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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기록적인 폭염에도 불구하고 작년 더위는 그 여름을 상기하는 내게 첫 번째 기억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그것은 진기·명기라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했던 두 사람과의 만남이 그해 여름의 더위보다 또렷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30도를 훌쩍 넘는 폭염보다 뜨거웠던 그들의 '평범'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내 기억 한 가닥을 바짝 틀어쥐고 있다. 그들의 비범한 삶이 우리가 사는 평범을 지향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들을 다룬 특집 기사는 결국 '월간 미스테리 000'에 실리지 못했다. 인터뷰를 지극히 꺼리던 그들만큼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되길 두려워한 '귀신들'의 소행일까. 잡지는 인터뷰를 마치고 원고를 마무리하던 다음 달 예고 없이 폐간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경영난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출판사 사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여전히 켕기는 것은 내가 예민해서일까. 그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그들이 궁금했다. 진기와 명기는 원하던 삶을 찾았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들이 말했던 그 지옥의 삶에서 여전히 버둥대고 있을까.

 

#퇴마사 추진기 인터뷰 중.

 

필자: 최선을 다했지만 불가항력이었겠군요. 결국, 그 일을 계기로 퇴마사의 길로 접어드신 거고요.

진기: 최선을 다했다고? 아니.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필자:네? 그건 무슨 뜻이죠.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다니…

진기:만약, 그때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그랬다면 말야. 앞으로 내겐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되어버려. 최선이란 말은 그런 거잖아. 그때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필자: ….

진기: 나는 그때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어야 해.

필자: 음… 화제를 바꿔서, 귀신이 무서워하는 사람. 어떤가요? 표면적으로는 세상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지옥이 있다면 두려워하실까? (웃음)

진기: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잖아. 아무리 큰 슬픔이나 아픔도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지게 마련이라고. 망각이 삶을 평범하게, 사람답게 살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라는 걸 사람들은 잘 몰라. 망각의 존재를 망각하는 거지. (웃음)

귀신은… 언제나 내게 그것들을 보기 시작했던 첫 순간을 상기시키지. 기억회로의 스위치를 '딸깍'하고 올리는 것처럼 말이야. 놈들은 내게 그 망각의 기회를 앗아갔어. 귀신을 보는 매 순간이 내겐 5년 전 그날과 같아. 지옥이 있다면 두렵겠냐고? 평범으로 돌아가지 않은 한 내겐 매 순간이 지옥일 뿐이야.

 

 

#명기 인터뷰 중.

 

필자:명기 학생은 꿈이 뭐에요?

명기:꿈이요? 무슨…

필자: 왜 있잖아요. 장래 목표라든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은 포부 말이에요.

명기: 장래에 대해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일단 살아남고 봐야죠.

필자:살아남고 보다니, 무슨 뜻이죠? 혹 불치병이나 시한부 선고 같은걸 받았어요?

명기:아니요. (웃음)

저는 이름처럼 무엇을 담을 그릇이 되기 위해 태어났대요. 그 그릇에 내 것을 담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웃기죠? 그리고 그릇의 역할도 스무 살까지래요. 스물이 지나고 나면 나였던 그릇조차 내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하데요.

필자:음…

명기:'스무 살까지 살고 싶어요'란 제목의 영화가 옛날에 있었다죠?

나는 스무 살부터 정말 '살고' 싶어요.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기 전에 진짜 내 삶을 되찾고 싶은... 아! 그게 꿈이나 장래희망의 답이 되겠네요. 그쵸?

그때까지는 비록 온전한 내 인생이 아니어도 이렇게 살아가야죠.​ 

 

 

1부 귀신들린 년

 

 

1.

 

"이거 미친 거 아냐?"

 

날아간 빵은 효진의 얼굴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지만 재잘대던 아이들을 일순간 침묵시킬 만큼 임팩트가 큰 퍼포먼스였다.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나 땅콩 알레르기 있다는 거 알아 몰라? 그런데 땅콩샌드를 사와?"

 

"아…아니, 그게 주빈이가...."

 

주빈의 도움을 구하는 효진의 간절한 시선은 주빈의 냉랭한 시선 앞에서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년 일부러 나 엿먹이려고 그런 거지 맞지?"

 

서연이 꼬챙이 같은 손가락으로 효진의 머리를 거칠게 밀었다. 다분히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익숙한 듯 효진은 순순히 그녀의 손가락을 받아냈다.

 

"야! 뭘 봐? 신경 끄고 갈 길 가라고."

 

주빈의 패거리 중 덩치가 있는 은채가 좁혀오는 아이들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버퍼링으로 적체됐던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듯, 아이들은 군말 없이 신속하게 좌우로 흩어졌다.

 

"병신 같은 년."

