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기가 용왕제가 한창이던 해변으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굿판으로 한바탕 회오리가 지나간 것처럼 만장은 쓰러져 뒹굴고 대낮 같던 조명도 모두 꺼져있었다. 천막의 반은 주저앉은 채 접혔고, 제사상에 올렸던 과일과 고기가 제기와 함께 모래 위를 뒹굴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대여섯 남은 촌로들이 열댓 명의 무당패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천막 기둥에 묶인 흰 염소만이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가끔 느긋한 울음을 울었다. 무당패 사람들은 바짝 주눅이 들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고함치는 도승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도승의 발밑에 동굴에서 도망쳤던 젊은 박수가 모래에 대가리를 처박고 울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도승은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젊은 박수의 간절한 읍소를 다 듣기도 전에 냅다 그의 머리를 세차게 밟았다.

"이 멍청한 새끼야! 지금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어흑! 대무당님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도승의 발에 밟히면서도 젊은 박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뭇매를 다 받으며 오직 용서를 구했지만, 도승은 그를 정말 죽이려 했던 걸까. 무엇인가 급하게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제자가 들고 있던 삽자루를 낚아챘다. 제자들은 곁눈질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볼 뿐, 누구 하나 삽을 치켜든 도승을 막으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진기가 다가가자 도승을 포함한 모든 패거리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특히 도승의 눈은 마치 들개의 안광처럼 야만의 빛으로 번들거렸다. 진기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에 업혀있던 주연이 뛰어내려 무리에게로 달려갔다. 무당패에 섞여 있던 창백한 낯빛의 무녀가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와 주연이를 덥석 안았다.

"주연아! 주연아! 아이고 내 새끼 살아있었구나."

"엄마!"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니 이것아.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모자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진기는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도승의 살기 어린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무당패의 대부분은 주연과 안도감에 눈물을 훔치던 그녀의 어미를 다독이고 격려했지만, 도승과 그의 뒤에 서 있던 -덩치가 크고 수염이 까실한 -제자는 모자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진기만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진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도승이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네놈이구나."

"뭐···뭐요?"

"애를 납치하고, 용왕제를 망친 게 네놈이지?"

무당패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몰렸다. 진기는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꼿꼿하게 도승의 시선을 받았다. 도승은 소리 낮춰 말하고 있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고함을 칠 때보다 위협적이고 섬뜩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당신들이야말로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진기의 언성이 신경질적으로 높아졌다.

주연이 뭔가를 설명하려고 제 어미 품에서 고개를 들자 도승이 사나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살기등등한 도승의 눈빛에 그녀는 제 어미의 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누가 보낸 놈인지 모르지만,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당신들. 주연이를 죽이려 했지?"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듯 도승과 진기를 번갈아 봤고, 무녀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주연을 꽉 끌어안았다.

"애를 제물로 삼는 사악한 맞굿으로 천중 용왕제를 망친 놈이 바로 너였구나. 보이느냐? 용왕님의 진노를 사서 10년을 기다린 이 마을의 정성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느냐!"

도승의 목소리가 분노로 갈라졌다.

"맞습니다. 대무당님. 제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주연이는 틀림없이 저놈의 손에 죽었을 겁니다."

모랫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젊은 박수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애를 제물로 삼는 사악한 굿. 그게 당신들이 하려고 했던 거군.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진기는 허리춤에서 피 얼룩으로 녹슨 칼을 꺼내 보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진기가 칼을 꺼내 들자 내막을 모르던 무당패들이 기겁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도승은 그 칼이 진기의 수중에 있는 것을 보고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다.

"너 이놈. 당장 그 칼 내려놓지 못해!"

"이봐! 젊은이. 그 흉한 것 치우게! 얼른!"

험한 일이라도 벌어질까 촌로들까지 합세해서 진기를 만류했다.

'이게 아닌데...'
진기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틈에 칼을 빼앗으려고 도승이 성큼 다가오자, 진기는 반사적으로 도승을 향해 칼끝을 세웠다. 순간, 그의 눈앞에 빛이 번쩍 솟구치더니 검은 하늘이 팽그르르 돌며 그를 덮쳤다. 진기는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모래밭에 고꾸라졌다. 천막 기둥으로 쓰던 알루미늄 봉을 뽑아 든 까슬한 수염의 제자가 무너진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온통 새까만 암흑뿐이다. 악몽 속일까?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엄습하는 통증이 너무나 적나라하다.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뭔가에 단단히 결박된 듯 몸통을 꿈틀거리기도 벅찼다. 힘을 줄 때마다 누군가가 거친 손가락을 자신의 물컹이는 뇌 속에 박아넣고 흔드는 것처럼 육중하고 격렬한 통증이 두개골을 가로지른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여기가 어디고, 왜 이러고 있는지 도무지 기억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소녀. 소녀를 만났던가? 눈물을 흘리던 소녀의 얼굴이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 없는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그녀를 구했던가?'

