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명기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을 지나 5교시 수업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오전 내내 자리를 비웠는데도 누구 하나 다가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조명신과 엄광목 일행의 방문 이후 아이들과 조금은 친해진다 싶었다. 하지만 주빈이 어떻게 애들을 단속했는지 몰라도 그녀를 찾는 친구가 점점 뜸해지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명기도 효진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복도에서 주빈 일당과 각을 세운 이후로 아이들은 작은 관심조차 행여 꼬투리가 될까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길 꺼렸다. 지나친 관심이 달가운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렇게 철저히 외면하는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효진이를 향했다. 

 

효진이. 그녀의 자리가 비어있다!

 

명기는 그제야 아이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효진이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4교시도 빼먹고, 점심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효진.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은 효진을 소재로 상상 가능한 모든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야. 따 어디로 증발한 거야?"

 

"체육 쌤이 완전 빡쳤잖아. 수업 땡땡이쳤다고. 그런데 진짜 어디 간 거지 가방이랑 책도 그대로 두고?"

 

"걔 혹시 귀신한테 홀린 거 아냐? 그 왜 7반 애가 봤다는."

 

"어우 야. 소름 돋게…"

 

몇몇 아이들이 주빈을 힐끔거렸다. 효진이 일이라면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주빈은 효진의 부재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옆의 아이와 손장난을 치며 키득거렸다. 명기는 효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주빈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까? 아니. 괜히 꼬투리나 잡힐 게 뻔하다. 이따금 자신에게 던지는 주빈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묻어났다. 수업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효진이를 쉽게 내려놓고 익숙한 식곤을 앓으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명기는 효진의 빈자리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수업이 끝나면 싸움을 각오하고라도 주빈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자장가처럼 웅웅거리던 국어 선생의 말이 툭 끊겼다. 선생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뒷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아이들은 국어 선생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녀의 시선을 쫓아 일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효진이었다. 

쥐가 들쑤신 듯 여기저기 뒤엉키고 먼지 더께를 매단 머리. 눈물과 땟국으로 시커멓게 얼룩진 얼굴. 생채기가 가득한 팔꿈치와 무릎. 손가락마다 말라붙은 핏자국. 그리고 초점이 사라진 퀭한 눈. 놀란 아이들을 경악하게 만든것은 우두커니 선 그녀의 체육복 하의가 가랑이 안쪽을 따라 축축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효…효진아!" 

 

선생은 떠듬떠듬 그녀의 이름을 한번 불렀을 뿐 어떻게 해야 할 지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효진이는 선생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자리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다리를 옮길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역한 지린내가 났다. 명기가 눈을 맞추려고 몸을 반쯤 일으켰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교실에 수 초간 무서운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 이상한 냄새가 나요. 큭."

 

주빈이었다. 불쾌한 표정으로 코를 잡고 있었지만, 다 가려지지 않은 그녀의 입술 끝은 비뚜름 올라가 있었다. 선생은 잠깐 망각했던 자신의 본분을 상기했는지 허둥지둥 효진의 곁으로 갔다.

 

"효진아.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니 이 꼴은?"

 

"……죄...송 "

 

"아니, 죄송할 게 아니라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효진은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양팔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선생은 뻗던 손을 주저하다가 결심한 듯 효진을 겨드랑이를 안아 일으켰다. 효진은 순순히 선생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저도 함께…"

 

"아니, 자리에 앉아. 모두 조용히 자습하고 있어."

 

명기가 일어서며 효진을 따라 나서려 했지만 국어 선생의 단호한 목소리에 엉거주춤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효진이 선생의 부축을 받아 비척비척 걸으며 뒷문으로 사라지자 교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쟤 왜 저래?"

 

"봤어? 바지 젖은 거? 진짜 오줌 싼 거야? 웬일?"

 

주빈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웃지 않았다. 명기가 매서운 눈으로 주빈을 노려보았지만, 주빈은 태연하게 '뭐?'라고 말하는 시늉을 했다. 양호실로 직행한 효진은 양호선생의 계속된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다기보다 마치 얼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질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였다. 소식을 듣고 담임이 황급히 양호실로 달려왔다. 담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효진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거칠게 담임의 손을 떨쳐냈다.

 

"말해봐. 누가 그런 거야? 주빈이니?"

 

"……"

 

"주빈이 맞지? 아니야?"