 

빵을 줍고 있는 효진을 향해 주빈은 딱 그녀가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장효진. 줍지 마!."

 

주빈 일당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날아온 곳으로 쏠렸다. 뒤로 단단하게 당겨 맨 말총머리를 찰랑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온 아이는 주빈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효진의 팔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교실이 있는 복도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효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끌려가면서도 주빈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등장에 허를 찔린 듯 주빈의 무리가 어이없게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입을 옴팡지게 다문 그녀는 주저하는 효진의 등을 떠밀어 걸음을 재촉했다.

 

"야. 명기! 거기 안 서! 너 뒈지고 싶냐?"

 

은채가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앙칼지게 소리쳤지만, 명기는 대꾸 없이 성큼성큼 교실로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았다.

 

"하!. 어이가 없어 정말. 주빈아. 저년 그냥 둘 거야?"

 

은채가 벌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주빈에게 물었다. 주빈은 그들이 사라진 문을 차갑게 쏘아볼 뿐 은채의 역정에 대꾸하지 않았다. 서연이와 은채가 애꿎은 아이들에게 뒤늦은 분풀이를 하는 중에도 주빈은 명기가 마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하듯 매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명기. 이 개 같은 년…. 언제 한번 제대로 걸려봐. 죽여 버릴 테니까....'

 

효진을 앉히고 자리로 돌아온 명기는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를 펴들었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페이지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혹여 문을 박차고 주빈 일당이 들이닥칠까 봐 그녀의 온 신경은 시선의 가장자리에 걸린 문에 쏠려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어쩌려고.' 명기는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속 독백조차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효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주빈이 교실로 들어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주빈과 명기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동안 주빈은 명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뒤쪽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명기는 바늘 같은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사색이 된 효진은 쉴 새 없이 주빈의 시선을 구걸했다. 

 

오후 수업 내내 명기는 주빈의 살벌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살기. 다른 사람에 비해 유별나게 예민한 명기의 촉은 주빈의 화난 얼굴까지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현장을 목격했던 아이들은 방과 후에 반드시 사달이 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이번 명기의 돌발행동은 직설적이었다. 은밀한 장소도 아닌, 아이들이 다 보고 있는 복도 한가운데서 벌어진 상황 아닌가. 주빈 일당이 고까운 몇 아이들은 마치 명기가 주빈의 패거리를 응징한 듯 통쾌해 하기까지 했다. 걱정보다 호기심이 앞선 제3자 특유의 흥분이 아이들 면면에 어렸다. 실망스럽게도 그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먼저 자리를 뜬 것은 주빈이었다. 명기는 자신을 피한 주빈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아. 짜증 나. 주빈아. 명기 그년 진짜 가만둘 거야?"

 

"그년 때문에 애들이 우릴 물로 본다고. 효진이 걔도 뽀르르 그년한테로 도망가는 거 봤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서연이가 걸진 침을 바닥으로 뱉으며 말했다. 은채가 후미진 골목을 한번 둘러본 뒤 가방 속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껏 짜부라진 담뱃갑의 뚜껑을 열어 주빈에게 내밀었다. 주빈이 익숙하게 한 개비를 뽑아 들자 서연이가 재빠르게 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입 끝으로 한 가치를 빼 물었다. 셋은 말없이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한숨처럼 토해내길 반복했다. 골목으로 막 접어들던 동년배들이 그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딱히 위협적으로 노려보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깨를 오그려 붙이고 걸음을 물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별것도 아닌 년 하나 때문에 이게 뭐야. 슬슬 기어오르는 애들도 생겼어."

 

"어떻게 할까. 우리가 조만간 한번 손 볼까?"

 

서연과 은채는 주빈의 눈치를 살피면서 한마디씩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던진 말일 뿐 학년 짱인 주빈이 왜 명기를 어쩌지 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없이 곤두박질치는 자신들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주빈이 나서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주빈은 길게 연기를 뿜고 타다 남은 담배를 담벼락으로 튕겨내며 말했다.

 

"두고 봐."

 

아이들은 옷에 밴 담배 냄새를 먼지 털듯 툭툭 털어내고 삐딱하게 끌려 올라간 치마를 당기며 골목을 벗어났다.

 

 

명기의 등장은, 그녀와 마주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방학을 몇 주 앞둔 어느 더운 날, 명기는 강서에 소재한 새암여고 1학년 3반으로 전학을 들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짧게 자른 단발머리, 싸구려 머리핀과 지금은 없어진 메이커의 백팩을 메고 쭈뼛거리던 그녀는 담임의 독촉에 어색하게 묵례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무엇이 자신들과 다른지 열심히 살피고, 그 별것 아닌 차이에 킥킥대고 수군거렸다. 어른의 세계든 아이의 세계든 '다름'이란 쉽게 경계의 대상으로 도드라지는 법이다. 마치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들이 옳다는 암묵적인 동의와 함께 다름에 같아질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란 곳과 사뭇 다른 공기의 흐름을 명기의 섬세한 촉이 놓칠 리 없었다. 새로운 시작 앞에 들떴던 그녀의 기분도 현실감이 잡아당기는 대로 두어 계단쯤 내려선 것 같았다.

