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햇살 아래에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서자 류 탐정의 시야에는 온통 먹먹한 햇살의 잔상이 가득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실내의 실루엣이 점점 살아났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책장 옆으로 신문지로 도배된 벽면이 보이고 그곳에 푸른빛을 띠는 문양이 눈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류 탐정은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낑낑대며 겨우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문양이 새겨진 벽으로 류 탐정이 다가가 어설프게 붙어있는 신문지를 뜯어내자 푸른 곰팡내가 방안에 날리며 코끝을 간질였다.

 뜯어낸 신문지 아래에는 달력 뒷면의 흰 배경에 그려진 진홍빛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진홍빛은 일반적인 도료가 내는 색깔이라고 하기에는 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피가 말라붙어 만든 색깔이었다. 그리고 문양 주위로는 퍼런 곰팡이가 피를 양분 삼아 외곽으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진홍빛 꽃잎의 문양. 그것은 류 탐정이 어디선가 본 문양이었다.

 바로 보혈의 집 보육원 철문에 그려진 뾰족한 꽃잎의 붉고 거대한 꽃.

 “보혈의 저주......”

 류 탐정은 보육원의 할머니가 한 말을 떠올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더 다가가 그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진홍빛 문양은 단순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것은 얇은 세필로 꽃잎의 모양에 맞춰 반복적으로 적은 글이 빼곡하게 모여서 문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 주의 보혈은.......’

 끝없이 써내려간 반복된 글귀는 다름 아닌 그가 신도로 처음 온 날 저녁 그가 흘린 피를 보고 맹수가 목청 높여 부르던 그 찬송가였다. 그리고 얼굴에 그 피를 묻히고 서있던 류 탐정을 맹수가 ‘보혈의 증인’이라고 불렀었다.

 

 ‘보혈의 저주....... 보혈의 증인.......’

 

 류 탐정은 일단 생각을 멈추고 그간 자신이 알아낸,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한 일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기 위해 얼마 전 생각을 정리한 휴대폰 메모를 열어 보았다.

 '10년 전과 유사한 사망사건, 빠른 부패의 원인, 보혈파, 사망자가 찾아 나선 뭔가, 이맹수의 노래의 누군가, 자신의 자료에 손을 댄 누군가, 보혈의 저주.’

 그는 저장된 내용을 읽고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메모에 오늘 문양을 보고 얻은 단서를 추가하였다.

 ‘피로 쓴 꽃모양 문양의 찬송가, 보육원 대문의 붉은 꽃, 피의 주인, 피의 문양을 숨긴 사람?’

 휴대폰에 메모를 다시 저장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벽면에 위치한 문양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신문지로 문양을 덮어두려고 떼어낸 신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 신문들의 날짜를 본 그는 뭔가 이상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2015년 5월 19일.’

 문양을 덮은 신문의 날짜가 모두 동일한 날짜였으며 벽면에 도배된 다른 신문들보다 색이 덜 바래있었다.

 벽면의 다른 신문 벽지의 날짜를 살펴보니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 2년 전의 신문들이었다.

 물론 2년 전에 신문지로 도배한 벽면에 어느 날 피의 문양을 그린 달력 종이를 붙이고 다시 위에 새로운 신문지로 덮어 둘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2015년 5월 19일.’

 왠지 자꾸 그 날짜가 눈에 거슬렸다.

 류 탐정은 혹시 그 날 서울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세상에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곰팡이가 군데군데 잠식한 신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 사고가 없는 나름대로 평온한 날이었다. 단지 5.18 민주항쟁이 있었던 다음날이라 5.18 행사에 무성의한 정부에 대한 비판 기사와 언제나 있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갈등 이야기 그리고 유명 스케이트 선수의 은행광고 사진, ‘IS’의 ‘라마디’ 점령 소식 등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계속 류 탐정은 그 날짜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고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고, 혹시나 과거 자신의 행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싶어서 휴대폰의 과거 메모와 달력의 스케줄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아무 일도 없는 날이었다.

