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친 세상이다. 하늘은 낮도 밤도 없이 빛이 물결치며 땅은 이름도 없는 그림자에 뒤덮인다. 묻혀버린 존재와 감춰진 비의를 품고 숨어있던 추종자가 일어선다.

마치 창세의 혼돈이 부활한 듯 그저 혼란과 유혈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소문보다도 빠르게 히베른은 멸망했다.

그 기세 그대로 니힐렌 또한 유린당했다.

그러나

카멜롯이 있었다.

드래곤을 살해하고 신비를 말살하며 이곳이 인간의 땅임을 천명한 칼린도 왕과 카멜롯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적들의 유린에도 흔들림 없이 사람들을 보호하며 착실하게 적들의 세력을 밀어냈다. 본디 적국이었던 사람들도 저마다 카멜롯의 기사들을 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 안정을 되찾고 카멜롯에 합류했다. 카멜롯의 기사들은 절망하던 인간들에게 구원 그 이상이었다.

인간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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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츠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잠시 멈춰선 채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미친 여신의 베일이 일렁였지만 조금씩 그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땅에는 이미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체가 깔려있었고 거기에는 민츠 자신이 기여한 부분도 있었다.

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민츠는 부러져버린 검을 던져버리고 다시 말에 올랐다. 안장에 달아놓은 칼집에서 또다른 칼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퍼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늘은 칼을 꽤나 분질러먹었다 싶다는 생각에 어울리지도 않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종자가 창을 건넨다. 순간, 종자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름이 뭐였지?”

종자는 그의 물음에 당황한다. 그러나 민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달려나간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그 질문은 지워진 지 오래다. 그가 알 필요가 있는 건 적의 이름 뿐이다.

“그대는 강인하고 힘있는 존재.”

덩어리져 일렁이는 그림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상대하는 이들을 짓뭉갠다. 그런 ‘적’을 향해 말을 달리며 민츠는 한문장한문장 심력(心力)을 다해 읊조린다.

“네 개의 기둥을 다리로 하고 커다란 성벽을 몸으로 하는 자.”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저것들을 실체화하여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일까?

“겨섯 개의 상아를 무기로 하고 두 개의 날개를 귀로 한 자.”

거기에 존재함에도 그것이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어 그저 묘사할 따름이었던 막연한 공포였다.

“뱀같은 코는 그대의 손이다.”

그런 막연한 공포를 가차없이 재단하고 적시하여 언어라는 폭력으로 그 가치를 결정내려, 그저 하나의 단어로서 존재는 규정되고 격하된다.

“그대를 코끼리라 정의한다.”

이름을 가짐으로써 일개 생물이 된 그것을 향해 민츠는 창을 내지른다. 깊숙이 박힌 창을 놓아 지나쳐버린 민츠는 다시 말머리를 돌리며 안장의 칼을 뽑는다. 상처입어 기다란 코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그것은 생물이라기에는 너무도 컸다. 아까 돌격을 할 때의 감촉으로 저것의 가죽이 상상외로 두껍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민츠는 정면으로 맞상대하는 대신 그것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실체화된 적을 향해 궁수대의 지원사격이 이어지고, 박힌 화살을 밟고 올라가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산같은 적의 위로 올라탄 민츠는 부채같이 펄럭이는 귀 뒤의 약한 부분을 향해 칼을 꽂았다. 급소를 찔린 적이 날뛰며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민츠의 몸은 허공에 내동댕이쳐진다.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매달린다. 앞뒤좌우상하 할 것 없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한손으로 매달린 채 다른 한손으로는 뒤춤을 더듬어 짧은 칼을 꺼낸다. 순간, 적의 움직임이 끊어지듯 멈춘다. 그리고 숨이 끊어진 육신은 무너지듯 쓰러져버린다. 깔리기 전에 먼저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한 민츠는 그제야 적의 숨통을 끊은 엘소드의 화살을 발견한다.

칼을 박은 쪽으로 쓰러졌기에 저 산더미같은 시체를 들어올리지 않는 한 칼을 뽑기는 글러먹었다. 포기하는 편이 빠르다.