 

"남해에서 올라왔구, 명기라고 해. 성이 명 씨고 이름은 '기'인데…"

 

촌티가 자르르한 것도 모자라 이름마저 명기란다. '명기'뭔가 골동품 같은 냄새가 나는, 또래 사이에서 수월하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이들 몇이 '큭큭' 소리 나게 웃다가 선생님의 눈총을 받고서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촌스러움과 독특한 이름이 유명세의 이유가 된 것은 물론 아니다. 명기를 주목하게 만든 사건은 그녀가 전학 온 지 꼭 일주일이 되던 날 벌어졌다. 

 

명기의 학교생활은 예상했던 대로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세상이 좋아져 서울 지방 간 격차가 줄었다고 하지만, 명기는 도심 아이들의 분주한 생활 패턴을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다. 짓궂은 애들의 예상된 도발에도-흔히 텃세라고 말하는- 유들 하게 받아넘기지 못하고 발끈하는 단순함, 억양이 다 빠지지 않은 사투리와 행동의 투박함은 놀 거리에 굶주린 일진에게 뭐하나 빠질 것 없는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그나마 아이들의 눈을 피해 이따금 친절을 베풀었던 아이가 1학년 공식 왕따 효진이 정도였다. 일진이 일찌감치 점찍어 놓은 아이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 손 내밀 강단 있는 애들은 없어 보였다.

 

하굣길, 자연스럽게 명기와 효진은 나란하게 걷는 날이 많았다. 궁금함에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명기와 달리 효진은 묵묵히 듣거나, 가끔 그녀를 향해 읽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차로 앞에서 효진과 헤어지고 터벅터벅 혼자 걷고 있는 그녀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명기야."

 

"?"

 

알 듯 말 듯 한 얼굴의 또래 하나가 경계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 알지? 같은 반."

 

"아…! 으응"

 

명기는 날렵한 인상을 가진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딱히 말도 섞은 적 없는 그녀의 이름이 기억날 리 만무했다.

 

"다른 건 아니고, 딱해서 충고하는 건데 너 웬만하면 효진이랑 놀지 마."

 

"무슨…. 말이야?"

 

"네 일에 참견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왜? 효진이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녀는 삐딱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구나. 효진이는 왕따야. 다크서클의….그러니까 주빈이 따까리라고. 효진이랑 어울리면 너도 곧 걔네들한테 똑같은 취급을 당한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그렇지만 효진이는…"

 

명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명기가 그녀를 계속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고개를 돌리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날 명기는 자신에게 조언했던 아이에게 보란 듯 효진에게 다가가 스스럼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 친구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명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야! 촌닭. 너 점심시간에 우리 좀 보자." 

 

은채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명기와 효진을 막아 세우고 다짜고짜 말했다.

 

"나? 무슨 일로 그러는데?"

 

"와 보면 알지 뭘 따져. 야! 장효진. 니가 책임지고 쟤 체육동 뒤로 데리고 와."

 

효진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명기는 효진의 눈빛을 통해 그들의 호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마음이 어수선했다. 딱히 도망치려고 나선 것은 아닌데, 산란한 마음을 다독이려고 화단 주변을 돌다보니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설령 시간이 넉넉했다고 해도 고분고분 그들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교실로 돌아온 명기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효진이 헐레벌떡 달려와 거칠게 명기의 손목을 잡았다. 효진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팔목으로 전해졌고, 전기가 옮듯 그녀의 공포가 스멀스멀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 또한 느꼈다. 올 것이 왔구나.

 

"명기야…. 어디 있었어? 우리 당장 가야 할 것 같아."

 

"어딜?" 명기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되물었다.

 

"주빈이가, 화가… 많이 났어. 너 안 왔다고. 그러니 어서."

 

이제는 어떻게든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의 말대로 영영 그 치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명기는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의지와 다르게 책상 밑으로 감춰진 다리가 후들거렸다. 효진이가 그것을 보지 않았길 바랐다. 그때 교실 문이 부서지게 열리며 주빈과 아이들이 왈칵 들이닥쳤다.

 

"야! 이년들아. 이리로 당장 안 튀어 나와?"

 

주빈의 목소리는 아이들을 단숨에 압도할 만큼 높고 날카로웠다. 

