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건 꿈이었다. 그랬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볼 수 있었다. 모르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정돈되지 않은 혼돈뿐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말한다.

「선비라는 건 말이죠, 육예(六藝)를 고루 익히고 뜻을 바로 세워,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며, 바른 말을 하는데 굽힘이 없고 바른 일을 행하는데 거침이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여전히 이해는 안되지만 그녀는 또 말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어요. 수신하여야 제가할 수 있고, 제가하여야 치국할 수 있으며, 치국하여야 평천하할 수 있으니, 평천하에 앞서 치국에 앞서 제가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함은 수신이니, 결국 스스로를 먼저 닦아야 한다는 말이죠.」

또한 말한다.

「뜻이란, 원칙. 행동강령. 심지. 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세계의 중심.」

“추는, 즉, 닻이지. 이 세계에 닻을 내려 고정되며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

곁에서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말한다.

“그렇게 보자면 나의 닻은 폐하의 의지이다. 너의 닻은?”

「나의 닻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너야.」

 

“헉!”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칠 듯 쿵쾅거려 귓가를 울린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다. 상체를 일으킨 채 민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저 익숙한 어둠 뿐.

“꿈……인가.”

민츠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방금 전의 꿈을 떠올려보았으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민츠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은 오지 않고 상념들만 떠다녔다.

전장의 기억들이 혼란스레 밀려들고 귓가에 소음이 웅웅거렸다. 그 가운데 희미했던 속삭임이 떠올랐다.

「……름은……」

「……언즈……」

그것은 아까 낮에 클라이드와 있을 때 들은 것과 동일한 목소리였다.

「닻이 있는 한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치 멀리서 클라이드를 향해 전달하던 이야기가 새어나오는 듯 했던 그것은……?

“!”

민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랐던 것이다.

그건 틀림없는 시녀장의 목소리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튕겨나갈듯 열렸다. 난폭하게 문을 열어젖힌 민츠는 저벅저벅 걸어와 시녀장 앞에 섰다. 시녀들은 그런 민츠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지만 시녀장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동요한 시녀들을 수습해 할 일을 지시했다.

“……허니 날이 밝는대로 폐하께는 이것을 가져다 드리거라.”

“…….”

“듣고 있는가!”

“예, 예!”

시녀들은 흘깃흘깃 민츠의 눈치를 보다가도 더욱 엄한 시녀장의 말에 정신을 수습해 지시를 받들고 물러났다. 시녀들이 물러나자 시녀장은 꼿꼿한 자세 그대로 민츠를 돌아보았다.

“이런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소.”

“무엇을 말입니까?”

기품과 위엄이 넘치는 시녀장의 눈빛에 민츠는 잠시 압도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쳐들어와서 이대로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민츠는 들고 온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었지? 그때 전장에서 클라이드에게 그 드래곤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

시녀장은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며 부정하지도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흔들림 없이 민츠를 마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제 복도에서 클라이드에게 닻에 대해 말했던 것도 당신이지?”

극히 미세한 흔들림이었으나 내내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시녀장 자신이 원체 동요가 없는 이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전할 수 있었지? 그리고 닻이 무슨 뜻이야? 그거 누구얘기지? 그런 내용들은 어떻게 아는 거지? 대체 당신이 무엇이기에!”

말을 하다 북받쳐 마지막에는 소리를 질러버렸다. 단숨에 질문을 토해내고 헉헉 숨을 고르는 민츠를 바라보던 시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멜파의 친구였지요. 그렇다면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시녀장의 물음에 민츠는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언젠가 멜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모두가 시녀장이라고만 호칭하던 그녀의 이름을.

“아마도, 엔시미네스……였던가?”

시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격퇴한 드래곤의 이름을 아십니까?”

레디미언즈는 클라이드를 비롯한 기사들이 격퇴했다. 그 이전에 폐하가 물리치고 카멜롯을 세운 이야기에 나오던 드래곤. 그 드래곤의 이름까지 아는 자는 적었다. 그러나 민츠는 멜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름은……

“엔시미네스…….”