몸을 일으키며 민츠는 쓰러진 적의 시체를 바라본다. 이미 숨이 끊어진 하얀 코끼리는 피로 붉게 물들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존재가 규정되어버린다. 막연한 묘사로써만 설명할 수 있는 신비와 공포는 이름이 붙음으로써 구체적인 것으로 그 존재가 격하되어버린다.

어떻게 그런 방식을 알 수 있었던 것일까?

소문이야 있었다. 칼린도 왕이 처음 드래곤을 상대할 때 쓴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시녀장으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추측은 있었으나 위에서 내려온 건 정의를 내리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실체화할 수 있고, 실체화된 공포는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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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츠는 거침없이 베며 참살하던 칼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낸다. 신비에 홀려 인간의 길을 벗어난 광신자들은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건 또 다른 날, 또 다른 전투. 그러나 이것은 어느 날의 어느 전투인 것인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소리에 귀가 멍멍하여 위도 아래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여전히 미친 여신의 베일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저것이 하늘이다. 땅으로 고개를 끌어내린다. 아직도 쳐죽여야 할 적이 산재해있다. 뒤로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시체도 보인다.

발밑이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래.

저 하늘 아래, 저 시체 위에, 그는 존재한다.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의 진군에 그 또한 한 칼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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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도 알 수 없는 공포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기사들의 뒷모습에 병사들은 용기백배한다. 막연하기만 하며 몸서리치던 공포는 기사들의 앞에서 그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내낸다. 그에 맞서는 기사들의 뒷모습에 실체화된 공포는 희석되고 극복된다.

치열한 인간들의 공세에 신비는 그 세를 뻗치지 못하고 도리어 본거지를 중심으로 서서히 뒤로 몰리고 있었다.

케르벨.

그곳이 적들의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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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마음이 공허해지며 발밑의 땅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감각이 일어 민츠는 고개를 든다. 날짜? 알 수 없다. 위치? 알 수 없다. 또 무언가에 홀렸던 것인가? 아스라이 번지는 안개는 주춤 물러선다. 옆을 돌아보니 멜파가 있고 뒤를 돌아보니 쌍둥이들이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조금은 성가시면서도 반가운 그들의 존재에 발밑은 다시 단단해지고 손에 쥔 칼 끝에 망설임은 사라진다.

전장은 틀림없이 그들이 압도하고 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이 전투도 그들의 승리로 끝맺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질감이 든다. 소음이 서서히 잦아든다. 의아해하고 있는 순간, 그동안과는 비교도 안되는 광휘가 일었다.

있었다.

틀림없이 존재한다.

전장의 모든 존재들의 마음속에 경외감이 일며 무릎을 꿇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귓가에 아스라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민츠는 문득 뺨이 젖어있음을 깨닫는다. 그 사소한 깨달음에 자극받기라도 한 듯 왈칵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눈물이 멎지가 않는다.

 

전투는 멎어있었다. 무릎을 꿇은 이도 있었다. 엎드려 경배하는 이도 있었다. 민츠처럼 아직 자신의 발로 서있는 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한사람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드니즈였다.

그는 홀린 듯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나갔다. 광휘의 존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전장의 모든 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멈추었다.

드니즈는 그대로 멈춰선 채 광휘의 존재를 바라본다.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이 변화한다. 그것은 곧 분노가 된다. 명백한, 너무도 확고한 분노.

그대로 돌아선다. 걷는 것이었던 걸음은 점차 속도를 더하여 달리는 것이 된다. 아군의 사이를 질주하는 그의 칼끝이 노리는 대상은 더 볼 것도 없이 명백했다.

클라이드? 어째서?

민츠는 그를 저지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드니즈는 마치 울부짖듯 외치며 클라이드를 향해 뛰어든다.

“어째서 그녀를……!!”

뒷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사들의 수장이며 국왕의 전장대행자인 클라이드만을 바라보며 달려든 그를 곁에 있던 렌기스가 베어버렸으므로. 잇지 못한 말을 남긴 채 털썩 그의 몸이 쓰러져 나뒹군다.

“카멜롯의 용사들이여! 눈을 떠라!”

벽력같은 호령이 귓가를 후려친다. 민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클라이드는 이어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다.

드니즈마저 적의 삿된 술수에 홀려버렸던 것인가? 명령에 따라 퇴각하던 민츠는 문득 방금 전까지 광휘를 발하던 자리를 돌아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것은, 마치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