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드가 그 이름을 입에 담자 갑자기 둘 주변으로 거친 폭풍이 일어났다. 고오오!!

  폭풍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모든 것을 빨아드렸다. 나뭇잎, 흙, 수분 등.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삼키며 정신없이 차드와 라네스의 주위를 감싸고, 그 둘을 제외한 모든 걸 배제하였다. 그리고 차드는 어느 새 현실에서 멀어져 백일몽을 꾸듯 보게 되었다.

  은하수가 흐르는 어두운 허무 속에서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는 라네스의 모습을….

 

「그것은 상내방의 내면이 추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영혼으로 묶는 정령과의 맹약은 이렇게 모든 걸 내보이고 공유해야 성립되는 개념이지.」

 

  그것만으로 둘은 정령과 그 동반자로써 함께하게 되었다. 끌려와 말려든 것들은 하늘을 유영하며 천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차드는 라네스와 얼굴을 마주하며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라네스는 그런 그에게 웃어주었다.

  차드는 그녀가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봤는지 모른다. 어쩌면 추악하고 혐오스러울지도 모르고, 너무나 한심하고 못나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일지도 몰랐다. 탁! 까놓고 말해 자신 없었다. 그녀와 비교하면 과연 자기 자신의 내면이 어떨지가….

  그럼에도 그녀는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웃어주었다. 그녀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반겨주었다. 살짝 눈가에 눈물이 어릴 정도로… 너무 기뻐서 환호하고 싶다는 눈빛으로…. 너무 과장스러운 건 아닐까 멋쩍어하며 차드는 그런 그녀에 마음에 답하듯 웃었다. 

 

“크아아아악!! 이럴 수 없어!!”

 

  그때 한 남자의 괴성이 그런 둘의 분위기를 깨트렸다. 나름대로 잠자코 지켜봐준 카더가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더는 진짜 덩치 값도 못하는 모습으로 엎드려 깜짝 놀란 둘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크흑! 이, 이것으로 18번째 실연! 정녕 내게 봄은 오지 않는 것인가?!”

“……저기 이봐요.”

 

  처절한 덩치의 말은 이상하게 같은 남자에게 사무친 공감을 안겨주었다. 그 탓에 차드는 자기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위로할 말은 딱히 없지만 어쩐지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차드를 라네스가 결사적으로 막았다. 

 

‘그만두세요. 저 인간은 건들면 바로 폭발할 수 있는 위험물이니까.’

‘아니 저건 폭탄이 아닌데…. 어라? 목소리 안 내도 서로 말이 통하네?’

‘우후후. 우리는 앞으로 함께 하기로 한 사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라네스를 보고 있으면, 차드는 왠지 아련한 기분에 잠겨들 것만 같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한다는 게 이런 것이었나?

  짧게 주고받은 말들이었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금까지 가족에게서조차 느껴본 적 없는 안락함이었다. 기쁨과 신기함 그리고 편안함, 그 모든 게 돌도 돌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 조화는 영혼과 영혼이 맺어진 결과 생긴 부산물. 

 

“하아~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목표를 위해 힘내볼까!”

 

  차드가 정령과 함께하는 여운에 잠기고 있는 사이, 카더는 이미 실연의 아픔을 깔끔하게 털어내고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른 회복에 차드와 라네스는 어이없어하였다. 허나 카더의 관심은 이미 그런 라네스와 차드에게서 멀어져버렸다. 다시 커다란 창을 어깨에 걸친 그는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시드. 그를 따라가요.’, ‘……아시드? 나?’, ‘그럼 아시드말고 또 누가 있어요?’

 

  근데 라네스는 방금 저 사람을 위험물 취급하지 않았던가? 차드는 얼떨떨해하면서 순순히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카더는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기색을 느끼고 다시 차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차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정령은? 이미 네 안에 들어갔냐?”

 

  카더의 말에 차드는 라네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 옆에 있어야할 라네스는 그곳에서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시드 안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 그래? 어쩐지 적응 안 되네. 근데 왜 들어간 거야? 밖에 나와 있어도 되잖아?’