 

 한동안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때.

 류 탐정의 뇌리를 스치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사건 자료 중 순서가 바뀌어 맨 위에 올려져 있던 검시 관련 자료의 첫 장을 열어 보았다.

 

  사망 추정 시간 : 2015년 5월 12일 경

  시신 발견 시간 : 2015년 5월 23일 오전 8시 20분

 

 자신의 촉이 맞았다는 사실에 류탐정은 오랜만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그 신문은 사망자의 사망 추정 시간 이후, 시신 발견 시간 이전에 발행된 신문이었다.

 그것은 사망자가 사망한 시간 이후에서 사건조사가 시작되기 이전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문양을 숨긴 것이라는 방증이었다. 

 만약 그 문양이 보여 졌다면 경찰의 사건 기록에 남아있을 것이며, 피를 이용한 기괴하고 엽기적인 문양으로 말미암아 틀림없이 사고사 이외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건 기록 어디에도 이 문양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며, 조사 또한 추가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류 탐정은 잠재적인 용의자는 신도면 전체의 주민 중 10년 전 사건 이후 현재까지 거주한 주민일 수도 있지만 그 정확한 명단은 아직 슈퍼 주인 강 씨에게 받은 상태도 아니며 신 경위의 말마따나 경찰도 아닌 민간조사원이라는 신분의 자신이 그들을 일일이 취조하고 조사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먼저 주변에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작하고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단서나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조사를 확대해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유력한 용의자는 남편의 실종신고를 한 ‘양 마담’이 첫 번째 일 것이며, 그녀가 아니라면 양 마담에게 상처치료를 받는 도중에 사망자의 사건기록에 손을 댄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양 마담의 경우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추가적인 질의를 통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류 탐정은 이 사건의 범인 또는 공범이 그녀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러하다면 사고사로 종결될 사건을 굳이 자신까지 불러서 조사를 부탁하고, 그리고 어젯밤에 신 경위의 폭로로 류 탐정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을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재신임까지 밝히며 조사의 진행을 독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류 탐정이 양 마담을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맹수와의 소동이 있던 날 밤, 그가 양 마담에게 손바닥의 상처를 치료를 받고 있을 시간에 사건 자료의 맨 위에 사망 추정 시간과 시신 발견 시간이 기입된 항목을 올려놓은 ‘미지의 인물’이었다. 

 류 탐정은 그 인물에 해당할 수 있는 사람을 그동안 신도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입해 보았다. 그리고 그 사건에 이맹수가 등장하였으며, 그 날의 일에 대해 발끈하고, 양 마담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과 함께 류 탐정을 매몰차게 쫓아낸 보육원의 꼬장꼬장한 할머니.......

 

 그의 직감이 다시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혈의 집 보육원.......'

 얼마 전 할머니의 일갈에 놀라 자신이 허둥지둥 물러섰던.......

 특히 신문지로 가려진 문장과 같은 문장을 본 것은 보육원이 유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방문에서 할머니의 노호에 지리 겁을 먹고 물러서서 아무런 정보나 단서도 확보하지 못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각오하고 반드시 조사를 완료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어제까지의 그였다면 또다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 부적응자.

 그것이 어제까지의 류 탐정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류 탐정은 웬일인지 뚜렷한 목표의식이 느껴졌다. 비록 괴상한 과거의 기억으로 잠시 주저앉아 있긴 했지만 그건 나약한 자신의 과거가 자신을 다시 굴종(屈從)의 수렁으로 끌어들이려는 계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밤까지 그를 애워싸고 있던 어두운 껍질은 양 마담이 가볍게 깨부숴 주었다. 그녀의 무한신뢰가 류 탐정에게 어쩌면 새로운 기회를, 아니 새로운 생명을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이번 사건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락으로 떨어지려던 자신에게 손을 건넨 양 마담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이 길만이 양 마담의 의뢰를 완수하고 그녀의 믿음에 대해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