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의 닻이다. 세상에 내린 닻이며 내려지지 않는 저울추다. 닻이 존재하는 한 ‘그’는 존재하며 ‘그’가 존재하는 한 닻도 존재한다. ‘그’가 죽지 않는 한 닻 또한 죽지 않고 닻이 죽지 않는 한 ‘그’ 역시 죽지 않는다. ‘그녀’를 만날 때까지 이 모순이 언제까지고 ‘그’를 이 땅에 발붙이게 해줄 것이다.

‘그녀’와도, 친우와도, 전혀 다른, 오로지 도구로써 존재하는 닻이었기에 ‘그’는 난폭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찾는다.

그것이면 족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오래지 않아 시들어갔다.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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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없어!”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그녀’를 만나게 해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그녀’가 없는 것일까? 조금 먼 곳에 있는 것일까? 이 마을에는 있을까? 저 산을 넘으면 있을까? ‘그’는 하염없이 ‘그녀’를 찾아다녔다.

뒷모습이 닮은 이의 팔을 붙잡았다. 돌아본 얼굴은 전혀 다른 이였다. 화가 치밀었다. 마셨다. 난폭하게 던져버린다. 또 닮은 이를 찾는다. 아니다. 마셨다. 던져버렸다. 반복된다. 하염없이 걸으며 몇 번이고 좌절을 겪던 ‘그’는 폭발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죽이고 찢어던지고 마셔버렸다. ‘그녀’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저주를 짊어졌기에 닻으로써 ‘그’의 뒤에서 걷고있던 싄은, 그랬기에 목격할 수 있었다. ‘그’가 마시고 쓰레기처럼 던져버린 시체들이 대지에게 거부당하고 대지를 거부하며 하나둘 일어서는 모습을.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그것들은 가장 먼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이들을 찾아 살해했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는 비치지않는 거울과도 같은 그 모습이, 뛰지않는 심장을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모조리 죽이고 싶었다. 파괴하고 싶었다. 부수고 싶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싄은 주저없이 손을 뻗었다. 그것들의 목을 꺾고 심장을 뽑고 피를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생명의 근원을 잃은 그것들은 한줌의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지나간 뒤에서 일어난 시체들은 싄이 또 한 차례 지나가며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디에나 생명이 나고 지는 세상에서 그것은 그저 작은 사건일 뿐 눈에 띄는 큰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싄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의 손이 미처 닿기 전에 그것들에게 죽은 자들. 그들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찬가지로 대지를 거부하며 일어나고 있었다.

싄은 어느 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놓친 어둠이 자신들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에서 하염없이 걷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싄은 그것들을 죽였다. 그러나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앞서 걷던 ‘그’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하루가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한 세기가 되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럼에도 앞만 보고 다녔다. 오직 ‘그녀’를 찾겠다는 생각에 휩싸여.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고 배알코자하는 자들이 있었다.

“저희가 눈과 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의 부산물들이었다. 그제야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서 점점이 작은 어둠들이 따르고 있었다. 써먹을 수 있겠다. 그 생각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찾아라.”

막으려던 싄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 어둠은 명령을 따라 넓게 흩어졌다. 곳곳에서 어둠은 뭉치고 흩어지고 때로는 서로 다퉈 사라지기도 하며 세를 넓혀갔다. 온전히 ‘그’의 명령을 따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것들의 의도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더 많은 눈과 귀를 통해 ‘그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잠시 희망을 갖고 소식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여전히 ‘그’의 뒤에는 그것들이 우글거렸으나 ‘그’는 이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걷는 동안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계대전이 지나가고 냉전체제가 무너졌어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낯익은 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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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이름은 알지 못하였어도 그것이 산이었기에 ‘그’는 산을 올랐다. ‘그’가 처음으로 도달했던 바로 그 산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무그늘을 지나 한걸음한걸음 옮기며 ‘그’의 뛰지 않는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린다. 들리지 않을 기억속의 노랫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온다.

“아……!”

잃어버린 눈물이 왈칵 치솟는 것 같았다. 미칠듯이 숲그늘을 달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저 앞에! 바로 저 앞에……!

“아……! 아아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그저 비명같은 소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저 앞에! 저곳에! 저 햇살 아래에!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며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산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들려오는 그대의 웃음소리

 아련히 사라지고

 다시금 돌아봐도

 그대는 이미 간 곳 없고

 바람만 쓸쓸히 도네

 

검은 커트머리에 동그랗고 선이 부드러운 얼굴. 연한 레몬빛의 피부. 가볍게 차려입은 등산복. 이미 길이 들대로 든 트래킹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스무 살 남짓 보이는 외모.

시선을 뗄 수 없다. 밤을 보아온 눈이 타버릴 듯 눈부신 햇살 아래에 오매불망 그리고 또 그려왔던 그녀가 있었다. 노래를 마친 그녀는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다. 물을 마신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부를지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까딱하다가 물병을 도로 넣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돼! 가지마!

‘그’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작정 뛰쳐나갔다. 너무도 그리웠던 그녀를 안기 위해 팔을 벌린다. 놀란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인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 이미 저주는 깨어졌기에-

 

햇빛아래 뛰쳐나간 흡혈귀의 말로는 언제나 같았다.

그늘에서 뛰쳐나가 햇빛이 닿는 순간 ‘그’의 육신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불길에 휩싸인 와중에도 그녀를 안기 위해 재가 되어가는 팔을 내밀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는, 민츠는, 미소를 지었다.

누나-

그 순간, 그는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모순의 붕괴로 생긴 비틀림이 그녀를 ‘문’ 너머로 밀어넣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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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하지 못하고 세계를 건너 떨어졌기에 기억은 혼란스러웠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정리할 겸, 혜현은 가까운 바위에 걸터앉았다. 숲에 둘러싸인 커다란 호수와 거기에 맞닿은 하늘.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어딘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에는 역시 그 노래인가?”

그녀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산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들려오는 그대의 웃음소리

 아련히 사라지고

 다시금 돌아봐도

 그대는 이미 간 곳 없고

 바람만 쓸쓸히 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