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군요. 뭐 혹시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예상하긴 했었습니다만.”

 

  차드와 라네스는 아세라가 있는 호수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일의 전말을 설명 중. 듣고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세라를 보며 내심 한마음으로 외쳤다. ‘그럼 소개하지 말았어야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왜 해준 거야?!’

  특히 같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라네스는 고개를 숙인 채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차드는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정령들의 왕이고…. 어쩌면 그도 라네스와 같은 피해자일지도 모르니.’

 

  한 인간과 함께하는 정령이 사정을 헤아리며 따지고 싶은 기분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아세라는 그들에게 다가가 차드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아리를 내려다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삼월목의 지팡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숲속에 있는 커다란 호수는 무형의 거대함을 지닌 정령왕을 제외한다면 너무나 평온해보였다. 그 고요함은 마치 영혼까지 치유해주는 기분을 안겨준다. 그 덕분인지 지팡이를 꼬옥 껴안고 자는 아리의 표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밝아져만 갔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이세계인과 함께 다시 돌아올 줄이야.”

 

  머나먼 옛날의 이미 떠나간 친구와의 추억…. 그 시절 자신이 친구한테 주고, 그가 선물 받은 그 나뭇가지로 만든 지팡이. 아세라는 그렇게 감회에 잠겨들었고, 차드는 그런 그를 보고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삼월목. 옛 시대의 언어로 쓰이는 이 단어는 고대어를 깊이 배우지 못한 차드에게도 마냥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말의 뜻은 둘째 치고, 언뜻 들은 설명도 그냥 하늘과 대지의 정기를 함께 받은 나무라는 설명뿐. 자세한 건 베일에 싸여있을 뿐이다.

 

‘그런 나무가 정말로 있는 걸까? 이 숲에 있다면 그건 뭘 의미하는 걸까?’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로군요.”

 

  어느새 얼굴을 바짝 들이댄 아세라 탓에 차드는 뒤통수를 바닥에 찧었다.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며 정령왕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인 물음은 잘 모릅니다만, 지금 본인은 그 질문에 대답해주지 못합니다.”

“그건…… 어째서죠?”

“이 세상의 신과 제가 맺은 맹약 때문이죠.”

 

  으드득! 또다. 또 그 광황인지 뭔지 하는 빛의 신이 나왔다. 무의식중 이를 갈며 차드는 어지간히 그 신께서 자신을 눈에 가시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다. 

  이번 경우는 딱히 노리고 나온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면 단순한 피해망상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것이다. 차드는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가라앉히고 라네스를 돌아봤다. 혹시 그녀라면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의문을 풀어줄지도….

 

‘죄송하지만 저도 아시드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요.’

‘에?! 어째서?’

‘그 이유는 정령왕과 같아요. 어떤 정령도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할 걸요’

 

  한숨 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항상 자신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아리가 그리워졌다.

 

‘그래도 역시 볼테스 때보다는 신용이 가네. 걔는 그냥 존재 자체가 수상했으니.’

 

  이런 잡생각을 하면서 차드는 아리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 더 편하게 쉬었으면 해서 무릎베개를 해준 덕분인지, 아리는 얼굴은 정말 평온해보였다. 보고 있으면 어쩐지 졸려올 정도라서, 차드는 참지 않고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함께 따라온 나뭇잎정령 스림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남은 한쪽 무릎을 베고 눕는다. 그가 슬며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소녀는 기쁘게 미소 짓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네스는 아세라에게 눈짓을 주며 무언으로 대화를 나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까지 써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아세라가 고개를 저어보이자, 라네스는 고집스럽게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차드의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아세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때가 아니거늘….”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을 의식하고 보면, 예전에 볼테스가 시켜 떨어지는 목표를 깨뜨리는 훈련을 한 장소에 서있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나무가 떨어뜨리는 건 열매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백 눈송이라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비슷한 나무 밑에서 비슷한 짓을 했었지.”

 

  그리고 지금도 차드는 그 당시 아리가 검 체조라고 조롱한 움직임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변함없이 베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쩐지 즐거웠다.

 

“왜 이렇게 기쁘고 재미있는 걸까.”

 

  차드는 원래 이렇게 격하게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 세계에서 이런저런 일에 치이느라 운동할 여유가 없는 탓인지 몸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안 좋다고 생각하고 운동하려고 했지만 의욕의상실과 탈력감으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살아보겠다고 체력을 키우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군.”