그렇게 자문하고 있을 때, 소녀의 얼굴이 동굴에서 봤던 백골로 겹쳐 보이더니, 기억이 꾸물텅꾸물텅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또 그것이 제 자리를 잡기도 전에 후회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냉랭해진 마음을 덮쳤다. 진기는 대책 없이 호랑이굴로 직행한 자신의 무모함과 아둔함이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다못해 가스총이라도 하나 휴대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겠지. 
아닌가? 어쩌면 무작정 굿판으로 달려가, 마을 사람의 눈에 띈 것이 다행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뒤 해변 어딘가를 뒹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얼마나 갇혀 있었을까. 주연이는 ···무사할까?'

그때, 덜그럭 잠긴 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진기는 위험을 감지한 고양이처럼 등골을 바짝 세웠다. 빗장이 쉽게 열리지 않는지, 시간을 두고 집요하게 들려오는 마찰음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마침내 소리가 멎었을 때, 시커먼 공간을 쪼개고 사람 하나가 그의 어둠으로 들어왔다. 
실내는 낯선 자의 등장으로 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두터운 어둠으로 뒤덮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비명을 질렀지만, 축축한 천 뭉텅이로 속절없이 스며드는 거북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의 입에 굵은 재갈이 물려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둠이 익숙지 않기는 막 들어온 쪽이 더할 텐데, 실루엣은 거침없이, 하지만 소음을 죽인 신중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몸을 비틀며 신음하는 그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 그림자에서 여자의 달달한 로션 냄새가 났다.

"쉿. 제발 조용 해주세요."

진기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어깨에 힘을 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아까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제 딸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장 때문일까, 그녀의 말투는 빠르고 단조로웠다. 그녀는 진기의 입에서 침으로 흥건해진 재갈을 걷어냈다. 턱관절에 마비가 온 것인지 입을 다무는 일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진기가 턱을 움직이고 심호흡을 하는 동안 그녀는 묵묵히 그를 옭아맨 결박을 풀었다.

"주연이에게 들었어요. 그쪽 분이 주연이를 구해주셨다고.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마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듯 그녀는 여러 차례 머리를 조아렸다.

"여기가 어디죠?"

"쉬···.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도대체 도승이란 작자는 무슨 일을 꾸미는 겁니까?"

"........잘 모르겠어요 대무당님의 일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이 그녀의 표정에 역력했다.

"그럼, 주연이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몇 달 전부터 당집은 천중제 준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천중 용왕제가 중요한 제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처럼 도승님이 하나하나 직접 챙기며 공을 들인 경우는 처음 봤거든요. 
평소 그런 분이 아니신데... 제사 준비 기간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긴장에 화가 잔뜩 나신 것 같아서 심복인 동중이...아. 선생님을 공격했던 사람이요. 그 무뚝뚝한 동중이도 바짝 눈치를 살필 정도였으니까요."

부엉이인지, 깃을 치며 날아가는 새 소리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닫고 한동안 천정을 올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제 도승님이 갑자기 저를 불러 타지로 심부름을 보내시더라고요. 용무를 보니 제가 꼭 가야 하는 일도 아닌 것 같아, 제수 준비를 도맡아 바쁘니, 손이 남는 다른 식구를 보내셔도 될 텐데요 했더니 반드시 선주 네가 가야 한다고 당부를 하셔서 좀 이상했거든요. 
그리고···. 그 사달이 난 거죠.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주연이가 안 보이는 거에요. 오전만 해도 당집에서 뛰어다니는 걸 봤다는 사람이 꽤 있었거든요. 제가 돌아왔을 때는, 애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후였죠."
그때가 떠오르는지 여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미친 여자처럼 온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며 아이를 찾았어요. 당집 식구들도 아이를 찾는 걸 돕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도승님이 용왕제 부정 탄다고 격노하시는 통에 아무도 엄두를 못 냈죠. 
그리고 오늘 아침엔 저를 불러 제사가 끝날 때까지 애 찾는 걸 중단하라고 엄포까지 놓으셨고요. 저는 정말이지··· 용왕제를 지내는 내내···"

"어떻게 동굴에 가게 됐는지 혹시 주연이가 기억하던가요?"

"·········."

"말씀해주세요. 아무래도 그쪽이 모르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배기수. 그 젊은 박수가 주연이를 데리고 갔대요. 애도 삼촌처럼 워낙 가까운 사이라 의심 없이 따라 나갔던 것 같고요."

"그럼 혹시, 아이가 동굴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기억하던가요?"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진기는 보채지 않고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예전에도 혹시, 주연이처럼 실종된 사람이 있었나요?"

"네."

"그게 누구죠?"

"천선영. 제 친언니예요. 너무 어릴 적 일이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었어요."

"어릴 때라면... 당시 나이가?"

"근 20년 전이니까, 선영 언니가 꼭 주연이 만 했을 때네요. 언니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었는데 끝내 찾지는 못했대요. 제가 어릴 때라 남은 기억이 거의 없지만, 선영 언니가 저를 그렇게 끔찍하게 챙겼다고 그래요. 
제가 언니를 많이 닮아서···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가끔 소리 없이 한참을 우셨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언니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나한텐 언니지만 엄마한텐 자식이니까요."