‘모르는 소리를…. 아시드가 저 사람에게 딱 한 달 동안만 한번 시달려보세요. 제가 이러는 이유를 뼛속 깊은 곳까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머릿속에서 라네스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드는 신기해하며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되새겼다. 어째서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그런 동작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걸까?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기 자신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상념을 털어버리기 위해 차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저 사람을 꼭 따라가라고 시킨 거야?’

‘그거야 당연히 아시드가 헤어진 일행분과 다시 재회하기 위해서죠.’

 

  차드는 바로 납득했다. 요컨대 라네스는 아리를 찾기 위해서는 저 남자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지 구체적인 이유는 묻지 않았다. 순간 ‘이렇게 납득해도 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일단 가보면 다 알게 될 것 같아, 차드는 그녀의 말에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흐음….”

 

  하지만 정작 따라가야 할 카더는 걸음을 옮기지 않고, 멍하니 라네스와 대화하는 차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차드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카더가 말을 걸었다.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전혀 초면입니다만?”

“그래?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드는데…. 왜 이럴까?”

 

  카더를 보고 차드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라네스의 인식이 차드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평소의 차드라면 초면인 카더의 저런 반응에도, 별거 있겠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라네스와 함께한 순간부터, 차드는 무의식중으로 카더를 위험인물로 인식해버리고 말았다. 본인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정령의 사상에 물든 결과다.

  그런 차드가 점점 덩치와는 안 어울리는 애절한 표정을 짓는 카더를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불길한 상상하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런 차드를 보다 못한 라네스가 등 뒤에서 나오며 외쳤다.

 

“당신! 이제는 남색까지!!”

 

  그런 라네스의 반응을 보고, 카더는 애절한 표정을 지우며 그런 그녀를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라네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고, 이번에는 자기 얼굴을 파랗게 물들며 카더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우웩!”

 

  차드는 뒷걸음질 치는 것을 멈추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구역질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 심정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욱! 그런 말 하지 마! 난 그런 거, 죽을 만큼 싫어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웩!!”

 

  그렇게 카더는 한동안 헛구역질을 하였다. 잠시 후 진정된 카더는 뒤에서 누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 끄고 자신이 가려는 길을 가고 있었다. 차드는 그런 그를 뒤따르며, 자기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있다는 라네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마음과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그것은 확실히 평범한 대화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순수한 의사가 왜곡 없이 전해지는 것. 기쁨과 미움, 사랑과 분노, 상냥함과 우울함 등. 그 모든 게 아무 오해 없이 상대에게 전달되어, 받는 이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하나의 언어에 담긴 이중성이 전부 전해진다는 말이다. 의사의 전달은 순수하게 하나의 마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칭찬의 말은 그 속에 질시와 부러움이 담길 수도 있고, 매정하고 차가운 말도 때로는 상대를 걱정하거나 위하는 마음이 담길 수도 있다. 차드는 그런 모든 마음을 정령과 주고받는 것이었다.

 

‘역시 낯간지럽고 어색한데. 마치 옷이 벗겨져 전라로 마주하는 것 같아.’

‘아! 아시드, 야한 생각했죠? 그쵸?!’

‘아, 안 했… 큭! 부정할 수 없어! 아아악! 역시 적응 안 돼!’

‘괜찮아요, 다 이해하니까요. 그렇다고 저와 함께하는 걸 후회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후후 하고 웃는 라네스에게 차드는 쑥스러워하면서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부끄럽고 불안한 점도 있지만, 동시에 그는 다른 누구하고 있을 때보다 편안함을 그녀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예전 일을 떠올려본다.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을 때면 항상 상대를 의심하기 바빴던 나, 말이 혹시 잘 못 전해져 오해하지 않았을까 잘 못 들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 나. 그런 자기 자신이 이렇게 자연스레 즐겁게 대화하고 웃고 있다.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렇게 멋진 인연을 맺게 됐는데 할까보냐! 오히려 앞으로 잘 부탁해, 라네스!’

‘우후후 저야말로….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려요.’

 

  말하고 나서 부끄러워하는 차드에게 라네스는 웃어주며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차드를 데리고 계속 걷기만 하는 카더가 마침내 거대한 호수 앞에 멈춰 섰다. 차드는 카더의 등에 부딪치기 직전 걸음을 멈추고, 숲의 나무들에게 둘러싸인 호수를 둘러보았다. 