 

  이게 전부다 볼테스와 아리 탓이다. 그 녀석이 반강제로 훈련시킨다고 구타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노력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 동행한 사람이 아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검술에 능숙해지려고 애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망하면 안 되겠지. 일단은 고마워해야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차드는 한 가지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자신은 원래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일을 좋아했었다. 학창시절에도 이렇게 칼을 휘두르고 있으면, 평소 자신을 괴롭혔던 근심과 분노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그저 너무 정신없어서 떠올릴 겨를이 없었을 뿐.’

 

  쓸데없이 주위 사람 눈치를 보고 체면을 신경 쓰고 있었던 시절, 차드는 잠깐 해보았던 검도를 그만두고 한심하고 무기력하게 휩쓸리기만 하였다. 왜 자신은 언제나 멍청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걸까. 어째서 주변의 녀석들에게 당하기만 한 걸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차드의 움직임은 약간 주춤거렸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몸을 제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간섭하는 힘에는 어떤 불쾌감도 거부감도 일어나지 않아, 차드는 그 의지에 순순히 순응하며 검을 휘둘렀다.

  머릿속을 맴도는 하찮은 상념들을 전부 털어버리고 검 한 자루 들고 춤췄다. 칼날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눈송이들이 깨끗하게 두 동강 났다. 방금까지 그냥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때와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그 통쾌한 손맛에 차드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즐겁게, 기쁘게, 몹시 흥겨워하며 날카로운 예기로 허공에 선을 그린다. 어느 새 차드는 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검무를 추고 있었다.

 

‘힘들지 않아. 오히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편안하고 힘이 나! 즐거워.’

 

  마치 주위에 있는 모든 게 자신을 돕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차드는 볼테스에게서 배운 기초를 바탕 삼아 하나의 검술을 배웠다. 누군가의 지도에 의해….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차드는 그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는 라네스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곳은 아마 꿈속. 그러니 갑작스럽게 이 장소에 있을 수 있는 거고, 지금부터 함께하기로 한 정령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째서 내 이름이 아시드레이야?”

 

  라네스가 만든 꿈의 세계 속에서 차드는 미소 짓는 그녀에게 물었다.

 

“몰라요. 왠지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을 뿐. 딱히 이유는 없어요. 이름이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 소중한 누군가가 붙여줘야 하는 것. 앞으로 함께하는 동반자로써 저는 그 이름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이름을 부여한 거예요. 그렇게 납득하시면 되요.”

 

  꿈속에서 차드는 그런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차드가 아닌 아시드레이였다. 잊어버린 이름이 살짝 생각났다. 원래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

 

“……역시 기억 안나.”

 

  다시금 그 이름이 흐릿해지면서 기억 안 나자 이번에도 그는 순순히 포기하였다. 그렇게 해서 청년은 차드가 아닌 아시드레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야.’

 

  청년은 뭔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고 해도 꿈속이라 그 말소리는 라네스에게 다 들렸지만. 이윽고 그의 눈앞은 깜깜해졌다.

  아련한 기분에서 벗어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처음 차드는 자신의 무릎을 벤 상태로 빤히 올려다보는 아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리)”, “……….(차드)”, “……차드?”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차드는 느꼈다. 온다! 언제나 나오던 그것이! 평소에는 허망하게 당하고만 있었지만 이번에는 피해보이고 만다!

 

‘내 머리는! 심심할 때마다 때려도 좋은 깡통이 아니야!!’

 

  그는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어느새 소환되어 아리의 손에 잡힌 지팡이는 여지없이 차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결국 아무리 젖혀봤자, 아리와 스림에게 무릎을 내준 상태에서 떨어질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아리의 지팡이는 기다란 형태라서 그녀가 누운 상태에서 휘둘러도 충분히 따라잡히는 것이다. 콩~!

  “크윽!” 들리는 소리는 매우 가벼웠지만 차드는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였다. 아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눈과 상기된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이 애, 도대체 누구얏!!”

 

  불합리한 폭력까지 행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고작 그거냐?! 차드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리가 가리킨 스림을 보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 아리 외에 누군가가 다가온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이 맞아야하는 이유랑 이 아이는 관계없어 보였다.

