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

1.

서쪽의 소국 케르벨.

신들이 떠난 이후 수많은 소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있던 이 땅이 카멜롯, 히베른, 니힐렌의 세 대국으로 통합된 지금에 와서 케르벨은 아직 어디에도 병합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소국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독립의지라기 보다는 지형의 탓이 컸다.

케르벨 왕국은 반은 숲, 반은 호수인 땅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바위로 된 산지 일부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곳에 나라를 세웠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험난한 그 땅은, 그런 이유에서 누구에게도 점령되지 않았다. 외지인이라면 숲을 개간하면 좀 더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겠는가 생각하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말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한다면 공포에 질린 케르벨의 주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그를 매장하려 들 것이다. 그들은 숲을 건드려 신의 노여움을 사느니 스스로의 빈곤을 선택하는 이들이었다. 손바닥만한 농지에서 얻은 수확물과 숲 가장자리에서 구한 약간의 나무열매 따위가 그들의 전부였다. 그런 빈곤 속에서도 케르벨 사람들은 단 한 뼘도 숲을 개간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경악할만한 파괴를 목도하고야 말았다.

 

“이건……, 이건 아니야…….”

케르벨의 전(前) 국왕 라힐라스는 히베른에 붙은 걸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운이 나빴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무도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히베른에 붙기 전, 아니, 니힐렌과 틀어지기 전, 아니아니, 제비를 뽑던 그때로.

선왕이 죽고 왕위를 물려받을 항렬의 후보자가 자신을 포함하여 여덟 명이나 되었을 때, 라힐라스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7/8의 확률이다. 선왕 때는 후보가 둘뿐이었기 때문에 무려 1/2의 확률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물론 이번에도 아무도 자청하여 나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비뽑기가 실시되었고, 자신의 파례에 제비를 집는 순간, 라힐라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절대로 이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제비를 집어버렸기에 바꿀 수도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대로 당첨.

무려 1/8확률인 당첨을 뽑아버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눈물이 났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왜 그때 바로 옆의 제비를 뽑지 않았던 것일까?

무려 수천가구다. 이 작고 험한 터에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 왕위에 올라 그제야 정확한 인구수를 알게 된 라힐라스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된 이상 그는 이 가난한 나라를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했다. 그것이 그의 악운의 시작이었다.

당첨을 뽑아버린 죄로 라힐라스는 어떻게든 왕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다. 힘 좀 쓰고 싸움 좀 한다는 사내들을 용병으로 보내도 보고 세 대국사이에 중개무역도 시도해보았다. 그 김에 다른 나라로부터 험한 바위산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도 구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그 와중에 북쪽의 니힐렌 왕국과 사이가 틀어져버렸다.

나라의 존속자체가 위태로워졌다.

케르벨의 왕인 이상 그는 케르벨의 숲과 호수와 주민들을 지켜야 했다. 이대로 니힐렌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 중 어느 하나도 건질 수 없다. 낭패다. 아무리 니힐렌이 다른 나라들과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케르벨을 점령하는 데에는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이대로 손가락 빨고 앉아서 망하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다른 나라에 항복을 해서 보호를 받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나라가 더 좋을까?

사실 그다지 고민할 필요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카멜롯의 국왕 칼린도는 드래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것인지, 그 후로도 이 빌어먹을 카멜롯의 기사들은 각지를 돌며 신들이 아직 이 땅에 있던 시절에 남긴 흔적과, 아직도 남아서 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하던 신비들을 살해 내지 파괴하고 있었다. 그런 카멜롯에 항복을 했다간 케르벨의 숲도 호수도 모두 그들의 발아래 난장판이 되어버릴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때문에 라힐라스는 니힐렌과 카멜롯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은 나라 - 히베른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케르벨에 첫발을 내딛은 히베른의 기사 지겔은 척박하고 가난하다고 알려진 케르벨의 실태를 목격하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천혜의 보고였다.

케르벨의 숲은 수령이 최고 수십 년 이상, 평균 수백 년 이상의 나무들이 수두룩 빽뺵했다. 숲에는 각종 과실이 지천이고 숱한 새와 짐승들도 여유롭게 어슬렁거렸다. 인간을 경계하는 흔적따윈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갖가지 약초도 잡초마냥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를 더더욱 환장하게 만들었던 것은, 케르벨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돌.산.의 대부분이 철.광.석.이라는 사실이었다. 길에 흔하게 채이는 돌멩이조차 그러했다.

지겔은 이 모든 걸 전.혀. 이용할 생각도 안하고 그대로 방치해둔 채 굶주리고 있던 케르벨의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호수쪽은 숲 너머에 있어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그가 히베른에서 케르벨의 거주지역까지 오는 길목에서 목격한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다 못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가득한 곳간을 두고도 굶어 죽는 꼴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저질농담이란 말인가!

