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째서 하필이면 그 노래를 골랐던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낯선 세상에 떨어지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기억은 이미 방향성마저 갖고 일그러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라도 민츠가 좀 더 부르기 쉬울만한 남자노래 몇 곡 정도 떠올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선비가 되고 싶다는 건 입에 올리지 않던 꿈이라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건 입에 올리던 꿈이었으니까.

비록 지금에 와서는 그따위 꿈, 깨어진 파편이 되어버린지 오래라 할지라도.

“집중해!”

귓가를 때리는 엘소드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엘소드가 이끄는 부대는 이미 적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을 돌아보지도 않고 방패로 막아냈다. 칼이 막혀버린 적 병사는 미처 어찌하기도 전에 다른 방향에서 날아든 창날에 꿰뚫렸다. 그녀는 창을 적에게 꽂아 잠시 빈손이 된 병사를 향해 달려드는 적의 목을 쳤다. 붉은 피가 튀었지만 이미 젖어 묵직한 위로 몇방울 더해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때 전장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정상적인 소란이 아니다. 그리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하긴, 아무렴 전쟁터에 정상적인 소란도 있을까?

그녀는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

그녀는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베어버리며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전투였다. 비록 난전에 접어들었다 할지라도 이미 승기가 보이는 시점이었다. 엘소드는 적의 지휘관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갑자기 상대의 목이 사라져버렸다.

“뭐지?”

부웅-

파공성과 함께 뭔가가 회전하나 싶더니 절명한 적 지휘관 주변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버렸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피아구분 없이 사람들을 쓸어버리고 생긴 반경 수십 미터의 인위적인 공터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손에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쇠사슬을 들고 붕붕 돌리고 있었다.

길이도 길이거니와 무게도 무게다. 짚을 꼰 새끼줄도 십 미터면 어린애무게보다 더하건만 저건 새끼줄도 아니고 쇠사슬, 그것도 사람 쓸려나간 범위로 보아 이삼십 미터는 족히 넘는다. 게다가 저만한 길이를 제어하기 위해 끝에 추까지 달렸으니 그 무게가 얼마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휘두른다? 원심력은 도대체 그 무게를 몇 배까지 올려버릴 것인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며 멀리 떨어진 사람의 머리를 박살내거나 사람을 날려 보내거나 하는 건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솜씨였고 힘이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인간 같지도 않은’ 자였다.

그자의 외침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너희가 서로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 땅은 이미 지난 수백 년간 나의 주인께서 지배하신 곳이다. 소란피우지 말고 썩 물러가라!”

핑-

파공성과 함께 날아간 화살은 남자의 쇠사슬에 걸려 부러져버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기도 전에 엘소드는 그게 누가 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분업하자.”

민트였다. 엘소드는 그녀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를 그녀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장을 정리하기위해 움직였다.

수십 미터 거리에 있는 이도 정교하게 공격하는 쇠사슬을 상대로 엘소드는 접근하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았으며 난전속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민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자는 민트가 활로 상대할 수 있고 후자는 엘소드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 서로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역할을 나눈 것이다.

적어도 엘소드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녀는 시위를 당겼다. 활대가 비명을 지르기 전 이미 살은 날아간다. 그러나 머지않아 쇠사슬에 부러져 생을 마감한다.

또 한발 화살을 잰다. 쏘기가 무섭게 다시 한발 이어 쏜다. 그리고 또 한발. 또 한발.

잇단 화살을 막아내던 남자는 몸을 틀며 손목을 내젓는다. 화살을 쳐내던 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날아든다. 그녀는 마지막 한발을 마저 쏘고 몸을 꺾는다. 가까스로 피해낸 사슬끝은 남자가 당긴 손의 움직임에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힌다.

몸을 굴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녀는 땅에 처박힌 쇠사슬이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기 전 똑바로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본다.

이길 수 있을 리 없는 상대.

이쪽의 공격은 모조리 막아내고 저쪽의 공격은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다. 그녀는 갑옷이 막아주었음에도 조금 전의 공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갑옷이 아니었다면 살점이 뜯겨나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포에라도 맞은 듯 뻥 뚫려버렸으리라.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평소라면 ‘능력’조차 닿지 않을 거리였건만 그녀는 평소와 같은 ‘감정’이 아닌 ‘무언가’를 읽어낸다. 그것은 하나의 올바른 열쇠가 되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있던 기억들을 하나의 형태로 착착 맞춰나간다.

낯선 세상에 떨어져 뒤섞인 기억이 제자리를 찾으며 그 길로 곧장 저 바닥에 잠가두었던 상자의 자물쇠조차 열어버린다. 평소였다면 잠가 봉인해둔 그 기억을 결코 열지도 떠올리지도 않았으리라.

‘미안하다, 이서현.’

그녀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빛이 어리며 입에서는 힘있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이서현의 이름을 빌어 곽혜현이 명한다…….”

힘있는 말과 기묘한 눈빛으로부터 남자는 고개를 돌릴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다. 그대로 그녀가 문장을 완성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뿐.

“……!”

‘마법’이 세상을 뒤틀며 스스로를 구현한다.

 

적장을 잃고 혼란에 빠진 적들을 재빨리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낸 엘소드는 민트가 남자를 제압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이유에서 놀랐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갑자기 길어진 머리카락을 묶느라 가죽끈을 입에 물고 있던 민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했다. 엘소드는 자신이 받은 인상을 말로 형상화해보려 했으나 애를 쓰면 쓸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암담함을 느끼며 방향을 돌려 다른 사실을 지적했다.

“머리카락은 왜 갑자기 길어진 거야?”

“몰라. 별로 야한 생각도 안했는데 말이야.”

머리를 다 묶어올린 민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섞인 어조로 답했다. 야한 생각을 하면 머리가 빨리 자란다는 속설이 이쪽에서는 통하지 않는지 엘소드는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엘소드의 의문이 확실해진 것은 성으로 돌아온 뒤 나이젤의 말을 들은 뒤였다.

“너 전장에 가서 대체 뭘 한거야? 저 녀석 확실하게 여자로 보이잖아?”

“뭐?”

“쳇,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나이젤은 아쉬운 듯 투덜댔지만 엘소드는 그제야 새로운 시각으로 민트를 다시 보았다.

정말 그랬다. 전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이 애매하게 보여 ‘굳이 따지자면 여자’로 보였다면, 지금은 한눈에도 확연하게 ‘여자’로 보였다. 게다가 기분탓인지 조금 더 어려진 것 같고 피부도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자란 탓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에게 ‘너 예뻐졌다’라든지 ‘네가 여자로 보인다’ 따위의 말을 차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엘소드는 마음속으로만 끙끙 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