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근래에 보기 드문 규모의 굿판이었다. 

타지 사람들까지 알음알음 구경을 왔는지 남전 사람들로만 이룰 수 없는 인파로 해변은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굿판이 잘 보이는 위치에 두 줄로 펴놓은 접이식 의자에는 딱 봐도 마을에서 방귀깨나 뀔 법한 노인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평소라면 벌써 곯아떨어졌을 촌 동네 아이들도 날렵한 민물고기처럼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오가며 술래잡기에 열을 올렸다. 

이 난리 통 속에서 어떻게 소녀를 찾아야 할지 막막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기는 가래 끓는 걸걸한 목소리로 애들을 다그치던 노인에게 다가가 슬쩍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 지금 무슨 굿을 하는 건가요? 와. 무당이 몇 명이야... 이런 큰 굿판은 생전 처음 보네요."

 

"자네 기잔가?"

머리를 살짝 뒤로 당기며 노인이 진기의 위아래를 훑었다.

 

"아니요. 기자는 아니고 이곳에 볼일이 좀 있어서…."

 

기자가 아니라는 말에 노인은 얼굴로 살짝 실망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이게 어디 보통 굿판인가. 이게 그 유명한 천중 용왕제 아닌가. 이름은 들어봤지?"

 

"용왕제요? 아…. 그런데 용왕제는 작은 제사 아닌가요? 그 왜.. 1년에 한 번 밥 같은 거 싸서 물에 던지고 하는..."

 

"쯔쯧! 어디 그런 시시한 제사를 우리 천중 용왕제에 비교하나?"

노인은 실제로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을 이었다.

 

"지금 보는 천중 용왕제는 10년에 한 번 열리는 대굿판이란 말이야. 평생 여기서 나고 살아도 대여섯 번 보면 많이 보는 진귀한 제사란 말이다. 알아 듣겄어?"

 

"십 년이라구요?"

 

"그러니까 멀리서 군수님이며 면장 읍장 유지 가릴 거 없이 다 오신 거 아닌가. 저기 저 형님은 이번이 살아생전 마지막이라고 폐병에 다 죽어가는데도 나온 것 좀 봐. 부적 한 장 받겠다고."

 

노인이 턱으로 힐끗 가리킨 쪽에 눈이 움푹 패고 잔뜩 쪼그라든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로 어렵게 몸을 지탱하고 앉아 굿판으로 향한 눈을 떼지 못했다.

 

"무당이 꽤 용하신 모양이네요?"

 

"도승님? 두말해서 뭣해. 대단한 양반이야. 특히 저분이 대무당 되어 천중제를 모시고부터 신통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데. 여기 남전에서는 신령으로 부르는 사람도 쌨어. 저 양반 때문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도 여럿이고. 저기 가운데 앉은 군수 보이지? 굿 한번 받은 다음에 삼수하던 아들이 서울대에 떡 합격 안 했나.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자네도 성정 것 치성 올리고 도승님한테 용한 부적 한 장 받아가라고."

 

"그나저나 혹시 이 동네에 애를 잃어버린 사람 없나요?"

진기는 자신의 목적을 상기했다.

 

"애? 뭐 어저껜가 당집 신딸 중의 하나가 애 찾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구먼."

 

"그래서 아이는 찾았대요?"

 

"굿이나 볼 일이지 귀찮게 뭘 자꾸 물어봐? 나야 모르지. 저기 저짝에 서 있는 젊은 무당 보이지? 굿판에 나온 거 보니 애는 찾은 모양이지."

 

노인이 가리킨 무당은 삼십 대 초반의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였다. 확실히 꿈에서 봤던 소녀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환한 전등불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핼쑥해 보였다. 소녀의 엄마가 맞는 걸까? 아이를 찾았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한창 무르익는 소찬대접을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아 진기는 멀거니 서서 그녀의 표정만 살폈다. 그녀가 쉬는 틈을 타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리라, 고 생각했다.

 

"천중 용왕님을 영접하러 대무당님 나오신다~"

 

북을 치던 고수가 가락을 구성지게 읊었다. 

신명 오른 굿판에 넋이 나갔던 구경꾼들이 길을 트며 양쪽으로 갈라섰다. 신딸 두 명의 시중을 받으며 늙은 박수 하나가 천천히 제단을 향해 걸어왔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눈매가 둥그스름 내려 말린 도승은 동네 구멍가게 주인처럼 푸근하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근엄한 표정을 만들려고 퍽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등장에 때를 맞추어 맞은편에서 덩치 큰 제자 하나가 흰 염소를 끌고 제단을 향해 들어왔다. 염소의 목에 방울 다발과 오색실을 칭칭 감아놓은 것이 오늘 굿판의 제물이 될 모양이다. 