비록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하던 히베른 왕국이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는데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겔의 보고가 올라가기가 무섭게 사람들을 보내 곧장 개발에 착수했다.

어떻게든 숲과 호수를 지켜보고자 히베른에 항복했던 라힐라스와 케르벨 사람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개발작업은 그다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이용할 지원이 지천으로 널렸다한들, 히베른에서 원거리까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현지인 케르벨의 주민들은 비협조적이었다. 숲과 신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케르벨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결국 히베른에서는 창칼을 앞세웠고, 그런 후에야 간신히 어떻게든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숲에 들어간 케르벨 사람들은 해만 저물라치면 이내 손을 놓고 숲 밖으로 황급히 빠져나왔기 때문에 진척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날도 그랬다.

해질녘이 되자 아직 사위가 밝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슬슬 빠지려 들었다. 히베른에서 파견나온 감독관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 겁쟁이 게으름뱅이들은 도통 일을 하려들지 않는다.

“이 겁쟁이들아, 아직 해떨어지려면 멀었어! 재게재게 손 놀리지 못해!”

감독관의 불호령에 사람들은 움찔했으나 여전히 일을 하려들지는 않았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그동안 신이니 뭐니 하는 게 코빼기라도 보였나! 빨리 못움직여?”

그러고보니 숲을 개간한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신으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벌도 내려진 적이 없고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감독관은 짜증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작업상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원체 가용자원이 풍족했기에 산출량은 기대할만 했다. 그때였다.

“뭐지?”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리만치 짙은 안개가 나무 사이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몇 달이나 이곳에서 작업을 했지만 해질녘이 다 된 이때에 이렇게나 짙은 안개가 끼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앗하는 사이에 이미 사방은 짙은 안개로 가득 차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안개 속에 그는 홀로 서있었다.

“어이! 이봐!”

소리를 내보았지만 반향도 타인의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안개에 소리가 먹힌 것만 같았다.

적막.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이와 고작 열 발짝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헌데 어쩌면 이다지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일까?

감독관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그는 어느 순간 무언가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긴장해 바짝 굳은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바닥에 있던 굵은 나뭇가지였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꿈틀-

눈의 착각인가? 감독관은 몇 번인가 눈을 끔뻑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뭇가지는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그의 발목을 낚아챘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그는 발목이 잡힌 채 공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세차게 때리는 나뭇가지를 지나 숲 저 위로 붕 떠올랐다. 그 와중에 잠깐 보인 그 정경에 감독관은 할 말을 잃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거대한 숲은 짙은 안개에 삼켜져 일렁이는 운해와도 같았다. 그 너머 나무가 없는 저 곳이 말로만 듣던 케르벨 호수이리라. 그러나 저건 결코 호수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예고도 없이 잡힌 발목이 당겨지며 급작스럽게 낙하가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아-ㄱ!!”

공중에 떠있다 낚아채인 탓에 낙하는 더더욱 빠르다. 그러나 낙하의 공포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비명은 안개에 먹히듯 아스라이 사라져버렸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지면!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면에 처박혀 머리가 박살나고 말리라!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면에 닿기도 전, 튀어나온 굵은 나뭇가지에 턱부터 머리까지 꿰뚫려 절명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찾아 숲으로 들어간 용기 있던 몇몇은 이내 비명을 지르며 도로 튀어나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숲에는 나무마다 꿰뚫리고 목졸린 시체들이 마치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려 뇌수와 피를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르벨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무인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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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비단 케르벨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

드니즈는 설명을 덧붙였다.

“니힐렌에서도 히베른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더군.”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과 함께 해산했을 때, 멜파와 민츠는 드니즈를 붙잡고 케르벨에 갔던 일을 물었다. 드니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특히 아끼는 두 사람에게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멜파는 끊임없이 ‘온다네’라고 속삭인다는 악몽을 떠올렸다. 이런 것이 ‘온다’는 말인가?

카멜롯은 기사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대부분의 신비가 말살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사정이 다르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신들의 흔적. 그러한 것들이 일제히 움직이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멜파는 위화감이 들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때, 여지껏 말없이 듣기만 하던 민츠가 입을 열었다.

“뭘 봤어?”

“…….”

드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멜파도 민츠의 질문을 거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겪은 그런 걸로 신이 돌아왔다고는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뭔가 다른 근거가 있는 거죠?”

“…….”

“케르벨에서 대체 뭘 보신 겁니까?”

“후…….”

드니즈는 한숨을 내쉬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공식발표를 기다리면 안되겠냐?”

“말을 꺼내신 분이 책임을 지셔야죠.”

드니즈는 두 꼬맹이 - 비록 지금은 카멜롯을 짊어지는 젊은 기사들이지만 드니즈에게는 여전히 기사수련생시절의 꼬마들로 보였다 - 에게 못이기겠다는 듯 대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