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생각하기 전에 검을 휘두른다. 몸이 이끄는 대로 베어내린 궤적에 휩쓸린 적은 그대로 잘려나간다. 뒤로 반보 물러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한다. 양손검의 움직임은 크지만 그만큼 강력한 일격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참살된 시체는 무시하고 다음 적을 찾아 검을 휘두르는 그는 스스로 한 자루의 검과도 같았다.

 

적들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광휘의 존재는 그 뒤로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인간들의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미처 전선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후방에 잔류된 신비는 전장에 서지 못한 인간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케르벨.

주민들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 케르벨의 숲은 천연의 방벽이었다. 안개로 눈을 가리고 울창한 수림에 숨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올지 알 수 없었기에 밤낮없이 곤두선 신경은 지치고 피로해진 병력은 소모되어갔다.

이러한 적들의 전술에 대해 내놓은 대응책은 실로 단순했으며 그렇기에 무자비했다.

끝없이 펼쳐진 케르벨의 숲에 불을 지른 것이다.

베어내는 정도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될 정도로 울창했던 숲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방화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숲을 살라먹는 화마의 기세에 안개 또한 속수무책 흩어져갔다. 사람의 손을 대신하여 숲을 처분해주는 불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대로 숲이 사라지나 싶을 정도의 기세였다. 밤이고 낮이고 타오르는 불길에 사위는 온통 열기로 가득 찼다. 이대로 사나흘만 있으면 숲은 흔적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불의 기세가 주춤하나 싶더니 저편에서 해일처럼 덮쳐오는 안개에 삼켜져 순식간에 사그라져버렸다. 안개의 해일이 덮치고 흩어져 낮게 깔린 그 자리에 서있는 건, 언젠가 드니즈가 맞닥뜨린 바 있는 은빛 그림자였다. 머리에 뻗은 가지에는 안개가 담겨 넘실거렸다.

『인간들이여, 경고한다. 지금의 오만불손한 행위를 중단하고 물러나라.』

준엄하게 경고해오는 그것의 음성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자신의 숲을 태워버린 적에게 하는 경고임에도, 인간 따위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제심으로 분노를 한 톨도 드러내지 않는 그 존재에 외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경고에 대한 대답은,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클라이드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케르벨이여, 그대를 사슴으로 정의한다!”

『이 무슨?!』

어쩌면 이 방화는 처음부터 숲의 주인을 끌어내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체의 주저 없는 신속한 정의(定議)였다. 완벽하게 허를 찔린 그것의 모습은 은빛에서 실체의 빛을 드러낸다. 이름마저 불려 지상에 고정된 그것은, 무성한 나뭇가지 같은 뿔에 넘쳐나는 안개를 담은 거대한 수사슴의 모습이었다. 실체를 갖게 된 숲의 주인 - 케르벨은 클라이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숲이, 안개가, 호수가, 신성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그 눈빛 안에서 일렁였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그 눈빛에 사람들은 저마다 움츠러듦을 느꼈지만, 정작 클라이드만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케르벨은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는 듯 말했다.

『그래, 그대는 용살자(龍殺者:Dragon slayer)였지. 허면 이름을 알고 있을 만도 하군.』

“…….”

『유예기간도 경고도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것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안개가 숲 밖으로 넘쳐나며 수사슴의 모습을 삼켜버렸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는 이미 케르벨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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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르렁거림이 비웃듯 말한다.

『예상한 대로 실패했군. 뭐, 기대도 안했지만.』

『기쁜 듯 보이오?』

『한데 몰려있어야 보람이 있지 않겠나.』

미소짓는 상대를 향해 준엄하게 사실을 말한다.

『이곳은 나의 숲이오.』

『이 하늘 아래에 소유권 따위 무의미하지 않은가.』

『…….』

반박할 수 없기에 침묵한다.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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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군대는 숲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미 숲의 주인이 실체화 된데다 숲의 일부를 태워버린 점도 있기에 안개도, 안개에 감춰진 공격도, 이전만큼의 기세는 없었다. 때문에 인간들은 큰 병력손실 없이 숲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울창한 숲은 대열을 흩트리고 서로 얽힌 가지는 하늘을 가린다. 다소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안개는 시야를 가려 고작 열 발짝 앞의 사람조차 놓치게 만든다. 그렇게 제한된 시야 속에 있었기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어졌다.