 

“아세라 아저씨!! 거기 있어요? 좀 나와 보슈, 이 양반아! 이번에도 나 실연당했어.”

 

  카더의 그 불량기 가득한 외침에 의해 호수의 수면은 슬며시 일렁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이 불어 생겼다고 착각할 정도의 일렁임이었다.

  하지만 물결은 점점 그 크기를 불리며, 이윽고 연신 철렁! 이는 소리를 내며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호수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존재감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차드는 그 순간을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지켜봤다.

  처음은 어둠의 망령, 그 다음은 정령과 광휘의 장벽이었다. 이제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나와도 차드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떠오른 그 거대한 것은 금방 형태를 이뤄, 반갑게 손을 흔들고 카더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카더.”, “………에?”

 

  옆집 아저씨처럼 카더를 반겨준 사람은 어딘지 푸근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아무리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빈말로라도 카더만큼의 덩치도 아닌 차드와 비슷한 왜소한 체격에 평범한 모습. 차드는 뒤통수를 맞은 듯 움켜쥐고 김빠진 소리를 냈다.

  커다란 호수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 그걸 보고 차드는 마치 호랑이일줄 알고 두근두근하다가, 고양이를 보고만 허탈함을 맛봤다. 그 인간 아닌 존재, 정령 아세라는 태연히 호수의 수면 위를 걸으며 카더를 보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또 실패하셨습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어때요? 본인이 소개해줄 정령은 더는 남아있질 않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차드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며 날카로운 고성을 질렀다.

 

“역시 아세라 짓이었어!!”

 

  차드는 당황하며 자기 입을 급하게 두 손으로 꾸욱 눌러 막았다. 어째서 말이 멋대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 목소리로…. 어쩐지 다른 두 사람이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차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민망함을 느꼈다. 

 

“하하하!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라네스와 함께 하게 된 인간이여.”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음성. 차드가 의아해하며 그를 보자, 아세라는 왼손을 가슴에 가져가며 그런 그에게 약간 허리를 숙여보였다.

 

“본인은 정령왕(精靈王) 아세라. 현존하는 모든 정령들의 정점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을 보며, 차드는 상황을 잊고 아낌없이 감탄을 터트렸다. 역시! 정령은 저래야한다. 겉보기와는 다른 거대한 분위기를 풍기는 범상치 않은 존재가 저렇게 겸손한 태도라니!! 그런데 정령왕? 왕? 차드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무심코 물었다.

 

“저기 그 ‘왕’이라는 말, 신황참마전의 광황의 검인 한이라는 사람이 쓴 이상한 호칭 같은 거 아닌가요? 그걸 왜….”

 

  아세라는 차드의 물음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해줬다.

 

“그건 인간들과 이름을 잊어버린 몇몇 유사인종들에게만 통용되는 인식입니다. 저희 정령과 에렌, 그리고 신들도 포함해 그 이외의 존재들에게는 낮선 말이 아니죠. 다른 세상에서 온 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 세계에서 쓰는 제(帝)나 황(皇)이랑 같은 거랍니다.”

 

  마지막 말은 평범한 이곳 언어로 들렸지만, 이상하게 거기에 담긴 뜻은 원래 썼었던 말로 변환되어 들려왔다. 황과 제, 붙인다면 황제가 되는 단어. 전부 왕(王)이나 다름없는, 아니 전대 광황의 검이 쓴 호칭중 하나인 황(?)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어라? ……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 아니 그것보다! 방금 이 사람 아니 정령! 방금 나를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언제 눈치 챈 거야?! 에? 그 전에 나 방금 뭐라고…’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충격이 모든 걸 뒤흔들었다. 그 탓에 혼란스러움 빠진 차드는 어떤 것부터 놀라야할지 헤매다가, 심호흡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래보여도 실은 정령.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을 거야.’

 

  그보다 이상한 것은 방금 저 분이 한말이다. 전대 광황의 검 한의 호칭 중 검은 무기인 칼을 뜻하고, 왕은 위대하다는 뜻이라고 아리에게 배웠다. 그런데 자신은 그 의미가 원래 세상에서 쓰는 지배자를 뜻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한 걸까.

