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비가 되고 싶었다. 육예를 고루 익히고 뜻을 바로 세워,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며, 바른 말을 하는 데 굽힘이 없고 바른 일을 행하는 데 거침이 없는 그런 선비. 그런 곧고도 바른 선비.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이미 그런 선비는 거의 없었다. 그녀 자신 또한 그런 이상을 목표로 삼은 건은, 거기에 이루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 단지 그뿐.

닉네임 민트. 본명 곽혜현. 나이를 밝히고 싶지 않은 이십대 후반의 여성. 보통사람에겐 있을 리 없는 능력이 있었고 보통사람이라고 보긴 무리가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친구의 스승 덕분에 그럭저럭 보통사람처럼 살 수 있었다.

뜬금없이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는.

 

곽혜현 - 민트는 고개를 들었다. 온몸이 만신창이라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앞쪽으로는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된 거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사람이었을까?

보통 운운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사람이었을까?

인간이 아님에도 두발로 서고 마음을 갖고 대화로 의사를 소통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할 시 폭력을 행사하는 거인 역시 눈앞에 실존한다. 뜨거운 피가 흐르며 죽을 수 있는 생물이다. 거인을 베고 찔러 치명상을 입힌 그녀였기에 거인 또한 ‘살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사람이었을까?

 

아까 떨어뜨린 피 묻은 검이 코앞에 놓여있다.

피.

선홍빛 영롱한 생명의 증거가 번들거린다. 살을 찢고 뼈를 치는 감각이 손에 남아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한 그 감각은, 행한 그대로 자신을 베어낸다. 환통(幻痛).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거인에 의한 상처가 아닌 바로 그 환통으로 심장이 베인다.

죽는다.

죽인다.

죽는다.

거인이 아닌, 바로 자신이.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일으킨 민트는 검을 들어올려 비척비척 거인에게로 다가간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불안한 걸음이었지만 멈추지 않는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댄다. 그럼에도 거인 앞에 멈춰선 그녀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치켜든다.

거인과 눈이 마주친다.

일순, 움직임이 굳어버린다.

숨조차 쉬지 못하는 그녀를 알았기에, 거인은, 눈을 감았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들릴 리 없는 명령을 듣는다.

「하라.」

푸욱- 살을 찢고 박히는 감촉이 검신을 통해 손에 전해져온다. 꽂은 칼에 체중을 싣는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이 전해져온다.

들릴 리 없는 기도를 듣는다.

「이제 임무를 마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부디 여기 남겨진, 타자의 뜻에 따라 자멸하기 위해 나아갈 이를 축복하소서…….」

마지막 숨이 끊기며 흘러들던 목소리도 잦아든다. 그녀는 칼에 기대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뒤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온다.

“그럴리가!”

세상을 부정하듯 그들은 외친다.

성지의 수호자가 쓰러졌다. 이 땅에서 태어난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는 거인이 죽었다. 신성한 초록의 성지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충격. 그렇기에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실을 부정하는 이가 있었다. 실성한 듯 흐느끼는 이가 있었다. 절망하여 무릎을 꿇는 이가 있었다. 안내한 노인과 뒤따른 신자들 중 충격을 받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민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드니즈가 몇 번인가 어깨를 두드린 끝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드니즈는 이미 검을 빼어든 상태였다. 그는 무감각하니 선언했다.

“그대들을 처단하오.”

가차 없이 그어 내렸다. 넋을 놓았던 이의 목이 떨어졌다. 드니즈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혈이 튀고 목없는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지는 자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이들도 하나둘 눈을 뜨더니 이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이가 있었다. 달아나려 하는 이가 있었다. 분노하는 이가 있었다.

그래, 그들을 여기서 몰아내거나 해산하도록 설득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드니즈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민츠 또한 칼을 빼들고 달아나는 이들의 등을 찔렀다. 바닥에 피를 흩뿌리고 쓰러진 숫자가 두발로 선 숫자보다 많아졌고, 이내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드니즈는 두토막이 나지 않은 시체를 찾아 꼼꼼하게 확인사살했다. 드니즈를 거들던 민츠는 고개를 돌려 민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거인의 앞에 서 있었다. 민츠는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었다. 그리고 비명이 끊기고 기묘한 침묵이 찾아드는 것도 들었다. 드니즈의 ‘작업’소리도 들려왔지만 그녀에게는 어떠한 자극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힘주어 칼을 뽑았다. 근육에 붙잡힌 칼날이 힘겹게 빠져나오며 선혈이 튀어 자신을 붉게 물들인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너지고 깨어진 것을 실 한 가닥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그런 자신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다가섰다. 돌아본 그녀는 마찬가지로 선혈에 물든 소년을 발견한다.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끌어안는다.

 

민츠는 민트의 포옹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마주 끌어안았다. 머리 위에서 민트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붕괴하려 했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어.”

역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안에 떠도는 무수한 말들 중 일부분만을 입에 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민츠는 그저 그것이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네가 닻이었던 거야.”

슬픈 듯 기쁜 듯 읊조리는 그녀의 말에 민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안아주고 싶다. 그녀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

강렬한 감정이 민츠의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흐느껴 울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