고 살았다.
그나마 그녀가 사람답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를 대신한, 엄마를 대신한 귀례와 명신의 온기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천모의 명령으로 맡게 된 일이었지만, 모녀는 오선을 친자식. 친손녀처럼 기꺼운 사랑을 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할머니. 왜 우리 어머니는 날 싫어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천모님이 널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시는데···"

"거짓말. 어머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좋아하실까?"

"아가. 넌 잘하고 있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그럼. 우리 오선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 그렇담 난 평생 사랑받기 틀린 거네."

"··· "

귀례는 오선이 딱해서 말을 더 보태지 못하고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속에서조차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지 오선은 귀례의 가슴 안에서 딱딱하게 오그라들었다. 시간이 흘러 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자 오선은 무당이 될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지극함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부정 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신줏단지였기 때문이지, 피붙이에 대한 본능적 사랑이 아니라는 게 예민한 그녀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오선은 무당이 되는 것도 싫었지만, 어머니 같은 여자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두려웠다.

오선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 명화주가 천신대를 비운 사이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날 천신대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서 지역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천신대가 위치한 언덕까지 울긋불긋한 불빛과 축제의 열기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담벼락에 서서 구경이나 했을 그녀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귀례를 붙잡고 안 하던 때를 부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보고 오면 안돼?"

"아이구 아서라. 무슨 큰일 날 소릴. 대천모님이 아시면 경을 친다."

"어머니 지금 안 계시잖아. 그러니까 딱 삼십 분만 같이 보고 오면 안 돼?"

"나도 그렇게 해주고야 싶지만 안 되는 거 네가 더 알잖니."

해변에서 쏘아 올린 불꽃이 천신대 마당을 밝혔다. 오선은 잡고 흔들던 귀례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놓았다. 평소라면 한마디로 거절했을 귀례도 눈물이 그렁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얼마나 예쁜 나이인가. 저 솟아오르는 생기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오선아. 정말 가보고 싶니?"

"······.아니, 아니야. 괜히 어머니한테 들키면 할머니만 혼나지."

축 처진 어깨를 돌리던 오선을 귀례가 잡았다.

"그럼, 말이다. 나랑 같이 나가서 잠깐만 보고 오자."

"정말? 정말이야 할머니?"

"그래. 허지만, 금방 돌아와야 한다. 약속할 수 있지?"

오선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귀례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하지만 해변의 어지러운 인파 속에서 귀례는 오선의 동선을 놓쳤고 오선 역시 축제의 열기에 도취되어 귀례의 존재를 깜빡 잊었다. 오선을 도저히 찾을 수 없자 귀례는 신단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천신대로 급하게 올라왔다. 어찌 된 일일까. 내일 돌아오기로 되어있던 명화주가 제자들과 마당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귀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네 어디 있다가 오는 건가. 오선이는 어디 있지?"

"·········.."

"오선이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고 대천모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귀례는 울며 무릎걸음으로 화주의 발치까지 기어가서 그녀의 치맛단을 부여잡았다. 

한 시간 후, 화주의 연락을 받은 파출소장이 오선을 데리고 나타났다. 앞마당에 버티고 서있던 화주를 보자 파출소장은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화주는 소장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오선을 위아래로 살폈다.

"대천모님. 말씀하신 대로 따님 모셔왔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까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있던 귀례가 번개처럼 달려가 오선을 붙들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축제 장소가 아니라 어두운 해변 쪽에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파출소장이 귀례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서 혼자 뭘 하던가?"

"혼자는 아니고 또래 애들 몇몇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데요."

"거기에 사내놈들도 섞여 있던가?"

"아 예. 그런데 걱정하실 일은 없었···."

파출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주의 매서운 손이 귀례의 따귀를 후렸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귀례가 흙바닥으로 넘어지자, 오선이 놀라 넘어진 귀례를 끌어안으며 제 어미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할머니한테 그래?"

"아이고 아니다 아니야. 대천모님 다 제 잘못입니다!"

터진 코피를 훔치지도 못하고 귀례는 화주를 향해 머리를 거듭 조아렸다.

"할머니! 그러지 마. 내가 뭘. 뭘 잘못했는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어? 난 그냥 애들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이야. 그게 나쁜 짓이야? 그게 죽을 짓을 한 거냐고!"

오선이 화주를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처음 보는 딸의 격한 반항에 화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날 밤, 귀례는 오선을 잘못 가르쳤다는 이유로 여인이 감당할 수 없는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오선은 귀례는 물론 누구도 만날 수 없도록 한 달간 방안에서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그녀가 감금에서 풀려난 뒤에도 귀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뭇매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온전히 쓸 수 없던 그녀는 두 달이 다 지날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한쪽 다리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오선은 귀례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다리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솟았다.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 귀례를 멀찌감치 숨어서 볼 때면 죄책감에 까맣게 타들어 가던 마음에 증오심으로 일어난 불길이 시뻘겋게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