하늘에 붉은 어둠이 깔리는 것을.

 

“으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녹아내린다. 산 이도 죽은 이도 거침없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신체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른다. 버둥거리며 녹아내린다. 안개와 섞여 숲을 가득 메운 비명과 죽음의 냄새 속에서 카멜롯의 기사 자카트는 기시감이 들었다.

알고 있는 비명.

알고 있는 장면.

그러나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광경.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의 그것.

사람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 또한 녹아내려 숲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공터가 생긴 것 같았다.

아니, 이것은 공터라기보다는 늪이다.

뻥 뚫린 하늘에는 여신의 베일이 일렁이는 아래, 황혼과도 같은 빛으로, 그것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이 토해내는 액체는 마치 거대한 붓을 휘두른 듯 숲이라는 화지(畵紙)에 늪이라는 선을 그린다. 그 늪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는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사라진 다리로 걸으려다 고인 그곳에 넘어진 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녹아 늪의 일부가 된다. 던져진 무기도 녹아 늪의 일부가 된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이는 어깨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가 나무에 고인 것이 떨어져 눈마저 잃는다. 칼을 들어 올리려던 자카트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을 뻔했다. 익숙한 손이 익숙한 칼을 들고 낯선 위치에 구른다. 팔목은 이미 녹아버렸다. 묵직한 감정이 어깨를 짓누른다. 두려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더더욱 두려웠다. 소리로써 두려움을 물리치려 입을 벌린다. ‘그것’도 입을 벌린다. 절망이 쏟아져 내린다. 끼얹어 뿌려진 그 자리에 소리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자카트는 이미 없다. 그저 또 다른 늪이 있을 뿐.

 

카티아는 이런 미친 짓을 다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질리도록 싫었지만 이미 당긴 팔을 내리지는 않았다. 불끈 힘을 주며 한껏 뒤튼 허리를 제자리로 되돌리며 어깨를, 팔을, 손을, 투창을, 앞으로 던진다.

“가라!”

온몸을 통해 던져진 투창은 힘차게 하늘을 날아 목표를 향한다. 그러나 때맞춰 토해진 절망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허탈감도 느낄 사이 없이 자리를 옮긴 카티아는 다음 투창을 준비한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멜파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대는 강대하고 힘 있는 존재! 비늘로 뒤덮인 육체는 강철의 성벽이며 뿔로 덮인 머리에 산(酸)을 담은 자! 대지를 거부하며 하늘을 추구하지만 결국 추락하고 마는 자!”

멜파의 목소리는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으리만치 떨리고 있었다. 당연하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라면 누구나……, 잠깐, 누구나?

그럴 리가! 그는 카멜롯의 기사다. 결코 이런 일에 저.렇.게.까.지. 목소리가 떨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멜파의 정의를 들은 카티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멜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대를…… 드래곤으로 정의한다!”

“드래곤이라고?!”

눈을 홉떴다. 그제야 상대의 형체가 제대로 보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 압도적으로 공포스러운 위압감마저 희석시켜주지는 못했다.

붉은 어둠과도 같은 그것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비늘로 뒤덮인 육신을 하늘에 띄운다. 두 줄로 나란히 돋은 뿔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져있다. 끔찍이도 사나운 두 눈에 흉포함을 가득 담고 입을 벌려 무엇이든 찢어발길 이빨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시 ‘절망’을 토한다.

“저게…… 드래곤이라고?”

비어버린 숲 너머 하늘에는 요사스러운 빛의 자락이 일렁인다. 그것을 배경으로 드래곤은 가차 없이 숲과 인간들을 유린한다. 카티아는 다시 투창을 던져보지만 닿지 않는다. 궁수부대가 날린 화살 역시 닿지 않는다.

어찌할 수 없다. 하늘에 있는 저것에게 인간의 공격은 닿지 않건만 저것의 공격은 무참히도 지상을 유린한다. 닿지 않는 공격은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이를 악물며 재차 투창을 던지려던 카티아는 어깨를 짚은 누군가의 손에 멈춘다. 카티아를 제지하며 엘소드는 무언가를 기다리라 눈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