 

‘그리고 어째서 단 한사람에게만 적용된 거지? 내가 몰라서 그런가? 역사를? 아니 애초에 누군가가 위에서 군림하거나 통치한다는 개념이 낯설어. 지휘관은 있으면서 왜?’

 

  이럴 수도 있는 걸까. 지배자 혹은 통치자는 사람에게 있어서 필요악이다. 때로는 분란의 요소도 되지만, 사람은 그런 구심점이 있어야 세력을 이루고 사회를 이룬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인간이 많은 이들과 함께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세계? 왕? 그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카더가 몰라도 되는 일이에요. 그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데 각오되셨습니까?”

“물론!! 언제라도 말해줘! 나는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사나이니까!”

 

  불타오르며 주먹을 치켜드는 카더의 모습을 보고, 차드는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자신이 못 배웠을 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없을 리는 없다. 단지 이 세상의 말에 익숙해지지 못한 탓에 그런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차드는 카더를 지켜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참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자태를 뽐내는 그를…. 아세라는 그런 카더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강한 바람이 그들 사이에서 불어오며 가라앉았다. 

  약간의 풍압과 함께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라네스가 아세라를 직시하며 말했다.

 

“아세라님. 그전에 당신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런, 이런 라네스. 그냥 평소처럼 본인을 아세라라고 부르세요. 새삼스럽게 격식을 차릴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일단 다른 사람도 있으니. 아무리 저라도 모든 정령들의 존경을 받는 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하는 라네스의 말에, 정령왕 아세라는 여러모로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라네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는 일단 라네스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먼저 저 카더라는 인간은 언제 여기에 들어온 거죠? 아는 사이인가요?”

“……친구아들 되는 사람입니다. 한 1년 전? 그때 본인의 초대를 받고 왔지요.”

“친구…. 그럼 저 인간 말고 최근에 이 숲에 들어온 인간이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아세라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그것도 두 명. 한명은 아시다시피 그대의 맹약자. 그리고 또 한명은 지금 악령의 숲에 있습니다.”

“악령의 숲!? 어째서 그런 곳에?”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라네스를 보고 차드는 갑작스럽게 불길함을 느꼈다. 이 몸서리 쳐지는 느낌은 단지 분위기가 변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 이상으로 라네스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차드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차드는 주마등처럼 아리와 보낸 짧은 일상이 떠올랐다. 첫 인상이 요정 같았던 소녀. 실은 성격은 괴팍하고 불합리한 폭력을 휘두르기 좋아하며, 투정도 많고 어리광도 부릴 줄 아는 마음이 여린 아이.

  의외로 뭔가를 가르칠 땐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겉모습과 어울리게 호기심도 많고, 무엇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도와주었다.

 

‘어째 떠오르는 게 대부분 그 아이를 험담하는 것 같아 조금 떨떠름한데.’

 

  그래도 차드는 그날 밤에 본 아리의 눈물까지 떠올리며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독설이 심하고 사람부리는 게 험한 아이지만 제발 별 탈 없이 무사했으면 싶었다. 

 

“그 악령의 숲이라는 곳은 어떤 장소죠?! 어디 있는 숲이에요?!”

“악령의 숲은….”

 

  라네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조심스럽게 설명해주었다.

 

“오랜 세월동안 가야할 길을 떠나지 않고 남은 망령들 중. 가장 한 많고, 가장 미련도 많은 악령들을 모아 가둬둔 장소입니다.”

“한도 미련도 많은 악령… 그 말은 귀신이 사는 숲?”

 

  아리라면 그런 건 술법으로 쉽게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네스는 차드가 악령의 숲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려하며 설명을 추가하였다.

 

“그 숲에 사는 악령들 중에는 오랜 세월동안 묵혀 원한을 쌓아온 위험한 것도 있어요. 또한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도 있기에 좋지 않은 게 쌓이다 못해 압축되는 중이죠.”