효진이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명기는 눈에 힘을 주고 주빈의 시선에 똑바로 응수했다. 효진이는 움켜쥐었던 명기의 손목을 놓고 허둥허둥 주빈에게 달려갔다. 공포에 짓눌린 사람의 등은 옹색하게 굽는다. 지금 그들 앞에 선 효진의 등이 딱 그랬다. 주빈은 굴종을 약속하는 효진의 몸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을 꺾어 세찬 따귀를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살기를 명기에게 되쏘았다.

 

"이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주빈이 꼿꼿이 선 명기를 향해 성큼 걸음을 떼었을 때, 복도와 교실 입구를 메우고 구경하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어수선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점심시간도 끝났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리듯, 학생들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뜬금없게도 머리가 훌떡 벗겨진 교장이었다. 아니 교장뿐 아니고, 그의 행차에 세트메뉴처럼 따라붙는 교감과 생활지도 선생도 있었다. 입구를 막고 구경하던 아이들도 교장의 시선이 교실에 미치자 마치 자동문인냥 빠르게 좌우로 물러섰다. 아무리 1학년을 휘어잡는 일진 짱 주빈이라고 할지라도 교장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주빈과 그의 일당은 마치 자신들도 구경하던 일행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물러서며 아이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명기는 뜻하지 않게 선생 일행과 모든 아이의 시선을 독점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 명기 학생 마침 기다리고 있었구먼."

 

교장이 명기를 발견하고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아이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처음 전학 온 날 교장실에서 인사를 드린 적은 있지만, 딱히 안면이 있다고 할 수 없는데, 얼굴에 과장된 웃음까지 띠어가며 반색하는 교장을 보니 명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빈을 포함한 모든 아이의 입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교장과 선생들이 물러서자 조폭처럼 보이는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셋과 고운 한복 차림의 나이 지긋한 여성이 교실로 들어왔다. 검은 양복 셋 중 연장자로 보이는 오십 대 사내는 '나 건달이오.'라고 강변하듯 얼굴에 굵은 칼자국까지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명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호위를 받듯 조폭 트라이앵글 가운데 섰던, 한복의 여인이 활짝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명기의 두 손을 맞잡았다.

 

"명기. 잘 지내지?"

 

"이모할머니! 학교까지 어쩐 일이야."

 

"전학을 했으니까 내가 와 봐야지."

 

"아이씨. 내가 학교로는 오지 말랬잖아. 그리고 아저씨들은 왜… "

 

"할머니께서 한번은 가보란다." 

 

여인의 말을 막으며 칼자국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할머니라는 말에 명기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하하하. 아무튼, 명기 학생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우리 학교 애들이 다 착하고 순수해서" 

 

교장은 어색한 침묵을 의식해서인지 과장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생 중 하나가 '킥'하고 웃음이 터지려다가 교장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입을 막았다.

 

"나 잘 지내니까 얼른 가. 이게 뭐야 창피하게." 

 

명기가 칼자국에게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그래 알았다. 잘 지내는 거 봤으니 안심이다." 

 

여인은 짧은 미소를 명기에게 건네고 일행과 함께 교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려가시면 명화주님께 안부 한 번 전해주세요. 가을께 한번 찾아뵙겠다고…" 

 

교장이 몸을 크게 굽히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모쪼록 명기 잘 부탁드립니다." 여인도 깍듯하게 묵례를 했다.

 

어른들이 썰물 빠지듯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아이들이 벌떼처럼 명기에게 몰려들었다. 주빈의 패거리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스타의 팬 미팅 현장처럼 아이들은 명기를 에워싸고 갖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야. 저 사람들 누구야?"

 

"너네 아버지 조폭 두목이야?"

 

"교장 선생님은 왜 너네 할머니를 찾아가?"

 

"뭐야 뭐야. 말 좀 해봐."

 

"……."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과 호기심에 명기는 아뜩한 현기증을 느꼈다. 돌발적이고 직설적인 질문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니, 설령 누군가 조용한 곳에서 은밀하게 물었다고 해도 대답할 수 없는 부류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침묵시위라도 하듯 자리에 앉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후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온 영어 선생이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못마땅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명기에겐 얼마나 아름답고 반갑게 들렸을 구원의 목소리던가. 아이들은 수업을 위해, 일부는 이것만 해도 큰 뉴스거리다 싶은지 호들갑을 떨며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죽일 듯 달려들던 주빈과 일진들도 방과 후 홀로 남겨진 명기에게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교차로 근처를 지날 때, 조언했던 같은 반 친구와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명기를 지나쳤다. 

 

다음날 명기는 명실공히 '조폭 두목의 숨겨진 딸'로 전교를 아우르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주빈 일당은 물론 3학년 일진조차 건드릴 수 없는 언터쳐블이 되었다. 그 일로 명기는 새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일찌감치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체념 끝에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위안했다. 

 

가깝게 다가갈 친구는 없을지언정, 귀찮게 굴던 아이들도 다가오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