시녀장은 긍정했다.

 

시녀장은, 엔시미네스는,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형상도 없는 신비를 정의내리고 이름을 붙여 실체로 끌어내리는 것은 소문에서처럼 시녀장으로부터 나왔으며, 칼린도 왕이 드래곤을 상대할 때 쓴 방법이었다. 칼린도 왕이 용살자(龍殺者:Dragon slayer)였으므로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엔시미네스의 얼굴에 쓸쓸함이 깃들었다.

“죽었지요. 여기에 남은 것은 미련일 뿐입니다.”

그 후로 민츠는 엔시미네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클라이드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클라이드가 폐하와 함께 그녀를 물리친 기사였기 때문이었단 사실도, 드래곤 레디미언즈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녀와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음 역시도.

“당신과 같은 드래곤이었잖아? 어째서 그걸 죽이는데 일조할 수 있었지?”

어찌보면 비난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엔시미네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늘에서 산을 토해내는 레디미언즈의 활약으로 부대는 전멸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며 말을 한 직후 민츠는 후회했다. 그러나 의문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엔시미네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렘 - 레디미언즈는 성미가 급했지요. 그래서 그나마 희망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뒤틀린 세계에 갇혀 순환하는 인과 안에서 서로가 정한 대상을 위해 파멸을 향해 걷는 것이, 사라진 마엘을 그리워하며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최후의 여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쓸쓸함은 충분히 가슴 저릿하게 전해져왔다.

-그러나 그런 만큼 자신의 입가에 희열에 가득찬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엔시미네스는 민츠의 얼굴 가득 떠오른 큼직한 미소를 보고 의아해하다 문득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방금, 당신의 닻이 죽었군요.”

멜파가 죽었다. 카멜롯에 온 이후 항상 함께해온 친우가 죽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 그를 지탱해주던 닻이 죽었다. 결국 그 부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슬픔보다도 비통함보다도 불안감보다도 ‘그’는 더욱 큰 해방감을 느꼈다. 불길한 기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윽고 그리움이 서서히 그를 잠식한다. 뒤틀린 희열과 끝모를 그리움이 ‘그’를 더욱 불안정하게 뒤흔들었다.

엔시미네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땅을 온전히 인간의 것으로 하려던 폐하의 의지는 실현되었습니다.”

멜파를, 자카트를, 렉서스를, 병사들을, 기사들을, 그리고…… ‘그녀’를 희생해서.

나의 ‘그녀’를 희생해서.

나의 누나이며 나의 어머니.

나의 사랑.

“남은 것은 나와 당신 뿐입니다.”

엔시미네스의 말도 흘려들으며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만나고 싶어.”

나의 ‘그녀’를.

환한 미소를 짓는 ‘그’가 내뿜는 뒤틀린 암흑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길해할 것이었다. 더 이상 그를 묶어두고 고정할 닻도 추도 없다. 그러나 엔시미네스는 담담했다. 그저 제안했을 뿐이다.

“만나시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두 손 들어 반길 뿐이다.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엔시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시미네스의 발밑에 빛이 번져들었다. 그것은 ‘그’를 둘러싸며 원의 형태를 그렸다. 바닥에 펼쳐진 빛의 마법진에도 ‘그’는 어떠한 감흥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흉흉한 기세로 넘실대는 암흑 그대로 그리움에 가득차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엔시미네스가 머나먼 저 너머를 향해 읊조렸다.

『이 땅의 마지막 드래곤, 엔시미네스의 이름으로 문을 연다.』

세상이 비명을 지른다.

시간이 뒤틀리고 공간이 갈라진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다.

그렇게 열린 문 너머로 ‘그’는 던져진다. ‘그’가 세상 밖으로 사라지자 엔시미네스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서서히 몸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옅은 빛의 알갱이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