 

"무슨…. 일이래요?" 

양호선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담임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애가 말을 안 하니. 용역으로 오신 분이 체육동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효진이를 발견한 모양이에요."

 

"체육동 안에서요?"

 

"예, 거기 소리 없이 웅크리고 앉았다가, 문이 열리니까 조용히 일어나서 나가더래요. 효진이 상태가 아무래도 좀 신경 쓰였는지 교무실로 찾아와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어제 거기서 귀신 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애가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병원으로 데려가 보는 게…" 

 

양호선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효진을 바라보았다.

 

"저…선생님."

 

효진이가 입을 열었다. 담임과 양호선생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오늘 조퇴해도 될까요…"

 

"어…? 어. 그래. 그런데 병원에 가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집으로…."

 

"그래, 그래라."

 

담임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효진의 바지를 보면서 얼른 대답했다. 효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호실 문을 열고 나갔다. 담임은 팔짱을 끼고 긴 한숨을 쉬었다.

 

"애들.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설마요. 진짜 귀신이 있겠어요? 그렇긴 해도 자꾸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큰일이네요. 어제도 그렇고…"

 

"그러게요. 그나저나 교실에 들러 애들 좀 진정시키는 게 좋겠어요."

 

담임선생은 양호선생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3반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담임이 들어오자 여기저기 무리 지어 떠들썩하던 아이들이 분주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효진이는?"

 

"효진이 안 왔는데요?"

 

반장이 효진의 빈자리로 고개를 돌리며 담임에게 대답했다.

 

"안 돌아왔어?"

 

'그럼 바로 갔나? 옷도 갈아입지 않고… ' 

그러고 보니 효진의 가방과 소지품이 그대로 그녀의 자리에 놓여있었다. 궁금증에 목마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담임은 부담스러웠다.

 

"효진이가 좀 일이 있었어. 그러니 괜히 이상한 이야기 퍼뜨리지 말고 내일 학교 나오면 다들 좀 챙겨줘."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담임은 애써 못 들은 척 아이들의 질문을 외면하고 주빈을 복도로 불러냈다. 주빈은 삐딱한 자세로 서서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냥 담임을 꼿꼿하게 쳐다보았다.

 

"주빈아. 네가 그랬니?"

 

"뭘요?"

 

"효진이 말야. 네가 체육동에 가둔 거냐고."

 

"제가요? 효진이가 그래요?"

 

주빈은 턱을 치켜들고 당돌하게 되물었다. 담임은 주빈의 건방진 행동에 화가 욱 치밀어 올랐으나 잠시 침묵하는 것으로 속을 가라앉혔다.

 

"아니다. 됐으니까 들어가 봐."

 

당당하게 교실로 들어가는 주빈의 뒷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심증이야 확실하지만, 효진이가 말하지 않은 이상 무턱대고 주빈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효진이가 학교에 나오면 둘을 조용히 불러놓고 경위를 따진 후에 적당하게 화해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 가뜩이나 교육청의 학교폭력 집중 감시 기간에 이번 일이 자신에게 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명기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재차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효진의 전화는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아! 효진이가 양호실에서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면, 등교 후 전원을 끄고 반납해야 하는 휴대폰은 아직 학교 보관함에 있을 것이다. 효진의 소지품을 들고 교무실을 찾았을 때, 그녀도 담임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선생님. 효진이가 가방을 두고 가서요. 제가 효진이네 들러 보려고요."

 

"아. 명기야.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런데… 효진이 핸드폰 번호를 몰라서요."

 

선생은 신상 기록부를 뒤져 효진의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었다. 번호가 적힌 위 칸에 집 주소가 있었지만, 담임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에 열중하느라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기다렸다가 주소까지 받아적고 왔어야 했는데, 전화로 확인하면 되지 싶었던 게 실수였다. 

그러고 보면 전학 온 지 넉 달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 효진의 전화번호조차 몰랐다. 효진과의 친구 관계는 오로지 학교에서만 유효했다. 방과 후 방향이 갈리는 사거리까지는 종종 같이 걸었어도 하다못해 떡볶이 한번 같이 먹은 적이 없었다. 

