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회오리치는 생각의 폭풍.

끝없는 상념.

밀려드는 마음.

거기에 부응하여 저 멀리서 나.의.목.소.리.가. 노래한다.

 

소용돌이치는 사념의 폭풍과 그 압력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것은 자신의 의도 따위와는 전혀 관련 없이, 그저 사방에서 밀어붙이는 압력이 팽팽하게 평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제각각 이야기하며 멋대로 자신의 감정을 쏟아붓는다. 대상따위 알 바 없다는 듯 멋대로 쏟아져 나온 말과 생각과 감정과 충동은 서로 부딪치고 혹은 결합하고 혹은 먹어치워 부풀려져 더더욱 커다란 압력을 행사한다.

쥐어짠다.

비어버린 머릿속을 유린하며 무수한 명령이 비집고 들어온다. 끓어오르는 소음에 파묻혀버린다.

 

한순간, 모든 것이 차단되어버리며 조용해진다.

난생 처음 느끼는 정적에 당황함을 알아차린듯 목걸이를 걸어준 여성은 웃으며 속삭인다.

「네가 너로 있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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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민츠는 아직도 멍하다. 방금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손에 든 칼끝은 축 늘어진 채 바닥에 닿아있다. 누군가가 그의 등을 두드려준다. 멍하니 돌아보니 렌기스였다.

“신비는 죽었다. 이곳은 인간의 땅이다.”

「신비는 죽인다. 이곳은 인간의 땅이다.」

환청처럼 겹쳐 들린다. 언젠가 어디선가 그가 지금과 같은 어조로 한글자만 다른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

찰나에 스쳐지나간 의문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져버린다.

 

여신은 죽었다.

그와 동시에 남아있던 신비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고, 대치하고 있던 인간들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참살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최후까지 싸우다 살해된 신비의 시체 따위, 별다른 감흥없이 지나쳤다. 다만 문제는 멜파의 상처였다. 수사슴의 뿔에 제대로 받힌 터라 어떻게 치료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난 괜찮아.”

멜파는 쾌활하게 말하며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멜파는 태연한 척 했다. 가슴이 저릿하고 울컥 목이 메어 몇 번이고 입을 열려던 민츠는 결국 포기하고 멜파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한차례 헤집어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민츠는 의무대에 그의 소중한 이를 맡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멜파는 말재주 없는 친우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카멜롯으로 개선을 한다. 말을 타고 대오를 갖춰 개선하던 이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환영인파와 맞닥뜨렸다. 길 양 옆으로 몰려서 환호하고 손을 흔들고 기쁨의 미소를 짓는 그들을 보자, 그간 계속되는 전투의 나날들로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웠던 긴장이 한층 누그러들었다. 민츠는 그런 와중에 조금은 들뜬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한순간,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여기도 결국 사람 사는 데야.」

조금 전까지의 들뜬 기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뭐였지? 방금 그건……?’

그 말에 담긴 것은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중들은 환호한다. 미소짓는다. 찬사를 늘어놓는다.

환호한다.

그들은…….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말은 결코 안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여자 혼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악의는 어디를 가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연고 없는 젊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혼란한 이 땅 어느 구석에서 윤간당하고 팔려가거나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낯선 땅에서 고향으로부터 단절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었다. 어째서?

“괜찮아?”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는다. 현기증을 일으켰던 그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옆을 돌아본다. 붉은 머리카락의 낯익은 기사가 그를 보고 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3배 빠른 렌기스다?”

붉은 머리의 기사 렌기스는 장난기어린 친숙한 그 말투에 미소를 짓다 순간 굳어버렸다. 오랜만에 불리는, 단 한사람에게 듣던 그 별명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이후였기에 경악은 뒤늦게 찾아왔다.

“……뭐?!”

“뭐?”

렌기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민츠는 반사적으로 되물었으나, 렌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꿰뚫어보려는 듯 가만히 민츠의 낯을 살피더니 말을 몰아 행렬 앞쪽으로 가버렸다. 저 앞쪽에서 클라이드와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 했으나 환영인파의 환호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성문을 들어서 드디어 카멜롯에 돌아왔다. 말에서 내려선 민츠는 돌아서다가 멜파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예요?」

그녀는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응, 숨겨둔 내 아들.」

“괜찮아?”