 

“아는 사람의 동생이야. 그건 그렇고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너 툭하면 내 머리 때리는 거 그만뒀으면 해! 그러다가 내 머리가 남아돌지 않는다고!”

“흥! 나는 지금까지 네가 맞을만했으니까 때렸던 것뿐이야! 그보다 아는 사람 동생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무릎베개를 해줘도 되는 거야?!”

“뭔 상관이냐?!! 그리고 말 돌리지 좀 마!! 내가 맞을만하다고 해서 무작정 때리기냐!! 맞는 사람 입장을 좀 생각해보라고!!”

“힘 조절은 확실히 했어. 크게 안 다치게끔 때렸단 말이야! 그거면 충분하잖아?”

“충분하지 않아! 아니 납득할 수 있을까보냐!! 폭력반대! 뭐가 크게 안 다치게끔 이야! 그러니까 맞는 사람 기분을 생각하란 말이야!!”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서로 티격태격하는 아리와 차드였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라네스가 홀연히 나타나 둘을 달래듯 말렸다. 

 

“아시드 그만하세요. 스림이 깨잖아요.”

 

  차드는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으며 아래를 살폈다. 커다란 나뭇잎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소녀는 이런 소란 속에서도 평온한 얼굴로 차드의 무릎위에서 잠들어있었다. 아리는 그런 소녀를 불만스럽게 보았지만 억지로 그녀를 깨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차드, 이분은?”

 

  대신 아리는 차드 옆에 있는 정령이 신경 쓰였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물었다. 라네스는 그런 아리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어주며, 현재 구현한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정중하게 몸을 숙여보였다.

 

“이제부터 아시드와 함께하게 된 라네스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 저야 말로…. 그런데 아시드? 저기 그게 누구죠?”

 

  아리의 질문에 라네스는 당연하다는 듯 차드의 목을 두 팔로 껴안았다. 순간 아리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확인삼아 차드에게 물었다. 물론 그는 그런 아리를 왠지 모르게 무서워하며 대답해야 했다.

 

“차드. 네 본명이 아시드였어?”

“아니.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기억 안 난다고. ‘아시드레이’는 라네스와 함께하게 되었을 때 그녀가 지어준 이름이야. 본명하고는 관계없어.”

“흐- 응~ 그래? 흐음….”

 

  어쩐지 탐탁지 않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며, 아리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심각해하던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마디를 툭하고 내뱉으며 다시 눈을 떴다. 

 

“마음에 안 들어!”, “응? 뭐가?”, “네 이름말이야!”

 

  아리는 라네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고집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치켜보았다.

 

“정령이시여! 어째서 아시드레이죠?! 그 이름이 그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는 자신의 본질을 깨우치는 길을 걷는 자여. 그 이름이 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저와 함께할 맹약자를 보고 합당한 이름을 떠올렸을 뿐입니다. 설마하니 흐름의 정령인 이 저에게 심안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라네스 또한 지지 않고 아리를 흔들림 없이 직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둘을 번갈아보며 차드는 어쩐지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왜 내 이름가지고 당사자도 아닌 아리와 라네스가 열을 내는 거지?’

 

  방금 전에 들은 ‘이름이란 다른 소중한 누군가가 지어줘야 하는 것'이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차드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아기였을 때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여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의 자신은 확실히 다 자란 성인이었다. 차드는 눈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저기! 내 이름은….”

 

“시끄러워! 차드가 똑바로 하지 못하니까 이렇잖아!!”

“시끄러워요! 아시드가 처음부터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 다툴 일은 없잖아요!!”

 

  서슬 퍼런 그녀들의 구박에 의해 차드는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어…라…? 나 틀림없이 너무하다는 생각에 따지려고 했는데.’

 

  신경전을 벌이다가 협심해서 공격하는 그녀들을 보고, 차드는 처음 기세를 죽이며 ‘내가 대체 뭘 했기에!’하고 울상 지으며 억울한 심정을 담아 지금의 부당함을 한탄했다. 

 

“어째든 그 이름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게 즉석에서 대충 짓는 건 너무하다구요!”

“이 이름의 어디가 즉석에서 대충 지은 이름이라는 거죠!? 저는 그런 당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 이름은 충분히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이에요!”

“아니 전혀요. 그렇지 않아요!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차드와 함께 시련과 위기를 해쳐온 제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아닙니다!”