“참고로 그들을 그곳에다 봉인한 건 바로 본인이랍니다. 이야~ 설마하니 거기까지 원독이 쌓이고 괴물이 돼버릴 줄은 몰랐어요. 그야말로 본인이 그 때문에 이곳에 발이 묶을 정도! 웬만한 정령, 사자들도 타락할 정도니. 밖으로 나오면 세상 참 볼만해질 겁니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그런 뒷말을 집어삼킨 정령왕을 보며 차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동시에 몹시 불안해졌다.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지만, 그런 곳에 아리가 있는 것이다. 

 

“당장 가자! 안내해줘, 라네스!”, “알겠어요. 아세라님,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우리사이에서 무슨 사례의 말입니까. 라네스, 부디 하시려는 일이 잘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악령의 숲에 가실 거면 카더도 함께 데려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라네스는 아세라의 말을 듣고 카더를 한번 힐끗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거절하려는 찰나에 먼저 불만을 터트린 것은 카더였다.

 

“아세라 아저씨! 도우라는 거야? 난 지금 바쁘다고. 빨리 신부 감을 찾지 않으면….”

“본인이 소개하려는 정령이 악령의 숲에 있다면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더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설마… 그 정령이라는 게 여자 악령은 아니겠지…?”

“아니요. 확실히 정령입니다. 그것도….”

 

  정령왕 아세라는 카더에게 검지를 까닥거리며 일로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카더가 순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자, 아세라는 아무도 모르게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의 귀에다 속닥속닥 거리며 어떤 말을 속삭였다. “……정말? 정말이지?! 아저씨!”

 

“그렇습니다. 본질이 본질인 만큼 거의 비슷합니다. 오히려 저분보다… 어험! 악령의 숲에 있는 이유는 그녀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죠. 실은 그대 부탁을 듣고 제일 먼저 소개 시켜줄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 숲이 예상보다 위험한 숲이라서 말이죠.”

 

  사탕을 조르는 아이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더에게 미소 지으며, 아세라는 이러한 사정으로 부탁한다는 듯 라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로 부탁드립니다. 라네스.”, “허나 거절합니다.”

 

  물론 라네스도 그에 못지않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카더는 턱이 내려가 입을 떠억 벌렸고, 정령왕인 아세라는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말했다.

 

“에이 그러지 마시구.”, “데려가주실 때까지 언제까지나 달라붙어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카더가 정색하고 극존칭으로 맑은 눈을 하며 말하자, 라네스는 1분도 못 버티고 ‘히이이이익!’하며 몸서리치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데려갈 테니까! 그 거머리 같은 징그러운 눈빛 집어치워요!”

“크허억! 거머리라니…. 뭐 결과가 좋으니 됐나. 해냈다! 아자!”

 

  카더는 더 많은 땀을 훔치는 정령왕 아세라와 한숨을 내쉬는 라네스를 뒤로 하고, 얼른 차드에게 다가가 안절부절 못해하는 그의 손을 억지로 잡고 악수하였다.

 

“그런 이유로 잘 부탁한다. 아시드!”, “에? 에?!”

 

  차드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 불명이었다. 명색이 정령왕이라고까지 불린 이가 라네스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넘어갔다. 라네스가 그런 왕의 부탁을 웃으며 단칼에 거절한 게 내심 놀라웠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그냥 넘겼다. 하지만 느닷없이 손을 잡고 정신없이 흔드는 이 덩치의 호의는 그냥 넘기지 못했다. 

 

“짜식! 걱정마라. 네 친구는 내가 구해준다. 너와 함께 하는 정령보다 못하지만, 이래 뵈도 용병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나라고! 서로 힘을 합치면 무사히 친구도 구할 수 있고, 나는 나대로 내 신부 감을 구하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냐!”

 

  왜 이렇게 갑자기 친한 척 구는 걸까. 차드는 그가 어려웠다. 물론 따로 속셈이 있어서 혹은 자신을 우습게보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씨익! 웃으며 당당히 말하는 카더의 모습은 의심 많은 자신이 봐도, 올곧고 그 누구보다 믿음직해보이니.

  방금 전 일들만 아니었으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말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차드는 카더가 어려웠다. 이유모를 그 호의가 한순간 악의로 변할 것 같아서….

 

‘하지만 자진해서 해주는 협력을 거절할 상황은 아닌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차드는 라네스를 데리고 카더와 함께 악령의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