“어?”

멜파는 어리둥절해하는 민츠를 보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다.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정신을 못차리냐?”

“아니, 방금…… 그건 누구였지?”

“?”

멜파는 뜬금없는 민츠의 말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민츠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방금 그 여잔 누구였지?”

“무슨 여자?”

민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민츠는 고개를 저었다. 민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시 몸을 돌린 민츠는 멜파 또한 그곳에 없음을 깨달았다.

‘헛것을 본건가?’

고개를 내저으며 민츠는 멜파가 부상당해 의무대에 있음을 떠올렸다. 결코 설수도 걸을 수도 없는 부상이다.

그래, 역시 헛것을 본거다. 의무대에 있을 멜파가 지금 여기에 멀쩡한 모습으로 서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민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귀환보고를 마치면 그에게 문병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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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보고와 폐하의 치하, 그리고 해산명령을 받고 민츠는 멜파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던 도중 클라이드가 말을 걸어왔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민츠는 멜파의 방 쪽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걸으며 클라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간 수고가 많았다. 네가 가장 큰 공을 세웠지.”

고작 네 살 남짓한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여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 때 느꼈던 손의 감각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뺨에 와 닿았던 작은 손의 따뜻한 온기, 그리고 미소.

「미안해…….」

“네가 죽인 ‘것’이 마지막에 무언가 이야기했었나?”

상념을 깨고 클라이드의 목소리가 가차없이 귓속에 내리꽂힌다. 민츠는 자신의 떠올렸던 것을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런가.”

그때,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닻이 있는 한은……」

“닻이…….”

무심코 중얼거리는 민츠의 말에 클라이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태연히 묻는다.

“닻이 어쨌다는 말인가?”

민츠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지우고 새삼 물었다.

“아니, 닻이 뭔지 궁금해서.”

클라이드는 잠시 말없이 민츠를 바라보았다. 민츠는 자신을 꿰뚫어보려는 듯한 클라이드의 눈빛에도 태연히 마주했다. 클라이드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바다에는 가본 적이 없던가?”

민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닻이란, 물살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위치를 고정하는 갈퀴모양의 쇳덩어리지. 강에서는 배를 둑어 묶어두면 되지만, 바다의 큰 배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군.”

걷다보니 어느새 멜파의 방까지 왔다. 민츠와 클라이드는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피냄새와 약초냄새에 섞여 죽음의 냄새가 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오히려 움찔할 정도로. 멜파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문병객을 반긴다.

 

안부 몇 마디를 남기고 클라이드도 떠나고 친우 둘 만이 방에 남았다. 장난스런 대화가 오갔다. 평소였다면 주로 멜파가 떠들고 민츠가 대꾸하는 식이었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민츠가 말이 많았다. 멜파는 민츠의 시덥잖은 농담에 키득대며 맞받아쳤다.

“그러니까 네가 애인이 없지.”

“나도 나가면 인기 많거든?”

“아이고, 그러세요?”

멜파는 웃으며 이야기를 더한다.

멜파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문득 다른 말이 겹쳐 떠오른다.

「붕괴하려 했어.」

“응?”

「그저 확인하고 싶었어.」

백일몽을 꾸는 듯했다. 민츠를 마주 끌어안고 머리 위에서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네가 닻이었던 거야.」

‘닻…….’

거센 흐름 속에도 위치를 고정하여 떠밀려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해주는 것. 그녀는 그를 닻이라 불렀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흘러가지 않고 ‘여기’에 고정되었던 것이 바로 그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임을.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아, 으응…….”

멜파의 말에 민츠는 현실로 돌아와 그의 친우를 돌아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파리한 안색에도 멜파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정신을 못차리냐?”

그렇게 말하며 웃는 멜파를 보며 민츠는 문득 깨달았다.

“아아, 그런가?”

민츠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정말 너무도 소중한 그의 친구.

“네가 나의 닻이었어.”

“?”

멜파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민츠는 그저 웃으며 빨리 나으라고 말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