요즘도 산 제물을 바치는 그런 굿이 있단 말인가? 동물보호협회에서 안다면 난리가 날 일이다. 염소는 요란한 북소리에 놀랐는지 아니면 죽을 제 운명을 알고 그러는지 제단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리를 뻗댔다. 하지만 까슬하게 깎은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제자의 무지막지한 완력에 염소는 잡아당기는 대로 힘없는 강아지처럼 질질 끌려갔다.

 

도승의 등장으로 굿판의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소찬대접이 흐트러짐 없이 잘 진행이 되는지 살피는 도승의 눈매는 여전히 둥그스름했지만 틈으로 번뜩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십 년에 한 번 치르는 대굿이라 그런 걸까 진기는 언뜻 평온해 보이는 도승의 얼굴에서 다 숨기지 못한 긴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도승의 손에 번뜩이는 칼 두 자루가 쥐어졌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접신을 시작하는 강신무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진기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장구와 꽹과리의 요란한 장단을 타고 시작한 그의 강신무는 좌중을 단번에 압도했다. 현란한 춤사위와 때에 따라 주저 없이 칼을 내지르는 솜씨가 과연 대 무당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았다. 강신무가 무르익을수록 사람들은 비범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빨빨거리며 뛰던 아이들마저도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도승의 춤에 넋을 놓았다.

 

"천중 용왕께서 오신다~ 용왕님을 뫼시어라~"

 

비지땀에 얼굴이 번들번들해진 도승이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제자리에서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벌써 머리를 조아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용왕님을 뇌까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도승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진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내림이 이루어지는데 영기가 없다니. 하물며 대 무당이라는 자의 강신무가 이토록 영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진기는 그동안 숱하게 굿판을 돌아다녔지만, 사이비를 제외하고 오늘처럼 영적 기운이 전무한 굿판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도심 골목의 비루한 점집에서도 잡신의 미미한 영기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도승의 분위기로 봐서는 모시는 신이 보통 급은 아닐 텐데 도대체 뭘까. 귀기가 없기에 더 불안한 이 기분은?

 

"꺄아아아악!"

 

고막을 찢을듯한 비명에 진기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뭐지?'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어디에도 비명을 질렀을 법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오로지 굿판에만 몰려있다. 이 많은 사람 중 아무도 비명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진기는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세게 후볐다. 

도승는 양손에 쥐고 있던 신장 칼을 내려놓고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요란하던 타악기의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도승의 거친 숨소리는 살아나는 파도 소리 속에서도 확연하게 들렸다. 도승은 제단 가운데 붉은 비단 위로 세워져 있던 단검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염소가 숨이 긴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찢어지는 비명이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았다. 진기는 바다 쪽으로 머리를 홱 돌렸다. 철썩철썩 파도가 들어오다 부서지는 경계에서 소녀가 오열하고 있었다. 

'아차! 굿판에 너무 정신을 팔고 있었다. 주머니 속 나뭇조각이 이토록 격렬하게 떨고 있는걸 몰랐다니.' 그의 시선이 빠르게 아이를 잃었다던 무당을 향했다. 그녀라면 이 비명을 듣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굿 시중에 여념이 없었다. 진기는 사람들을 제치고 소녀가 섰던 바다로 달렸다.

찰박찰박 운동화로 스며드는 바닷물, 꿈에서처럼 섬뜩하고 오싹한 차가움이 발바닥으로 스며들어 마치 꿈과 현실의 데자뷔를 겪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가 섰던 곳은 휑했다. 발자국 같은 최소한의 흔적조차 없었다. 지척이지만 굿이 한창인 백사장이 명백한 현실 세계임에도 아득할 만큼 멀고 몽환적으로 보였다. 만약 사람들이 그녀의 비명을 듣지못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거나 사자의 귀곡일 것이다.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책망이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찰나, 해안 바위에서 다시 소녀의 울음이 들렸다. 진기는 소녀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소녀가 섰던 바위에 다다르기 무섭게 그녀는 또 모습을 감췄다.

 

'그래. 네가 길을 안내하고 있구나. 그렇지? 아직은 늦지 않은 거지?.' 

진기는 다짐으로 읽히는 물음을 스스로 되뇌었다.