'천선영...'

진기는 선주의 얼굴에서 읽히던 소녀의 얼굴이, 이제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선영 언니가 어젯밤 꿈에 나타났었어요. 방에 쪼그려 앉아 울다가 깜빡 잠든 모양인데, 언니가 어릴 적 모습 그대로 나타나 제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저를 찾고 있었어요. 두렵기도 했지만, 너무 반가워 언니 쪽으로 다가갔죠. 

언니는 저를 못 보는지 먼 곳을 바라보며 계속 이름만 외쳐댔어요. 처음엔 분명 제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애타게 부르던 이름은 제가 아니라, 주연이었어요. 깜짝 놀라 잠이 깼지만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저는 틀림없이 주연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란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선생님이 주연이를 업고 나타나시기 전까지요."

진기는 차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발목을 옭아 죈 마지막 밧줄을 풀었다. 서두르는 그녀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게 그에게도 느껴졌다.

"얼른 도망치셔야 해요. 여기 계시다간 큰일 날 거예요. 도승님이 제자들과 신당으로 올라가셨으니 지금이 유일한 기회에요."

"하지만 제가 도망친 걸 알면 선주 씨도 위험해지실 텐데요."
진기가 느슨해진 밧줄을 벗으며 말했다.

"저도 내일 아침 주연이를 데리고 이곳을 뜰 거에요. 그리고, 경찰에..."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강렬한 플래시 불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진기와 선주는 동시에 팔을 들어 시린 눈을 가렸다.

"아니 이년이!"

허연 빛 무더기 뒤에서 시커먼 발이 날아와 일어서려던 선주의 배를 걷어찼다.
"욱!" 그녀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바닥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이 자식들! 도대체..."

악을 쓰는 진기의 얼굴에도 묵직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막을 틈도 없이, 무수히 날아드는 주먹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받은 진기도 선주 옆으로 무너졌다. 동중과 기수가 너덜너덜해진 진기를 창고 밖으로 끌어냈다. 살려달라는 선주의 울부짖음은 다시 시작된 거친 타작 소리 속으로 삽시간에 묻혔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잦아들었다. 엉망이 된 진기의 얼굴을 뚱하니 바라보던 동중은 다시 그의 얼굴에 묵직한 주먹을 날렸다.

"그만, 그만둬요. 이러다 죽겠어. 얼른 도승님께 데리고 가요."
동중의 팔을 잡아채며 기수가 말렸다.

"너 이 새끼. 이따가 다시 보자."

짤막하게 한마디를 뱉은 동중은 용왕제에서 염소를 끌듯 진기의 멱살을 틀어쥐고 신당이 있는 언덕 쪽으로 그를 끌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동중의 옹이가 박힌 주먹이 보였다.

'이제 정말 죽는건가···' 
흙바닥으로 끈적하게 줄기를 이루어 떨어지는 자신의 피 섞인 침을 바라보았다. 주머니 안에서 나무토막의 진동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선영이라고 했나. 지금 여기 있다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니?"
진기는 분명 속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모양이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

불을 훤하게 밝힌 당집에 가까워지자, 나무토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동을 멈췄다.
'연약한 아이의 혼령에게 뭔가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한심스럽다.'
진기는 눈을 감았다. 신당 안으로 끌려온 진기는 다시 짐짝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동중과 기수는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고승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도승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은 진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형사냐?"

"·········"

"아니, 그럴 리 없겠지. 그럼 천무도 패냐? 네놈이 뭘 듣고 남전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무당이 사람도 잡나?"
진기는 입으로 괸 피 가래를 방바닥에 뱉었다.

"너같이 하찮은 놈 때문에 10년을 기다린 내 염원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당신···. 이쪽 지방에서 유명한 대무당이라던데, 당신의 영험은 악령에게 애를 제물로 바치고 얻은 것인가?"

"어디 근본도 없는 놈 따위가 감히 천중 용왕님을 욕되게 하느냐!"

"잘 들어 꼰대. 용왕은 선신이시다. 그런 분은 사람을 해롭게 하지 않으신다. 당신이 받드는 것은 용왕이 아니라 용왕을 가장한 사오령이겠지. 대무당이라고 불리는 자가 그만한걸 모를 리 없을 텐데··· 
흐흐흐. 알면서도 그랬다는 거지. 신통력이 탐이 나서. 내 말이 틀렸나? 한 번도 모자라 그 짓을 또 하겠다고?"

진기는 자꾸 떨어지는 고개를 간신히 치켜 올리며 대꾸했다.

"요놈 말 한번 잘 하는구나. 배후를 알아내면 이 자리에서 당장 네놈의 멱을 따려고 했는데, 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진기는 혼란스러웠다.

도승은 제단 옆에 세운 병풍을 밀고 벽장 안에서 보랏빛 상자를 꺼냈다. 진기는 자꾸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웃는 건가? 아니면 화가 난 것일까?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호의적인 표정은 아닐 것이다. 얼굴은 흐렸지만, 그가 상자에서 꺼내 든 것은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