“……당신, 지금 자신이 영로술사로서 너무 고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라네스는 팔짱을 끼면서 보란 듯이 차드의 어깨에 자신의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왜소한 덩치에 어울리는 좁은 어깨임에도, 라네스는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차드의 머리에 팔까지 기대며 자연스럽게 앉아있었다.

  그런 그녀의 지나친 접촉에 차드는 점점 숨이 거칠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정령인 그녀의 몸에서 부드러움과 감미로운 향기가 느껴졌다. 틀림없이 실체가 없는 정령이건만 그 체취나 감촉이 너무나 선명해서, 차드는 흥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우와 부드러워… 직접 손으로 마음껏… 무슨 생각을 하고 자빠진 거야, 난!?’

 

  뭔가 야시시한 번뇌에 휩싸인 차드를 보고 아리는 분한 듯 눈썹을 씰룩거렸다. 눈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이는 저 행동, 아직 깨닫지 못한 아리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아리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억지인 말을 꺼내면서….

 

“저는…! 나는…! 기분 나빠요!! 그 아시드레이 어쩐지 제 이름과 비슷하잖아요!!”

“……예?”, “……뭐, 라고?”

 

  이름이 잘 못되었다고 계속 주장하기는 힘들다. 차드와의 관계를 내세우는 것도 정령과 맹약을 맺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싫어! 마음에 안들어안들어! 정말! 지기 싫어! 인정하기 싫어!’ 그렇게 고민하다가 꺼낸 억지 같은 주장.

  순간 라네스는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냐며 이상한 눈초리로 아리를 째려봤고, 차드는 얼빠진 얼굴로 다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어야 했다. 아시드레이, 아리스니츠. 아무리 비교해 봐도 첫 글자만 같다는 것을 제외하면 비슷한 곳은 찾기 힘들다.

 

“그 첫 글자가 기분 나빠요! 마치 차드와 남매사이라도 된 것 같잖아요?! 만약 그 이름으로 우리가 나란히 서있으면 남매라고 오해 할지도 몰라요. 전 그런 거 절대! 싫어요!”

 

  한마디 한마디가 차드의 입장에서는 화살이 심장을 무자비하게 파고드는 말이었다. 설령 그게 단순히 트집 잡는 말이라고 해도, 그 서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평소에 내심 이런 여동생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싫어다니…. 쇼크다.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됐어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 안 돼 왠지 눈물 나올 것 같아.’

 

  이런 예상이상으로 충격 받아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는 차드를 놔두고, 라네스는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고 절대지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는 아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죠? 말해두겠는데 차드라는 ‘비틀어진 이름’은 아시드 본인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어요. 당신은 그런 어중간한 상태에서 우리들보고 계속 함께 있으라는 말인가요?”

 

  약간의 가시 돋친 말을 듣고 아리는 일단 시선을 내리깔며 상념에 잠겼다. 확실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언제까지 제대로 된 이름 없이 나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어째서인지 몰라도 저 정령이 지은 이름은 정말 아니야!’

 

  아리는 정말 심각하게 번민하며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맹약 맺는 것을 못하게 하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전력이 될 정령을 거부하는 것은 바보짓. 그렇다면 남은 차선책은….’ 

  한동안 시간을 들여 고민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아리는 다시 라네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의 눈빛에는 방금 전에 없었던 당당함과 자신감이 가득 차있었다. 

 

“차드레이!”,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네스에게 아리는 은근히 흐뭇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드의 제대로 된 이름! 라네스, 당신이 차드에게 부여한 이름 일부분을 합쳐 제가 새로 지은 차드의 이름이에요. 어때요? 제가 차드에게 이름을 부여한다고 해서, 정령님이 차드와 함께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호칭까지 써가며 말하는 아리를 보고, 차드는 자신의 새 이름이 될 예정인 그 언어를 한번 곱씹어보았다. 차드레이, 차드레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차드의 기분을 느꼈던 걸까? 라네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아리 또한 라네스와 마찬가지로 차드를 돌아봤다. 아리의 눈은 라네스와는 다르게 강렬한 살의로 번뜩였다.

 

‘이거… 협박이지? 그렇지? 나는 협박당하고 있는 건가….’

 

  마치 자신이 지어준 이름을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눈빛. 차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곤혹스러워했다.