 

그의 생각에 응답하듯 거친 어깨를 맞대고선 갯바위 벽 뒤쪽으로부터 가냘픈 울음이 표표히 솟았다가 사라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음은 분초를 다퉜지만, 조심성까지 잃지는 않았다. 파도에 축축이 젖은 바윗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흐릿한 달빛이 간신히 만들어주는 명암에 의지하여, 한발 한발 신중한 디딤으로 바위벽을 돌았다. 

돌아서자마자 그를 마주한 것은 온 시야를 덮어버리는 거대한 암흑이었다. 갑작스러운 암전에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의 앞을 돌연 막아선 어둠을 한동안 숨 없이 노려보았다. 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도 품을 수 있기에 두려운 거다. 동공의 넓어지자 시야를 막고 섰던 것이 그늘에 가린 거대한 바위인 것을 알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위로 바짝 다가서자 갯바람과는 다른 냉기가 그의 목과 겨드랑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 동굴이다.' 

 

냉기는 바위 한가운데 크게 벌어진 틈으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검은 아가리로부터 끊임없이 불어오는 냉기에서 그녀의 아픈 곡성이 들리는듯했다. 진기는 바위틈을 비집고 새까만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꼬맹이. 어디 있니?" 

 

협소한 공간에 부딪혀 되돌아온 자신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게 무거웠고, 떨쳐버리려 애쓰던 최악의 상황을 곧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걸음이 둔해졌다. 동굴은 깊어질수록 점점 넓어졌다. 잘박잘박 밟히는 물과 어디선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그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듯했고, 그 칠흑의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굴의 먼 끝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빛 한 가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동굴 속에 빛이라니…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빛으로 가까워질수록 이물스러운 영기가 맹렬하게 다가와 팔뚝으로 성에 같은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토록 강한 영기가 느껴지는 거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빛의 시발점은 오른쪽으로 틀어진 동굴 벽에, 생뚱맞은 모습으로 매달린 캠핑용 가스등이었다. 그가 오른쪽으로 꺾어져 걸음을 멈춘 이유는 뜻밖의 가스등 때문은 아니라, 거기에 눈물의 소녀가 -꿈속의 모습 그대로-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가느다란 양팔을 꽉 움켜쥔 채 격하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불안과 공포, 혼란과 절박, 회한과 기대로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 앞에 그는 무엇을 먼저 물어봐야 할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초조했다.

 

그때, 소녀가 천천히 옆으로 비켜서자 그녀의 뒤로 동굴을 막고 있던 오래된 나무 격벽이 나타났다. 격벽의 중앙에는 밧줄로 엉성하게 고정된 문이 있었는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시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열악했다. 그 위로, 시커멓고 퍼런 곰팡이와 이끼가 빼곡하게 들어차 서로의 세를 다투었다. 진기의 시선이 격벽을 가로지른, 붉은 부적과 대나무 숯이 듬성듬성 매달린 금줄에 미치자, 소녀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여기구나….' 

진기가 보고 싶던, 혹은 보고 싶지 않았던, 소녀의 사건 그 시작과 끝이 저 허름한 격벽의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해주듯, 돌아본 소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진기는 금줄을 거칠게 뜯어내고 발로 문을 부술 듯 박차며 들어갔다.

 

"흡!"

 

눅진한 습기와 살이 썩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기에 강한 염분이라도 섞인 것처럼 눈이 따갑고 숨이 차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숨통을 조른 것은 지독한 냄새가 아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믿지 못할 상황. 느슨한 동공을 순간적으로 수축시키는 비현실적 광경 때문이었다.

 

동굴을 빙 둘러 켜 놓은 수많은 촛불. 오랜 세월 흘러내린 촛농이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흉물스러운 바위들. 붉은 천을 엮어 늘어뜨린 장식에 질서 없이 걸린 기괴한 그림과 인형들. 그로테스크하고 혼돈스런 그 풍경 속 한가운데 소녀가 있었다. 시커멓게 썩고 심하게 뒤틀어진 평상 위에,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쓰고, 팔다리를 평상 모서리에 결박당한 채 그녀는 죽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알록달록한 무복 차림의 젊은 박수가 울긋불긋 녹이 오른 단도를 머리끝까지 치켜들고 서 있었다.

 

"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진기가 빽 소리쳤다.