 

효진과 자신은 진짜 친구였을까. 철저하게 고립 되는 것이 두려워 내 곁에 누구라도 있다는 안도감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했던 바로 그 '누구'가 효진이였던 건 아닐까. 거리는 어둠이 눅진하게 내려앉았다. 상가와 빌딩들은 일찌감치 간판과 실내조명을 올리고 분주히 저녁 손님들을 맞거나 야근 준비를 서두르는 것 같았다. 사거리까지 내려왔는데 다시 교무실로 돌아가 효진의 주소를 묻기도 마뜩잖았다.

 

'어쩔 수 없지 뭐. 내일 학교에 가서 돌려주면 되니까.'

 

명기는 급한 공복을 느꼈다. 아침 겸 점심을 할머니와 그렇게 넘기고 저녁이 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이런 날이야말로 맘 맞는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피자라도 먹으면 좋으련만. 새삼 혼자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김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야지. 그녀는 십여 미터 앞 눈에 들어온 김밥 체인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명기가 교차로 가까운 분식집으로 향할 때, 효진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교차로에서 두블럭이 떨어진, 간판으로 뒤덮인 4, 5층의 낮은 상가건물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선 이면도로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분주했다. 비교적 번화한 도로와 달리 그곳으로부터 자잘하게 갈라진 골목들은 대부분 주택으로 끝이 막혀 왕래하는 사람이 적었다. 가로등조차 죽어버린 어둡고 좁은 골목에 홀로 쭈그려 앉은 효진은 골목 밖으로 보이는 3층 피씨방에 멍한 눈을 매달고 있었다.

 

 한 시간 전, 주빈과 그의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 그녀는 맞은편에 위치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학교를 나설 때 입고 있던 체육복 차림 그대로였고 젖었던 바지는 다 말랐지만, 체육동에서 묻었을 검댕과 어지럽게 튄 핏자국은 옷 이곳저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쓰레기더미가 겹겹이 쌓인 검은색 플라스틱 드럼통 옆에 앉았다. 모서리가 터진 쓰레기봉투에서 흘러나온 오수에 바닥은 질척거리고 역한 냄새까지 났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곳을 지나가던 누군가 그녀를 봤다면 내다 버린 마네킹으로 보일 만큼 쭈그려 앉은 그녀는 움직임이 없었다.

 

낮은 담벼락에서 쓰레기통으로 폴짝 뛰어내리던 길고양이가 그녀에 놀라 사납게 울고 달아났지만, 효진은 그것에조차 반응하지 않았다. 한 시간을 같은 자세로 앉아 맞은편만 바라보던 효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주빈과 서연, 은채가 요란하게 떠들며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눈살에 아랑곳하기는커녕, 보란 듯 더 큰 목소리로 욕을 섞어 떠들고 깔깔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효진은 그녀들의 장난이 오줌을 싸고 어기적 걷던 자신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들은 한동안 피씨방 앞에서 수다를 떨다가 건물 모퉁이로 난 비좁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 골목 끝에 철거를 앞둔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들이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거란 걸 효진은 알고 있었다. 방과 후 불려가 숱하게 얻어맞았던 곳을 효진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효진이 골목을 벗어나 밝은 도로로 나오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의 행색을 훑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학생 꼴이 저럴까. 부끄럽지 않나. 사람들은 딱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도로를 가로질러 주빈 일행이 사라진 골목으로 곧장 들어갔다.

 

녹슨 철제 비상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음이 올라오자, 주빈은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빼 들었다. 서연과 은채도 수다를 멈추고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은성고 녀석들이라면 상관없지만, 가끔 귀찮은 상대가 올라올 때가 있어 최소한의 주의는 필요했다. 도로에서 흘러든 빛을 등지고 나타난 실루엣이 여자 한 명이라는 것과 곧 드러난 여자의 정체가 효진이라는데 일행은 일면 놀라고 일면은 안도했다.

 

"아. 씨 깜짝이야."

 

"효진. 아니 오줌싸개지 깔깔깔 부르지도 않았는데 니가 어쩐일이냐?"

 

효진은 은채와 서연의 비아냥에도 묵묵히 자신이 만든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야! 장효진. 일루 튀어와." 

 

주빈의 톤 높은 목소리에 효진의 몸을 타고 경련이 지나갔다.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어수선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연이 욕을 섞어 다시 소리쳤지만 들은 체도 않고 바닥을 맨손으로 훑던 그녀는 구석에 누워있던 맥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헐~" 은채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저년이 미쳤나. 쟤 뭐하니 지금?"