 

‘아리가 지어준 이름은 나쁘지 않은데. 왠지 저러니까 반발심이…. 그렇다고 라네스가 지은 이름도 이상하게 꺼림칙하고…. 어쩌지? 어쩌면 좋을까. 아~ 골 때리네!’

 

  그 이전에 어느 쪽이든 후환이 두려워, 차드는 이도저도 못하고 그녀들의 시선에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뜻밖에도 먼저 한발자국 물러선 자가 있었으니, 바로 흐름의 정령인 라네스였다.

  앞으로 함께하게 된 소중한 사람이 지금 상황 탓에 괴로워하는 게 느껴지자, 흐름을 관장한다는 존재답게 먼저 자연스레 물러난 것이다.

 

“좋아요. 내키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지은 차드레이라는 이름을 인정하기로 하죠. 드레이 또한 차드라는 이름에 익숙해졌으니 갑자기 바꾸는 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리, 당신처럼 드레이를 차드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것은 인정하시죠?”

 

  만약 이 세상에서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이가 없었다면, 세상은 아직도 충돌과 혼란이 거듭되는 혼돈 속에 침체되어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아리는 라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로서는 이미 익숙해진 차드의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으니, 그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차드는 정식으로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악령의 숲에서 카더와 함께 사라진 나무의 정령 아이즈가 지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나는 잠시 동안 스림을 맡아 준 드레이님께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나는 드레이님께 이런 짧은 말만하며 이곳에서 물러날까합니다.”

 

  나무의 아이즈는 아직 잠들어있는 나뭇잎의 스림을 다급하게 안아들고, 안타깝다는 듯이 얼굴을 흐리며 차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도약하며 급하게 이곳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이윽고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가 ‘오오!!’하며, 거친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차드들을 지나쳐 쫓았다.

 

“뭐, 뭐야? 저거….”

 

  거센 바람 탓에 흩날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아리가 얼떨떨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차드와 라네스는… 그저 외면하며 못 본 걸로 칠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이곳에서 나갈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비교적 짧은 소동이 지나간 후 곧바로 나타난 아세라가 차드에게 물었다. 갑자기 등장한 다른 정령을 보고 아리는 다시 얼떨떨해하였지만, 그 표정은 얼마 안가 경악에 겨워 눈이 휘둥그레진 것으로 바뀌었다.

 

“호, 혹시! 당신은 두 신들마저도 인정한 전설속의 대정ㄹ….”

“이곳으로 나가시면 바로 숲 건너편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아세라는 아리의 말을 날카롭게 끊어버리고 어느 방향으로 한손을 뻗어 휘저었다. 그러자 그 방향은 공간이 순식간에 일렁이면서 여러 풍경이 겹쳐졌다. 환상의 길, 이전에 차드들과 니레가 지나쳤던 것과 같은 길을 아세라는 의지만으로 새로이 만든 것이다.

 

“혹시나 이 세상의 운명에도 변덕이 있다면, 본인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사양 말고 와주셨으면 해요. 작별인사는 그때를 위해 남겨두고 싶군요.”

 

  차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직접 그의 손에 작은 나뭇조각을 쥐어주며, 정령왕 아세라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나름대로의 다시 만나는 것을 기대한다는 말이에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차드에게 라네스는 간단명료하게 해설해주며, 덤으로 이 나뭇조각만 있으면 차드가 안개 속을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고 설명해줬다. 차드는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거대한 호수를 둘러보았다.

 

‘서두르는 느낌이었지. 이쪽 사정을 헤아려 준건가? 그래도 여러모로 아는 게 많아 보이니 좀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차드는 애써 그런 마음을 접고, 라네스와 함께 심각하게 상념에 잠긴 아리를 데리고 숲 밖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길에 접어들었다.

 

 

 

 

  정령의 숲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3개의 달무리 밑 나무아래에서, 아세라는 멍하니 서서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청색 빛가루가 반딧불처럼 요 주변을 떠돌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싼다. 달은  순수함을 자랑하는 녹음, 하찮은 벌레, 멍하니 서있는 아세라마저 차별 없이 비추며 밝게 그 존재를 포옹해주는 것이다. 이곳은 그러한 풍경의 장소.

  이곳은 세계와 세계사이의 경계, 환상과 현실사이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장소. 또한 현재로써 유일하게 정령왕인 자신만 아는 금단의 장소.

 

“과연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몽환적인 곳에서 아세라는 거대한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