 

"수.문.천.진. 매옵고…"

 

젊은 박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림을 계속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진기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든 것은 죽은 듯 평상에 누워있던 소녀였다. 얼굴이 자루에 덮여 있었지만, 진기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칼끝을 향한 박수의 눈은 뒤집혀있었다. 영기.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에서 발산하는 후끈한 열기처럼 박수가 쳐든 칼끝으로 강력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천중 용왕제에서 느꼈어야 할 영기가 이곳에 있다! 그것도 이토록 사악한 기운으로 사람을 공포로 움찔거리게 하면서.

 

"이봐! 당장 그만두지 못해?"

 

"영.중.진.혼.섭 하오 시매."

 

박수는 진기의 거듭되는 호통에도 꿈쩍하지 않고, 음산한 주문을 웅얼거리며 들어 올린 칼의 날이 아래를 향하도록 고쳐 잡았다. 무엇을 더 기다리는가. 진기는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세차게 밀었다. 

"욱!"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박수의 손을 냅다 걷어차 그의 손에서 칼을 걷어냈다. 쓰러지고 칼을 잃었음에도 박수는 여전히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쥔 듯 아래를 반복적으로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 손에 들렸던 칼은 소녀의 가슴에 박혔을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

진기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으로 박수의 얼굴을 세차게 내려쳤다.

 

"으아! 으아악!"

 

입술에서 피가 터져 솟구치자, 박수의 희번득한 눈으로 초점이 돌아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하던 그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것 진기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여전히 끙끙거리는 소녀를 발견하고는 낯빛이 하얗게 바랬다.

 

"이 미친놈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노기로 떨리는 진기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으아아아아아!"

 

박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죽을 듯 노려보는 진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사라진 칼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진기는 그보다 빨리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그를 향해 뾰족한 날을 겨누었다.

 

"당신. 경고하는데 허튼짓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

 

박수는 두려움에 얼룩진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울음 섞이고 뒤틀린 비명을 지르며 동굴 밖으로 달아났다. 그의 고함은 차츰 멀어졌지만, 동굴로 되돌아온 메아리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메아리가 수그러들자 동굴 천장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거칠게 쌕쌕이는 소녀의 숨소리가 살아났다. 

그때까지 목덜미를 섬뜩하게 짓누르던 영기도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촛불과 함께 피워올린 약 기운 탓일까 가벼운 현기증과 구역질이 올라왔다. 진기는 들고 있던 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룩진 녹 자국은 오래전 말라붙은 피처럼 흉물스러워 보였다. 진기는 조심스럽게 소녀가 묶인 평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압박하던 천을 끊었다. 소녀는 몸부림을 치며 살려달라고 발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됐어!" 

그는 얼른 소녀의 머리를 덮고 있던 자루를 벗겨냈다.

진기의 얼굴을 보자, 소녀는 다짜고짜 그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어 서럽게 울었다. 진기는 소녀를 가슴에 품으며 천천히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울지마."

 

진기는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품에서 울고 있는 소녀는, 꿈에서 울고 있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울지마 꼬마야. 이제 집에 가야지… 이름이 뭐지?"

 

"주연이요." 

소녀는 대답하며 숨을 꺽꺽거렸다.

 

"그래 주연아. 엄마가 기다리신다. 얼른 가자."

 

진기는 소녀의 엄마 또한 무당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어쩌면 천중 용왕제를 모시던 도승의 패거리와 이 사건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늦지 않게 아이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꿈에서 봤던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축 늘어진 주연을 업고 동굴 방을 나가려던 진기가 우뚝 멈춰섰다. 그의 마음 끄트머리가 어디엔가 붙들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듯, 그는 선 자리에서 천천히 다시 실내를 돌아보았다. 그때, 썩어가는 평상 아래쪽에서 촛불의 일렁임에 반사된 무엇인가 희끗 보였다.

 

'설마…' 

 

자신의 심장 고동이 낭랑하게 떨어지던 낙수 소리를 덮는다. 그는 몸을 구부려 평상의 한쪽 모서리를 잡고 힘껏 뒤집었다. 평상 아래는 동굴로 흘러든 물이 고여 온통 시커먼 곰팡이와 이끼가 뒤덮고 있었다. 그 이끼를 마치 보드라운 이불 삼아 덮고 모로 누운, 작은 백골 한 구가 그의 눈동자 한가운데 아프게 박혔다. 

천정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푹 꺼진 안공에 차고 넘쳐,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이 앙상한 광대뼈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진기는 명치 언저리가 아리고 뻐근했다.

 

'나를 부른 것은…너였구나. 살려달라고 했던 것은 네가 아니라 주연이였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