 

"안 들려 이년아. 당장 튀어 오라고!"

 

한 톤 높아진 주빈의 강압적인 명령에 효진이는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효진의 이상한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아이들은 병이 박살 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효진을 흔들어대던 경련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주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내가 죽일게. 내가 죽일게… "

 

효진은 날카롭게 깨진 병을 치켜들며 웅얼거렸다.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깨진 맥주병을 들이밀다니, 평소의 효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작심하고 쇼를 하는 건 아닐까? 귀신 사건을 계기로 명기가 꾀를 빌려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 의심이 많던 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빈은 달랐다. 서연과 유사한 생각을 잠깐 했지만, 주빈은 '죽일게'라고 웅얼거리던 효진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분명 그것은 효진의 것이 아니었다. 잘 못 들었을 리 없다. 유년시절부터 줄곧 함께 자랐던 효진의 목소리지 않은가.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 가시며 목으로 소름이 자르르 돋아올랐다. 

 

서연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어떻게 겁쟁이에게 저런 깡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짜고 벌인 일이라면 효진은 물론 그 배후의 명기에게도 섣부른 도전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확실히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다.

 

"왜 그걸로 찌르시게? 찔러봐. 찔러봐!"

서연은 주빈이 미처 그녀를 만류하기도 전에 효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목이… 목이 가려워."

 

"뭐?"

 

"여기가…."

효진은 들고 있던 병의 날카로운 단면으로 자신의 목을 벅벅 긁었다.

 

"으아악!"

서연은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주르륵 목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금세 효진의 체육복 상단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여기…. 목이…."

효진이 피 묻은 병으로 자신의 목을 겨누고 다가오자 서연은 혼비백산하여 주빈과 은채가 있던 곳으로 뒷걸음질 쳤다. 효진은 고개를 수그려 자신의 옷자락으로 넓게 퍼지는 피 얼룩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적개심. 적개심만으로 똘똘 뭉친 핏빛 눈알이 공포에 떨고 있던 그녀들에게 똑똑히 보였다.

 

"내가 죽일게… 내가."

 

아이들은 좁은 구석으로 주춤주춤 걸음을 물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신경 말단까지 사로잡은 두려움은 말은 물론 비명조차 잊게 했다. 효진은 공포를 똑똑이 새겨주려고 작심한 사람처럼 한발짝 한발짝 천천히 그녀들 앞으로 걸어왔다.

 

"야! 장효진 너 미쳤어?"

 

주빈이 꽥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질식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효진을 자극했는지, 그녀는 돌연 귀를 찢는 비명을 지르고 그들을 향해 들고 있던 병을 던졌다. 날아간 병은 주빈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거세게 날아간 유리 파편이 서연과 은채의 팔과 다리를 죽죽 긋고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은채와 서연은 다가오던 효진을 피해 달음박질쳤다. 긁힌 팔에서 피가 송송 배어 나왔지만 통증을 느낄 겨를없이 그녀들의 달음은 필사적이었다. 은채가 먼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마음이 급한 서연은 곧 효진을 지나치기도 전에 제 발에 걸려 그 자리에 나뒹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살려줘 효진아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서연은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쥔 채 울부짖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낌새가 없자 서연이 웅크렸던 고개를 들어 효진을 보았다.

효진은 기우뚱한 목고개로 주빈을 바라볼 뿐, 바로 옆 발치에 쓰러진 서연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서연은 슬그머니 일어나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친구들이 도망치는 동안 주빈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조금도 현실 같지 않았다. 혹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몇 차례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피씨방에서 깜빡 잠이 든 것은 아닐까…' 

하지만 효진의 새빨간 눈이 정확하게 자신의 동공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모든 것이 극한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든 절박한 상상임을 깨달았다.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 때문에 죽었어. 그러니 이번엔 내가 죽일게…."

효진의 입으로 여전히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그랬잖아…나 자살하게 만든…..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지…죽도록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그런 소문을 냈지."

 

귀신이다. 진짜 체육동의 귀신이다! 주빈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야! 난…난 아니야!"

 

"…얘도 똑같아. 나처럼 그 안에서 자신을 숨을 끊으려 했어."

효진이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러니 말리지 마."

 

'말리지 말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주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넌 보고만 있으면 돼. 내가 할게…내가 죽일게"

 

효진은 갑자기 주빈의 목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