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1.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베어 넘긴다.

살이 갈라지고 피와 내장을 쏟으며 쓰러진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목을 칠 틈도 없이 날아드는 칼날을 막으며 발밑의 무언가를 짓밟는다.

방패를 든 팔이 울린다.

야수 같은 괴성과 함께 오른손에 든 칼을 휘두른다.

괴성도 몸짓도 전투로 인한 주변의 소음도 너무도 괴리되어 현실감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새어나온 ‘능력’은 주변의 강렬한 ‘감정’을 그녀의 안으로 쏟아 붓는다.

 

몇 차례고 무아지경에 검을 휘둘러 이윽고 숨이 턱에 찼을 떼에야 주변에 남은 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전투는 이미 그녀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고 기계적으로 활을 꺼내 시위를 당긴다. 날아간 화살은 갑주도 투구도 미처 가리지 못한 틈을 파고들어 가엾은 병사의 생을 마감시킨다.

비명도 감정의 단말마도 그녀에게 채 미치지 못한다. 멀다.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드는 대신 계속해서 활을 당기기로 한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건 육체를 단련하는 것도 아니오, 정신을 수양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살육을 위한 병기일 따름이다.

 

시작은 단 한 번의 살해. 그녀와 같은 인간도 아닌 거인을 살해한 그 날 이후, 그녀는 변해버렸다. 그전까지는 간혹 싸우는 일이 있다한들 은근슬쩍 사람을 죽이지 않고 부상만 입히거나 제압하는 정도로 넘어갔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자청하여 전투에 나섰고, 그녀가 날리는 화살은 어김없이 적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화살에 꿰뚫린 적들의 시체를 보며 그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시체가 널브러진 곁가 개울에서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던 그녀는 갑자기 그늘이 지자 움찔했으나 묵묵히 손을 마저 씻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모른 척 떠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렉서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자는 건가.”

“뭐가?”

“이대로 기사라도 되겠다는 건가? 지난번 네가 말한 바와는 다르지 않나.”

“……나는 더 할 말 없어.”

그녀는 그대로 렉서스의 손을 뿌리치고 가려 했다. 그러나 렉서스의 손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놔.”

“너는 너를 위해 살겠다고 말했다.”

“놓으라고 했다.”

“너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

“…….”

그녀는 거세게 렉서스의 손을 쳐냈다. 과묵한 거구의 기사 렉서스는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평소였다면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말을 외치고 말았다.

“너마저 맹세에 얽매이겠다는 건가!”

그 말에 울컥 무언가 말을 토해내려던 그녀는,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고 그를 외면해버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렉서스 또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

그녀는 어째서 렉서스가 그리도 그녀를 만류해왔는지, 그녀에게 스스로를 위해 살라 말해왔는지 그녀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그의 이유를.

 

렉서스는 본디 카멜롯의 기사는 아니었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은거하던 그에게 어느 날 빨간 머리의 젊은 기사가 찾아왔다. 젊은 기사는 렉서스에게 어떤 왕을 섬길 것을 요구했고, 조용한 나날을 바랐던 렉서스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다. 이미 전쟁에 진력이 나버린 그는 이전에 섬기던 주군과 나라가 멸망하자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아무도 모르게 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지내던 차였다.

그러나 젊은 기사는 렉서스의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젊은 기사는 그가 결국에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리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그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한명씩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시체에 남겨진 선명한 칼자국만으로도 충분했다. 렉서스는 마을사람들을 지키려 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시선을 둘 수는 없었다. 하루에 한 명 혹은 두 명. 때로는 대여섯 명씩. 젊은 기사는 어른뿐 아니라 여자나 어린 아이도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아이를 보던 어머니가 잠깐 눈을 뗐다 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아이는 처참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모든 그림자가 칼날을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숨을 곳 하나 없는 탁 트인 곳에서도 사람은 죽어나갔다. 단 한사람의 소행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렉서스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항복을 선언했고 젊은 기사는 그에게 맹세를 요구했다. 그리고 렉서스가 맹세로써 온전히 왕의 것이 되자, 그 젊은 기사는 남은 마을사람들마저 한사람도 남김없이 살해해 버렸다. 그저 입막음만을 목적으로.

 

렉서스는 그 기사를 - 렌기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건 비단 그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페루스와 카이 또한 비슷한 경로로 타의에 의해 카멜롯의 기사가 되었었다. 렉서스는 그녀마저 그런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왔고 그녀 또한 그를 이해했기에 언제나 스스로를 위해 살겠다며 그 바람에 응해왔다.

그러나 그런 그녀마저 변해버렸다. 과연 이 변화가 자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원인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를 외면한 채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렉서스는 가슴이 묵지근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