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배신은 내가 먼저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배신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니야. 계속 주저하다가 일은 벌어져 버렸고, 그 후의 일은 내 의식의 빗장이 잠겨버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억나지 않아.’

 ‘오늘 너의 배신은....... 물론, 너는 입으로 배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너의 표정과 변명이 나로 하여금 배신을 확신하게 만들었어.’

 ‘만약 내가 너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너는,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돌아온 사실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겠지. 여왕이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단지 아직은 내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여왕보다 먼저 그 아이를 찾아야 해. 먼저 내 숙명을 완수해야만 해. 철저히 짐승이 되어야만 해.’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의식이 불분명한 선영에게 익숙한 노랫소리가 실감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눈처럼 하얀 피부에 긴 흑발을 한 어린 소녀가 예배당 담벼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녀의 옆에는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살집이 두둑하고, 뽀얀 피부의 소년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한 마디 쏘아붙였다.

 “야! 백여시! 그건 2절하고 짬뽕이잖아!”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소녀는 남자아이의 푸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그런 소녀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손에 쥔 고무 딱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넌, 정말 살색만 하얀 게 아니라 머릿속도 하얗구나.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니가 그러니까 니 엄마가 뒤지지.”

 그 말에 소녀의 노랫소리가 그쳤다.

 “하하하! 그래. 진작 그런 짬뽕 같은 노래를 안 했으면 부모욕은 안 처먹지. 그래도 내 말이 무슨 소린지는 알아들었나 보네? 하하하!”

 초등학교 6학년은 되어 보이는 소년은 자신의 이야기로 소녀의 노래가 멈추자, 한껏 우쭐해진 표정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런 소년의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 아! 악! 따가워!”

 멀쩡히 서서 소녀에게 독설을 퍼붓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양 손바닥으로 감싸고 주저앉더니 이내 땅바닥에 널브러지며 뒹굴기 시작했다.

 “악! 내 눈! 으악!”

 소년의 갑작스러운 고통 호소에 같이 딱지를 치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진수야? 왜 그래? 눈에 뭐라도 들어갔어?”

 그 중 한 아이가 바닥에 먼지를 피우며 뒹굴고 있는 그 소년에게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로 물었다.

 “몰라! 이 새끼야! 아! 악! 너무 아파! 아빠 좀 불러줘! 그리고 너무 추워. 으으으.”

 자신의 아픈 처지에도 불구하고 뚱보 소년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물어 본 아이에게 욕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바닥을 뒹구는 그의 몸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알았어. 내가 금방 너네 아빠 불러 올게. 조금만 기다려.”

 나섰던 아이는 무리를 벗어나 예배당 현관문 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이의 고통스러운 몸부림과 고성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함께 딱지를 치던 아이의 대부분은 소리를 죽여 킥킥거리며 웃을 뿐, 그 어떤 반응도하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에나 열중하고 모양새였다.

 그런 그들 뒤에서 길게 늘어트린 검은 흑발의 소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녀의 눈빛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섬찟하고, 써늘한 눈빛이었다. 

 바로 그때, 예배당 현관문이 열리며 단발머리 소녀가 깡충 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그 뒤로 파리한 안색의 깡마른 소녀가 느린 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단발머리의 소녀가 하얀 피부의 소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윤주야!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창 너머로 네 노래가 계속 들려서 주일학교 공부 내내 집중할 수가 없잖아.”

 하얀 피부의 소녀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변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이름은 ‘윤주’였다.

 “미....... 미안.”

 윤주는 돌림노래처럼 계속하던 노래를 멈추고 어눌하게 대답했다.

 “아, 아냐. 너무 기다리게 해서 우리가 미안. 그렇다고 중간에 나올 수가 없었어. 오늘 주일학교 선생님이 독감에 걸리셔서 삼거리 다방 아줌마가 대신 공부를 가르쳐 주셨거든. 그래서 중간에 못 빠져 나왔어.”

 “마, 맞아.”

 활달한 소녀 옆에 선 깡마른 소녀가 그 이야기에 동조했다. 친구들로 보이는 소녀들의 등장에 윤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진수 오빠 패거리네? 그런데 오빠는 왜 저래?”

 활달한 소녀가 말했다.

 “몰라. 갑자기 어디가 아픈가 봐.”

 윤주는 손에 든 곰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말이 곰 인형이지 오래 빨지 않은 탓에 녹색 이끼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는 꾀죄죄하고 낡은 것이 거의 넝마 수준의 인형이었다.

 어른들은 그런 지저분한 인형은 당장 버리라고 했겠지만, 두 친구는 윤주가 들고 있는 지저분한 인형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후우. 오늘도 얌전한 척 하느라 죽는 줄 알았네. 아빠가 파수대라서 괜히 눈치 보여. 그 아줌마 남편이 파수대에서 짤려서 지금은 평신도잖아. 그래서 그 아줌마 앞에서는 왠지 까불거릴 수가 없네. 흐흐흐.”

 단발머리의 소녀는 연신 예배당 현관문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어디 갈 거야?”

 병약한 소녀가 물었다. 하얀 피부의 윤주는 그저 물끄러미 두 친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응? 또 내가 정해야 하는 거야?”

 단발머리의 소녀가 자신에게 향한 친구들의 눈길을 의식하고 말했다.

 “........”

 두 친구는 여전히 그 소녀를 응시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그래. 오늘도 이 몸이 결정하지. 오늘은.......”

 그 때, 예배당의 현관문이 열리며 어른들이 쏟아져 나왔다.

 “앗! 어른들이다! 잡히면 우린 끝장이야. 일단 예배당 뒤로 숨자!”

 “응!”

 단발 소녀의 이야기에 나머지 두 친구가 바로 동의하고는 어른들이 술래고, 그들이 도망가는 술래잡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놀이가 시작되자, 윤주도, 병약한 소녀도, 단발의 대장격인 소녀도 ‘까르르, 까르르.’ 웃음이 넘쳐났다.

 

 “선영아?”

 소녀들의 뒤에서 굵지만 다정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에 과거의 기억에 젖어있던 선영은 깜짝 놀랐다. 비록 현재보다는 젊은 목소리였지만, 틀림없이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톤이나 느낌이 얼마 전까지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그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느낌이 푸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지금 자신에게 보이는 장면들이 잃어버린 과거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났으면, 집에 가야지. 주일에 누가 그렇게 웃으면서 떠들고 다니니?”

 기억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훈계하는 듯한 이번의 목소리는 현재 그녀가 느끼는 아버지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선영의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래서 그만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 벗어나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거의 10여 년 전에 쓸려나간 기억을 다시 언제 생각날지는 모를 일이라 포기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소리에 소녀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어....... 어쩌지?”

 윤주가 단발머리의 소녀에게 다시 의사를 물었다.

 “뭘? 어쩌긴 도망이다! 가자!”

 단발머리의 소녀는 친구들의 손을 이끌고 예배당의 뒤편으로 내달렸다.

 “자, 잠깐만. 난 아직 준비가.......”

 “나....... 나도.”

 각자의 어설픈 불만을 한 마디 씩 하긴 했지만, 두 친구는 그 소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는 선영의 아버지가 다그치는 음성이 이어지며, 선영은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고, 눈앞에는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